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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98화 (98/164)

◈ 98화 Chapter 22: 최종보스 (5)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몽사몽 한 와중에 시끄러울 정도로 들려오는 하이디의 목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지자, 그와 함께 주변의 시야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이디와 그 옆에서 어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베른과 마왕의 모습.

“……사내자식이 허약해 가지고.”

베른은 그렇다고 치고 마왕까지 모여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갑자기 쓰러진 게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그냥 그대로 콱 죽어 버리지 그랬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은 누가……!”

「야설 빌런이 교과서에 수록되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마왕’의 새침데기 발언에 흥분으로 콧김을 내뿜습니다!」

「등장인물, ‘서쪽의 마왕’의 [츤데레] 성향이 증가합니다!」

“…….”

그렇게 마왕이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애써 모른 척하며 뒤돌아서자, 이를 지켜보던 베른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 네가 갑자기 쓰러지다니.”

“별일 아니에요.”

“별일 있다는 소리군.”

여전히 귀신같은 눈치.

베른의 말처럼,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은 상당히 분명해 보였다.

「[예지몽] 클리셰의 효과로, 당신에게 모종의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꾼 꿈은 일종의 경고였다.

이제부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테니 대비를 하든지, 준비를 하든지 하라는 말.

그와 함께 나는 지금껏 품어오던 의문점 중 하나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무언가 있다.’

내가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클리셰.

이것은 단순히 작가 놈의 의도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어 보였다.

만약 녀석의 의도였다면 내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독려하면 독려했지, 제지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내가 지금껏 품고 있는 의문점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내가 부숴야 할 가장 큰 [클리셰]가 무엇인지 말이다.

‘움직여야겠군.’

내가 일행들을 향해서 말했다.

“곧 우리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찾아와? 누가?”

“망령들.”

“망령이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그와 함께 베른의 눈가가 살며시 가늘어졌다.

“……루를 살리는 일과 관련된 일이냐?”

“아마 그럴 겁니다.”

내가 ‘죽은 자’를 되살리려 하는 타이밍에 하필 ‘죽은 자’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즉, 지금 나를 찾아오고 있는 망령들은 단순히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니라 루를 되살리기 위한 모종의 열쇠라는 뜻이었다.

‘퍽이나 친절하군.’

내가 그렇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야, 저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던가.

베른의 말처럼, 어느새 지평선 너머부터 몰려오고 있는 한 군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환한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유령 군마들.

그 압도적인 광경을 바라본 베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정말 왔군.”

그와 거의 동시에 성검을 뽑아 든 베른이 마른침을 삼키며 우리를 향해서 달려오고 있는 유령 군마들의 앞을 막아섰다. 베른이 든 성검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지며 그들이 부딪치려던 순간, 유령 군마들의 돌격이 그 어떤 제동거리도 없이 단숨에 멈췄다.

말 그대로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기에 가능한 현상.

그와 함께 선두에 선 한 유령기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너희들인가.]

음울하게 울려 퍼진 그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절망을 안겨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목소리였다.

물론, 그래봤자 나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말이다.

“맞아.”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이었는지, 이에 흥미를 표한 유령기사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과연…… 그대 또한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구나.]

딱히 유령기사에게 특별한 재주나 안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머리 위에 난 뿔과 날개가 유독 눈에 띄었을 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걸.”

[건방진…….]

그가 노기를 드러내자, 그를 비롯한 수백의 유령기사들에게서 음울한 오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산 자들의 세상에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기운.

바로 그 기운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감히 우리를 깊은 잠에서 깨운 죄, 달게 받으라!]

그오오오오!

그와 함께 시작된 유령 군마들의 맹습이 시야를 가득히 메우기 시작했다.

“크윽!”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사인 베른조차도 신음을 내뱉으며 견디기 힘들어할 정도의 거대한 기운.

“반!”

“걱정 마.”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라도 톡톡히 잘못 골랐다.

「[먼치킨]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먼치킨] 클리셰 효과로, [먼치킨] 앞에 만인이 평등해집니다!」

가볍게 휘둘러진 단 한 번의 손짓.

그 가벼운 손짓에 나를 향해서 달려들던 수백의 유령기사들이 순식간에 먼지처럼 흩어져 내렸다.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아무리 최후의 기사니 고대의 기사니 하고 띄워 줘 봤자, 나에게 있어서는 어차피 조금 튼튼한 시체에 불과한 수준.

[사바세계에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어디서 염라대왕 정도 되는 양반이랑 대작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지만, 어차피 망령은 망령에 불과한 법.

‘뭐, 설사 염라대왕 본인이 와도 별로 달라질 건 없겠지만.’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먼치킨]스러운 활약에 환호합니다!」

내가 대장 격으로 보이는 유령기사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감히 생자가 사자에게 질문을 하는가.]

“그거야 내 마음이고. 질문에나 대답해. 다시 무덤에 곱게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그 순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마른하늘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파하하……! 안식을 방해한 주제에 감히 그 안식을 대가로 겁박을 하느냐? 어디 한번 해 보아라. 그거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바이니.]

‘이것 봐라.’

아무래도 이미 시체라서 그런지, 목숨 갖고 하는 진부한 협박은 통하지 않는 모양.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런 식으로 고개 뻣뻣이 들고 배짱 장사하는 족속들의 근원은 대부분 자존감을 바탕으로 한다.

저들 식으로 말하자면 소위 말하는 기사들의 명예인 셈.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저들의 자존감이 존재의 소멸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면, 그 자존감을 뭉텅 깎아내리면 그만이다.

“그거 알아?”

[뭘 말이지?]

“도대체 왜 이 뻔한 동네에서는 앞에 ‘고대’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무조건 한 수 접어주고 오버 테크놀러지는 물론이고 초고대문명 취급을 해 주는지 말이야. 막상 따지고 보면 그냥 옛날 물건이랑 옛날 인간들이잖아? 제대로 보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 말이야.”

「역사학과 학부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마지막 왕국이니, 최후의 기사단이니 하는 것도 똑같아. 따지고 보면 그냥 옛날 인간들이 철기인지 청동기인지도 모를 낡은 유물 가지고 별 대단하지도 않은 족속들이랑 투닥거렸다는 건데, 후대에서는 그게 무슨 전설이라도 되는 양 신나게 떠들지. 막상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런 걸 선점 효과라고 하던가? 아니면 빈집털이?”

그와 함께 눈에 보일 정도로 두드러진 동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말은 그럴듯하게 하고 있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너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과거의 망령에 불과하다는 소리지. 기사라고? 그 시대의 기사가 잘나 봤자 지금 시대에서 몬스터 한 마리나 잡을 것 같아?”

[지금 감히 기사의 명예를 모욕했느냐!]

「일부 독자가 당신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모욕은 무슨. 깎아내릴 명예가 있어야 모욕이지. 작은 손짓 한 번에 사라져 버릴 존재에 불과한 네게, 그 어떤 명예나 가치가 있는 것 같아? 착각도 유분수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웃기지…….]

“웃기지 말라고? 그렇다면 증명해 봐.”

내가 대놓고 도발하자, 이를 참지 못한 유령기사가 결국 나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그오오오오!

거칠게 일어선 유령 군세가 그의 뒤에서 마치 해일처럼 일어섰다.

마치 영혼을 걸기라도 한 것 같은 혼신의 일격.

뭐, 결과적으로 보자면 고작 딱밤 한 대에 의해서 미수로 그쳤지만 말이다.

[말도 안 돼…….]

「다수의 독자가 시대를 호령했던 강자의 출현에도 끄떡없는 당신의 [먼치킨]력에 환호합니다!」

그와 함께 유령기사의 입에서 절망이 울려 퍼졌다.

[나는…….]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어긋난 [개연성]이 회복됩니다!」

그와 함께 유령기사들의 전신에 채워져 있던 갑옷들이 녹슬고,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휘황찬란했던 과거가 이제는 고작해야 낡은 구시대적 유물로 탈바꿈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변해 버린 겉모습만큼이나 영혼이 작아진 기사에게 내가 말했다.

“이제 묻는 질문에 대답 좀 해 주지?”

[무, 물론입니다! 나으리.]

아까의 당당함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비굴함.

어째 조금 미안해질 수준이었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다 제 업보인 것을.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법을 알고 있나?”

[죽은 자를 말입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나으리.]

그래, 그렇게 말하겠지.

일개 유령이 대답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을뿐더러, 어차피 처음부터 대답을 원하고 한 질문도 아니었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게 불가능하다면, 너희는 어떻게 이 세상으로 왔지?”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균열 때문입니다요.]

“균열?”

모른 척 묻고 있었지만, 그 균열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잇는 균열. 저희는 그곳을 통해서 왔습니다. 나으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에 대해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다면 그 균열을 통해서 죽은 자를 다시 불러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겠네?”

[그건…….]

“어차피 너에게 가능과 불가능을 묻는 건 아니야. 그냥 그렇다는 소리지.”

일종의 밑밥.

이렇게 얻어낸 최소한의 [개연성]이, 이후에 내가 ‘녀석’과 협상한 후에 루를 되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개연성]을 만들어 주게 된다.

이로써 협상 테이블은 만들어진 셈.

이제 남은 일은 협상 상대를 불러내는 일뿐이었다.

“이만 가 봐. 볼일은 끝났으니.”

[알겠습니다요. 나으리!]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유령기사들이 사라지자, 내가 슬쩍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만 나오지 그래? 지켜보고 있던 거 다 알아.”

그때였다.

마치 세상을 이루는 톱니바퀴가 멈추는 것처럼 멈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징조.

「관리자의 권한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작품이 비공개 처리됩니다!」

마침내 호구…… 아니, 협상 상대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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