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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03화 (103/164)

◈ 103화 Chapter 23: 장르 변경 (4)

염분이 가득한 끈적이는 바닷바람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유쾌함보다는 불쾌함을 먼저 선사하곤 한다.

그래, 마치 눈앞에 늘어선 저 대규모 함선들처럼.

“많기도 하네.”

그렇게 말하며 내 뒤에서 은근슬쩍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이제는 서쪽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애매해진 마왕이었다.

“따라왔었군.”

따라오는 걸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걸 보니, 아무래도 [자본주의] 버프를 사용한 모양.

이제는 이런 기분을 그녀뿐만이 아닌 베른이나 디오처럼 [비중]을 가진 [등장인물]들까지 느낀다고 생각하니 새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베른이야 그렇다 치지만, 만약 디오가 이에 대한 사용법을 제대로 깨닫기 시작하면 사태는 생각보다도 귀찮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운명이 걸린 일이기도 하잖아? 관심이 없을 수가 있어야지.”

“그냥 불구경 왔다는 말을 참 예쁘게도 돌려 말하네.”

“그러면 불구경 온 셈 치지 뭐.”

말은 그렇게 가볍게 했으나, 눈앞에 늘어선 대규모 함선들을 바라보는 마왕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지금 당장은 저 정도 수준이라면 얼마든지 몰려와도 상관없겠지만…… 계획은 있는 거야?”

그녀가 묻는 게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마왕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로 훗날에 벌어질 일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지.”

“그게 뭔 소리야?”

“말 그대로야.”

“한결같이 삐딱하기는.”

그러면서도 슬쩍 고개를 돌리며 몸을 풀고는 움직일 준비를 마친 마왕이 말했다.

“내가 할까? 아니면 네가?”

“우리까지 나설 필요도 없어.”

“그러면 저대로 상륙하게 내버려 두자고?”

“당연히 아니지.”

고작 입문 스테이지에서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최종보스]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나선다면 자연적으로 위엄이 감소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름대로 내 일행 중에서 2인 자에 해당하는 마왕이 직접 나서는 것도 영 모양이 빠지는 것도 사실.

그렇다면 상책은 무엇이냐?

압도적인 공포를 심어 줄 수 있으면서도, 그 공포가 고작 시작에 불과하다는 절대적인 절망감을 안겨 줄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이야,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아자토스.”

오랜만의 부름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아자토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단지 울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기 짝이 없던 바다에서는 폭풍이 불기 시작하며 잔잔하던 파도가 높이 치솟았다.

그 광경을 바라본 마왕이 슬쩍 말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건데, 저거 조금 꺼림칙하지 않아?”

그녀의 말을 들은 걸까, 아자토스의 시선이 마왕을 향해서 따지듯이 향했다.

[끼잇!]

「반려동물협회 회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반려동물을 외모로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마왕’의 발언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내가 그림자 속에서 머리를 들이민 아자토스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귀여운데.”

[끼이잇!]

「반려동물협회 회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개념 발언을 크게 지지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아자토스’와 관련된 떡밥에 작은 흥미를 표합니다!」

물론, 생긴 것만 뺀다면 말이지만.

「다수의 독자가 [적]을 앞에 두고서 삼류 콩트를 이어 가는 당신들의 위기의식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전투에 열광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행동을 재촉합니다!」

시간…… 아니, 분량을 너무 끌었던 걸까.

늘어가는 독자들의 원성을 보니 아무래도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온 듯 했다.

“아자토스.”

내 부름과 함께, 본격적으로 움직임에 나선 아자토스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맙소사…… 말도 안 돼.”

그렇게 드러난 아자토스의 모습은 약간 드러난 일부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주변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끼에에에에에!]

그런 아자토스를 바라본 내게 든 생각은 한 가지였다.

‘더 커졌네.’

구름 위에서 그림자의 일부만 비쳐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멸망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그 압도적인 모습은 흡사 인간들의 오만함에 분노한 신이 그들을 직접 벌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강림한 것만 같았다.

“당황하지 마라! 고작해야 대형 몬스터 하나다! 피해서 상륙 시도해!”

“어차피 죽음은 각오하고 왔다! 다들 물러서지 마라!”

제법 용맹한 응전.

그러나 저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고작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끼에에에!]

아자토스가 몸을 움직이자 벼락이 내리치고, 꼬리를 흔들자 폭풍우가 몰아쳤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재해.

“성직자 없어?! 나 죽…… 꺽!”

“원거리 공격 가능한 클래스 없어?! 빨리 지원…… 으아악!”

“도대체 저런 걸 무슨 수로 잡아!”

그들을 사냥하는 데는 아자토스의 직접적인 공격도 필요 없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들은 바다에 휩쓸렸고, 벼락이 내리치면 배가 반파됐다. 말하자면, 저들에게 있어서는 아자토스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재앙이고, 재해라는 소리였다.

수백 척에 이르던 함선들의 숫자가 반쯤 줄어들자, 가장 뒤쪽에 있던 함선들을 시작으로 뱃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아자토스를 뚫고 나아갈 수 없으니, 도주를 선택한 것이었다.

‘미련하긴.’

어차피 이곳까지 온 이상, 저들은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단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뱃머리를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고서 돌격해서 단 한 명이라도 내륙 땅을 밟았어야 한다는 소리다.

만약 그런 전술을 택했다면, 제아무리 나라고 할지라도 한두 명 정도는 충분히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내가 저렇게 되도록 유도한 거긴 하지만.’

그리고 그로 인한 효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끼이잇!]

기쁨의 교성을 내지르며, 공포로 물든 [플레이어]들의 감정을 마구잡이로 빨아먹으며 그 덩치를 불리고 있는 아자토스의 모습은 흡사 그 이름의 원주인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다수의 독자가 ‘아자토스’의 거침없는 활약에 환호합니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꺄아아악!”

“사, 살려…….”

“아, 안 돼! 어떻게 올린 레벨인데! 끄아악!”

그 광경을 바라본 어느 이름 모를 플레이어가 넋을 잃은 채로 중얼거렸다.

“……저기서 더 성장한다고? 그러면 어떻게 이기란 거야…… 저런 식이라면 앞으로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당연히 못 이기지.”

“뭐? 잠깐…… 당신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나는 마족의 상징인 뿔과 날개를 감춘 상태였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인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외모라는 말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와 함께 내 앞에 있던 플레이어의 목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내렸다. 본인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죽음.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마왕이 나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 나선다며?”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표면적이라니? 이미 대충 다 정리된 것 같은데? 더 할 일이 남았어?”

“뒷정리를 해야겠지.”

도망갈 곳이라고는 차디찬 망망대해뿐임을 마침내 깨달은 걸까. 플레이어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평범한 상식대로라면 제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이 폭풍우 속을 뚫고 돌아가기는커녕 내륙까지도 닿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저들은 [플레이어]였다.

어떤 능력과 아이템을 갖고 있는지 짐작되지 않는, 그런 존재들.

때문에 조금 귀찮더라도 손을 써 둘 필요가 있었다.

“누가 조금 섬세했더라면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끼이잉…….]

내가 바다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일어나라.”

마족 왕자의 절대적인 권위가 담긴 명령.

그리고 그 절대적인 명령은 죽은 자조차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예를 들면, 이미 바닷속에 수장된 녀석들이라던가.

“뭐, 뭐야?! 자, 잠깐! 누가 밑에서 잡아 당기……!”

“어푸! 사, 사람 살려!”

“놔, 놓으라고! 끄, 끄르륵!”

상황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간단하게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위로는 아자토스가 온갖 재해를 흩날리고, 밑으로는 망자가 된 옛 동료가 발목을 잡는 상황.

장기로 치면 장군이요, 체스로 치면 체크메이트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돌아가지.”

“벌써?”

“어차피 여기서 더 볼 필요는 없으니까.”

비록 당장은 쉽게 마무리가 됐다지만, 어차피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그렇게 우리가 내륙에 들어섰을 때였다.

“응?”

폭풍우로 몰아치는 바닷속을 기어 나오는 두 명의 인영.

설마 했건만, 정말로 저곳을 뚫고서 내륙에 도달하는 이가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뭐, 운은 별로 안 좋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 악조건을 뚫고서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최악의 장소였으니 말이다.

“이것 봐라.”

어째 익숙한 얼굴.

그 악천후를 뚫고서 대륙까지 헤엄쳐 온 이들은 다름 아닌 내가 [미리보기]를 통해서 보았던 에드윈과 강한성기삽니다였다.

“사, 사람?”

“……기다려. 이곳에 일반인이 있을 리가 없다.”

“그,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렇다면 설마…….”

“내 뒤에 서라.”

“선배…….”

그와 함께 슬쩍 붉어진 에드윈의 얼굴.

「솔로부대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에게 [정의 구현]을 요구합니다!」

「권태기를 겪고 있는 한 독자가 저 때가 좋을 때라며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아주 끝까지 지랄들을 하는군.’

비록 일방적이지만 나름대로 면식이 있는 사이였기에 조금은 살살 때려 줄까 했지만, 방금 전의 태도로 마음을 바꿨다.

최대한 악랄하고, 괴롭게.

“기회를 주지.”

“……당신 누구야.”

“질문을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행한 일은 그저 응시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쪽’의 기준에서는 개미보다 강하면 다행인 수준인 저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단순한 응시조차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꺄아악! 서, 선배 몸이!”

“……크윽!”

에드윈의 비명소리와 함께, 서서히 먼지로 흩어져 내리기 시작한 강한성기삽니다의 몸.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저들의 수준은 딱 저 정도였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먼지로 흩어져 내릴 수준.

그러나 여기서 끝내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둘 중에서 한 명은 살려 주지.”

내가 말했다.

“서로 죽여라.”

내 말에 강한성기삽니다가 코웃음 쳤다.

“……지랄하고 있군. 그런다고 네 말을 따를 것 같아? 그냥 죽여.”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어차피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지금 죽으면 그만일 뿐, 당장 살겠다고 동료 간의 신의를 저버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죽으면 다시 살아나면 그만이고, 떨어진 레벨은 다시 올리면 그만일 테니까.

때문에 [플레이어]인 저들을 협박하는 일은 아주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 정말로 죽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500G]가 소요됩니다.」

그와 함께, 강한성기삽니다가 걸친 아이템이 서서히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 무슨……!”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임에서 조금 죽는다고 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아이템과 레벨을 잃어버리는 게임은 없다.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하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벌인 일은 그런 전제 조건을 박살 내는 일이었다.

“레, 레벨이 내려가고 있어?”

아이템과 레벨.

그 두 가지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플레이어에게 있어서는 ‘죽음’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서, 선배!”

제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설의 [개연성]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면, 이 정도 일은 얼마든지 벌일 수 있었다.

‘효율이 영 안 좋다는 게 문제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방법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돈’과 ‘시간’.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산금]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루를 살리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정산금]을 사용하고 말았다.

즉, 모든 [플레이어]를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없다는 이야기.

더군다나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해야 하니, 지금 발생한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단으로는 맞지 않았다.

특출 난 한 명을 제거하는 용도로는 충분하겠지만,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많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은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적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가진 레벨과 아이템은 소중할 테니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목숨과도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서로를 죽여라. 그러면 살아남는 한 명은 살려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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