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Chapter 22: 최종보스 (6)
“오랜만이야.”
그와 함께 눈앞에서 나타난 문장.
「또 무슨 수작질이지?」
첫마디부터 의심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지금까지 쌓아 온 내 이미지가 제법 강렬하게 박히긴 한 모양이었다.
“별건 아니고, 대화 좀 할까 해서.”
그와 함께 눈앞의 글자가 조금 깨져 나갔다.
마치 무언의 분노라도 표현하듯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너와 할- 대화는 없다.」
무슨 삐진 여자 친구도 아니고, 제대로 토라진 걸 보니 지금까지는 없었던 녀석의 인간미가 조금은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내 요구 조건은 간단해. 루를 살려내. 그게 내 조건이야.”
「여전히 개소리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내가 왜?」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슬슬 미끼를 던질 수밖에.
“내가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거든.”
「허세는 여전하군. 이곳은 내가 만든 세계다. 너 따위가 무슨 행동을 하든, 무엇을 알아내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전히 재수 없기 짝이 없는 말투.
누가 아니랄까 봐 디오 녀석과 판박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여긴다면, 지금 당장 나를 여기서 없애 버리면 될 텐데?”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만 네 주제를 깨달아라. 등장인물.」
또, 또 그놈의 등장인물.
이제는 지겨워서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러면 협상은 결렬됐다고 봐도 되는 건가?”
「처음부터 성사된 적도 없는 협상이 결렬됐다는 것도 우습군.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말처럼 손쉽게 포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정도 직접 행동으로 보여 줄 필요성을 느꼈을 뿐.
“그래? 그러면 지금부터 내 마음대로 한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지 뭐.”
내가 하라고 해서 안 할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필요로 하는 [개연성 무시] 등급이 부족하여, [4500G]가 추가로 소요됩니다!」
「[5000G]가 소요됩니다.」
그와 함께, 멈춰 있던 세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이변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곧이어 눈앞에 당황함이 깃든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마음대로 하라며?”
그렇게 점차 커지기 시작한 균열은 이내 이 장소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생과 사의 경계에 입장하였습니다!」
「생자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구역입니다! 초당 체력이 [1%] 감소합니다!」
「[먼치킨] 클리셰 효과로, 해당 페널티를 무효화합니다!」
그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문장이 조금씩 떨렸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하지만 이곳에 온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글쎄…… 생각보다 많은 것?”
「웃기지도 않는 소리.」
“뭐 그래도 사람의 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말할게. 루를 살려내. 참고로 이건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야.”
그와 함께 눈앞의 문장들이 아까와 같은 분노로 물들었다.
「협박? 주제를 모르는 것도 정도껏 해라. 이곳까지 와서도 내 도움 없이는 한낱 등장인물 하나 살리지 못하는 게 네 한계다.」
녀석다운 제법 삐딱한 말이었으나, 어차피 그 역시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어차피 이곳까지 온 것도 조금 더 그럴듯한 연출을 위해서일 뿐, 처음부터 큰 의미는 없었다.
왜, 결전도 그냥 아무것도 없는 평야보다는 제법 그럴듯한 장소에서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내가 지금 이 장소까지 온 이유는 고작 그 정도였다.
“이게 내 한계라면, 네 한계에 대해서도 한 번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무슨 개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무슨 소리긴.”
내가 고작 이따위 잡담이나 나누려고 여기까지 왔을 리가 있겠는가.
-“뭐야, 여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와 함께 생과 사의 경계 저 너머에서 울려 퍼진 익숙한 목소리.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눈앞에 있는 문장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건…….」
명백한 동요.
그러한 동요를 불러일으킨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왕과 베른이었다.
「어떻게 일개 등장인물 따위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드러난 그 동요는 너무나도 허점투성이였다.
조금만 건드려도 푹 하고 쓰러져 버릴 정도로.
“그것참, 웃긴 말인데? 네 말대로라면 나 또한 네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며? 그런데 저들을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뭐지?”
「너…….」
“내가 맞춰 볼까?”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저들의 정체가 뭔지 몰라. 어디서 왔는지, 어떤 존재인지. 아무것도 모르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내가 만든 등장인물이고, 내가 만들어 낸 설정이다.」
“그래? 그러면 그 잘난 설정 좀 물어보지. 베른의 아내의 이름이 뭐지?”
그와 함께 찾아온 잠깐의 침묵.
그러나 녀석이 한 대답은 회피였다.
「그따위 낡은 설정. 진작 잃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군.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으나 문제는 이 질문 자체에 함정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잃어버렸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그러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자고.”
「뭐?」
“베른!”
내가 그렇게 외치자, 경계 너머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던 베른과 마왕이 이내 목소리를 이정표 삼아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반!”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그 전에, 베른 당신 아내 이름이 뭐였죠?”
그와 함께 베른의 표정이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한테 아내가 어디 있어? 그것보다 지금 여기는 어디고, 무슨 상황이냐니까?”
「지금 무슨 개수작 부리는 거냐. 분명히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에게는 과거에 아내가…….」
그때였다.
“뭐야, 저건?”
그 의문은 다름 아닌 마왕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꽂힌 곳은 다름 아닌 작가 놈이 써 내려간 문장으로 향해 있었다.
그와 함께 써 내려져 간 문장이 눈에 띌 정도로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본다고? 일개 등장인물이 어떻게 나를…….」
“흐응.”
그와 함께 마왕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네? 네가 날 모르고 있다니.”
그와 함께 동요로 요동친 문장이 나를 향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녀석이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뿐.
「웃기지도 않는 소리! 네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일개 등장인물이 나를 인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였다.
“등장인물? 내가? 꺄하하!”
조소가 가득 어린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며 마왕이 배를 붙잡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에서 듣던 사람 입장에서는 어딘가 슬프게 들릴 정도였다.
「이게 도대체…….」
그와 거의 동시에, 내가 문장 앞으로 다가섰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의아했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일단 들어봐. 예전에 내가 ‘통속의 뇌’라는 사고 실험에 대해 얘기했던 적 있지? 거기서 이어지는 맥락이야. ‘나는 이 소설 속 일개 등장인물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다. 고로, 나는 이 소설 속 일개 등장인물이 아니다.’라는 전제로 시작하는 이야기지.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었던 거야.”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진실을 깨달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함정.”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그야 당연한 이야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면 애당초 내가 협상 조건으로 내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의아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도대체 나에게 후원을 해 주는 이들은 누구이며, 나를 지켜보고 웃고 떠드는 독자들의 말이 도대체 왜 나에게 보이는지. 그리고 나에게 왜 그러한 편의가 주어졌는지.”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겠더군. 나에게 그런 편의를 준 것은 네가 아니야. 그럴 필요조차 없었지. 그런 편의들은 너에게 있어서는 그저 방해에 불과하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도대체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우습게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녀석은 납득하지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증명하는 바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녀석은 고정된 존재다.
녀석은 변화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이러한 편의들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의외로 간단한 답이 나와. 익숙한 상태창, 누군가의 메시지, 누군가의 후원금. 어디서 많이 보던 것들이지?”
「그게 무슨…….」
“그게 바로 소위 말하는, 트렌드라는 거야.”
그때였다.
「[제4의 벽]이 요동칩니다!」
그 순간, 눈앞의 시야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물에서, 문자로.
풍경에서, 문자로.
마치 고승이 깨달음을 얻어서 열반에 이르듯이 일어난 그 일은 나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야를 가져다주었다.
그와 함께 어느새 움직이고 있던 마왕과 베른의 몸이 다시금 멈췄다.
마치 그들에게는 아직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이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가장 최근에 이를 실험하기 위해서 말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했었어.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 알아? 곧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일들이 일어나더군.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건 네 의지가 아니었어. 또한 내 의지도 아니었지. 그렇다면 누구의 의지일까?”
「……또 궤변과 네 망상이 만들어 낸 헛소리만 늘어놓는구나. 이 세계는 내가 만들어 낸 세계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의지에서 비롯된 일들이며, 내가 만들어 낸 설정에 의해서 일어난 일들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모르고 있다.
이 이야기의 가장 근본적인 오류가 무엇인지.
“하하, 일개 삼류 작가에 불과한 네가 고작 소설에서 하차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이 빌어먹을 세계에 잡아 처넣는다? 이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없지. 이야말로 말 그대로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니겠어?”
「[제4의 벽]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들썩이는 시야.
이제 더 이상 이 세계는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
“정 궁금하면, 아랫놈한테 물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