◈ 97화 Chapter 22: 최종보스 (4)
대강의 사태가 마무리되자 휴식을 끝낸 마왕이 말했다.
“대충 마무리도 된 것 같은데…… 나는 이만 가 봐도 될까?”
“잠깐.”
“왜?”
“상황이 바뀌었어.”
내가 그녀에게 자신의 영토에 있으라고 했던 이유는, 그녀와 함께 있어서 전혀 좋을 게 없는 존재이자 용사인 디오가 그때의 나와 아군이며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만약 그녀가 서쪽 영토에 있는 동안 디오가 찾아간다면, 내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이 소설이 그대로 [완결]이 나 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그것만큼은 당연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앞으로의 행동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그리고는 잠시 이어지는 침묵.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뭐가 잘못됐어?”
“……됐다.”
「야설 빌런이 오랜만에 등장한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전개에 눈을 크게 뜹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일부러 짐짓 모른 척하는 당신의 태도에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렇게 마왕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뒤돌아서자, 이를 지켜보던 하이디가 짧게 말했다.
“반.”
“왜?”
“쓰레기네.”
“…….”
「이 시대의 선비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표리부동(表裏不同) 함을 꼬집는 ‘하이디’의 촌철살인(寸鐵殺人)에 큰 유쾌함을 표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베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답잖은 농담은 그쯤하고, 그나저나 깽판이라니? 지금 이 난리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냐?”
“깽판도 깽판 나름이죠.”
물론 지금 제국의 상태를 본다면 이 꼬라지도 충분히 깽판이라고 볼 수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이 깽판의 주체가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내가 조용히 루의 시체로 다가서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우선, 루를 다시 살릴 겁니다.”
“……뭐?”
잠시 황당함으로 물들었던 것도 잠시.
베른의 표정이 이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어. 제아무리 너라고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무리야.”
“그렇겠죠. 지금까지였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미 이 세계는 상당히 뒤틀렸다.
수치로 따지자면, 정확히 10% 정도.
그 이야기는 즉, 지금까지의 상식은 더 이상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의미 없어진 상식은 생자와 사자의 경계를 허물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지금부터 할 일은 얼핏 보면 이해조차 가지 않는 일투성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루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 녀석뿐이었다.
‘우선, 녀석을 협상 테이블로 부른다.’
물론, 그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녀석이 그렇게 쉽게 협상 테이블로 순순히 나올 리도 없었을뿐더러, 만약 나온다고 하더라도 녀석에게 제시할 만한 협상 조건이 있어야 했다.
녀석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그런 조건이.
그리고 그 조건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가시죠.”
“어딜?”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깽판 치러.”
* * *
“저, 정말로 그게 전부입니다!”
“뒤져서 나오면 뒈진다.”
“히익! 저,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내 원래의 목적이었던 클리셰를 부수는 일도,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생산적인 일도 아니었다.
그저 깽판, 그 자체였다.
“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다 드리지 않았습니까!”
“싫어.”
빼앗고, 부수고, 죽인다.
얼핏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들.
내가 했던,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은 그런 일들이었다.
「[선]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패악질에 혀를 내두르며 큰 거부감을 표합니다!」
「[악]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이유 없는 악행을 환호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진최종보스] 속성이 크게 짙어집니다!」
“……깽판을 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착잡함이 묻어나는 베른의 얼굴.
참으로 그다운 반응이었으나, 지금은 저런 반응에 일일이 맞춰 줄 때가 아니었다.
“다른 의미가 더 있어요?”
“하지만 이건…… 아니다.”
“가시죠. 갈 길이 바쁘니.”
“……바쁘다고?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냐?”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내가 그렇게 베른을 뒤로한 채로 돌아서자,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마왕이 슬쩍 끼어들었다.
“저 아저씨의 고리타분함에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네 행동은 나도 조금 이해가 안 가. 대체 무슨 생각이야?”
“확인하는 중이야.”
“뭘?”
우습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조차도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지금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손에 잡힐 것 같은 뜬구름 잡는 것처럼 두루뭉술한 것이었다.
“글쎄.”
“……말을 말지.”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지났다.
죽이고, 부수고, 빼앗는 시간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그 어떤 이야기나 난관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것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배제 시킨 것이었으니까.
상황이 그러했으니, 그에 대한 반응이 싸늘하기 그지없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대다수의 독자가 아무런 [서사]도 없고, 의미도 없는 단순 도적 행위를 반복하는 당신의 모습에 큰 지루함을 표합니다!」
「[악]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습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아무런 의미 없는 소모성 행위를 반복하는 당신의 행보에 의아함을 표합니다!」
「지속적인 의미 없는 행위로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감소합니다!」
「현재 비중: 12.8%」
작용은 늘 반작용을 부른다.
그리고 이런 내 의미 없는 행위에 대한 반작용은 생각보다도 빠르게 찾아왔다.
“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졸음.
‘이것 봐라.’
그 어떤 마법이나 술수도 나를 강제적으로 재울 수 없었기에,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예지몽]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 * *
「“자네, 그 소문 들었는가?”」
「“소문? 무슨 소문?”」
「“행상인을 하는 내 친구가 그러더군. 지금 제국의 수도가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고.”」
「“행상인이라…… 설마 깁슨 그 친구는 아니겠지? 그 친구는 저번에도 제도 근처에서 수백 마리의 드래곤을 봤다고 뜬금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가.”」
「정곡을 찌른 말이었던 걸까, 술기운을 빌려서 신나게 떠들려던 사내의 몸이 움찔했다.」
「“……깁슨 그 친구는 맞지만, 아무튼 요즘 동세가 심상치가 않네.”」
「“심상치가 않다라…… 아직 술이 남았으니 어디 한 번 계속해 보게.”」
「나름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그저 한 번의 술안주로 삼겠다는 뜻이었지만, 사내에게는 그것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는지 신나게 입을 열었다.」
「“마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악하고 거대한 악이 출몰했다고 하네. 제도를 잿더미로 만든 것이 바로 그 거악이고 말이야.”」
「“하하, 깁슨 그 친구치고는 제법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군.”」
「“그것뿐만이 아니네. 그 거악이 바로 그 서쪽의 마왕을 자신의 수하로 삼았다고 하더군.”」
「“그것참, 무서운 이야기로군. 다른 이야기는 없나?”」
「어차피 이야기를 시작한 사내 역시도 그저 술안주로 삼을 이야깃거리가 필요한 것에 불과했기에, 이내 함께 유쾌하게 웃으며 술잔을 넘겼다.」
「“왜 없겠나? 전설 속에 존재하는 마지막 왕국의 최후의 기사단 이야기는 이미 들어보았겠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해 주던 그 고리타분한 이야기 말인가?”」
「“그래, 그 이야기 말일세. 얼마 전에 바로 그 기사단이 묻혀 있다던 무덤이 깔끔하게 털렸다고 하네.”」
「“그것참, 담도 큰 도굴꾼이군. 최후의 기사단이라면 아직도 기사들의 우상이나 다름없을 텐데 말이야. 그런 물건들을 함부로 취급했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 않겠나?”」
「“바로 그 점이 이상하네.”」
「“이상하다니?”」
「“자네도 알다시피, 최후의 기사단의 무덤은 기사를 꿈꾸거나 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성지와도 다름이 없네. 그런데 그런 무덤이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털렸다? 이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거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사내가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는 거지. 그뿐만이 아닐세. 최후의 기사단의 영혼이 노하기라도 한 건지, 그 근방에서 유령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부쩍 늘었네.”」
「“유령?”」
「“그것도 최후의 기사단과 똑같은 복장을 한 유령들 말일세.”」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에 술잔을 마주하던 다른 사내가 김이 빠진다는 듯이 말했다.」
「“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만, 마지막 부분이 조금 아쉽구먼. 뜬금없는 유령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제법 흥미진진했을 텐데 말이야.”」
「“지금 내 말이 그저 헛소문이라는 겐가?”」
「“헛소문이면 어떻겠나?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한들, 이런 시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텐데.”」
「사내의 말은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곳은 제국의 통치마저도 벗어난 변방 중의 변방으로, 그 흔한 지역 특산물 하나조차도 없는 덕에 오랜 역사 동안 그 흔한 침략자 한 번 겪어 보지 않은 말 그대로 깡촌이었다.」
「“하긴.”」
「그렇게 술잔을 마주친 사내들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취기가 가득 오른 사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응? 소리라니?”」
「“조금 전부터 무슨 소리 들리지 않나?”」
「“취했나 보군. 오늘은 이만 들어갈 텐가?”」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저게 뭐야?”」
「사내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어느새 하늘을 가득 메운 어둠. 벌써 밤이라도 온 건가? 사내에게 있어서 이렇게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하염없이 술잔을 넘긴 적이 영 없는 일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 어느새 하늘을 가득 메운 그 어둠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깐…… 저건…….”」
「술이 다 깨 버린 사내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수백에 이르는 웅장한 기사들의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 눈동자에 비친 기사들이, 땅이 아닌 하늘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광경을 본 사내의 눈동자에 기사들의 가슴에 박힌 한 가지 표식이 보였다. 어렸을 적 보던 동화책과 연극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았던 문장. 그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그가 알기로 오직 한 집단뿐이었다.」
「“최후의 기사단…….”」
「시대를 호령했던 고대의 망령들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