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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07화 (107/164)

◈ 107화 Chapter 24: 주연의 역습 (4)

그렇게 대강의 사태가 마무리되자, 도대체 어디서 혼자 놀다 온 건지 모를 서쪽의 마왕이 그제야 그 뻔뻔한 얼굴을 드러냈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든데.”

베른이 빈정거렸으나, 그녀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곧장 나에게 다가왔다.

“말해 둘 게 있어.”

이것 봐라…….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지금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와는 명백하게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말해 봐.”

“내가 널 돕는 이유는 그게 결과적으로 디오를 위한 것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는 너라면 충분히 알 거야.”

“언제는 이제 그딴 건 상관없다고 하더니?”

“그때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싸늘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를 보니, 아무래도 평소에 하던 시답잖은 소리나 했다가는 당장 동맹이고 뭐고 끊어 버릴 기세였다.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녀의 말처럼, 한때 목숨조차도 버리고서 디오에게 [해피엔딩]을 선사하려던 그녀였던 만큼 그때의 그녀가 했던 말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내뱉은 투정에 가까웠다.

「여자어 언어학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배려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당신의 무신경함을 질타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그러나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약간 슬퍼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 뻔한 법칙의 세계에서 짓는 저 미소의 의미를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 마치 곧 죽을 사람 같은 미소였다.

* * *

시원하다면 시원하고, 찝찝하다면 찝찝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갑판에 선 베른이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이게 옳은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군. 네 말대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존재들이 불사의 군대라면, 아무리 봐도 기름을 끼얹은 불길로 제 발로 걸어가는 행색 같은데 말이야.”

베른이 저런 의구심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 불사의 군대들이 즐비한 땅이었으니까.

“군대 가 봤어요?”

“……갑자기 웬 군대?”

“제가 아까 말했죠?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잘 키운 A급 관심 병사 하나가, 부대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죠.”

「예비역 병장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기분으로 자신의 군 생활 에피소드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예비역을 자처하는 일부 독자가 은근슬쩍 자신들의 썰을 풀며 자연스럽게 예비군 모임을 주최합니다!」

「미필을 자처하는 일부 독자가 자기들만의 리그를 주최한 예비역들의 행패에 큰 불만을 표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못 알아듣겠군.”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영악한 베른이 내가 한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네 말대로라면 죽음조차도 그자들에게는 별거 아닐 텐데?”

“죽음보다도 더한 게 있다면요?”

“그런 게 있다고?”

“있죠.”

어디까지나 그 상대는 [플레이어] 한정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단지 그뿐만으로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채찍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움직이는 사람에게도 확실한 이득이 있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배신을 할 테고, 그 배신은 치명타가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도의 안전장치가 필요하죠.”

“계속해.”

“현재 튜드 대륙의 상황은 무척이나 복잡해요. 수많은 이익 집단인 길드들이 자신들의 이권과 패권을 위해서 다투고 있죠. 말하자면, 지금의 상황은 그들의 내부에서 일어난 혼란을 잠시 바깥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베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내부의 불씨를 당기겠다는 거군.”

“맞아요. 만약 베른 당신이라면 1할도 되지 않는 확률로 얻어낼 수 있는 100의 이득과 10할의 확률로 얻어낼 수 있는 50의 이득이 있다면 무엇을 고르겠어요?”

“당연히 후자를 고르겠지. 타고난 승부사라면 모를까, 그 정도의 차이라면 도박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수준이니까.”

그와 함께 내가 말하고자 한 바를 눈치챈 베른이 살며시 웃었다.

“과연…… 그걸 미끼로 삼겠다는 거군.”

“맞아요.”

“재미있군.”

「[선]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음흉하게 흉계를 꾸미는 [악]의 행태에 어서 빨리 [참교육]이 시전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함께, 지평선 너머에서 새로운 대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튜드 대륙.

[플레이어]들의 고향이자, 앞으로 피바람이 몰아칠 곳.

“가시죠.”

* * *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긴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답답함을 감추지 못한 것은 에드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유일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인물인 디오에게서는 그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분위기에 질린 체다가 한마디 했다.」

「“휘유…… 까칠하시네. 역시 용사님다워.”」

「은근슬쩍 조롱이 느껴지는 어조. 제아무리 월드 퀘스트의 핵심 인물인 용사라지만, 어차피 플레이어인 그에게 있어서는 일개 NPC에 불과했다. 정면으로 용사를 거스르는 일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의 말장난 정도는 그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허용 범위 내였다.」

「“말조심하시지.”」

「그렇게 말한 이는 다름 아닌 어느새 정신을 차린 강한성기삽니다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체다가 슬쩍 웃었다.」

「“아하…… 미안해요. 그쪽 분을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닉네임이…… 강한성기사라고 하셨나?”」

「“사과할 대상은 내가 아닐 텐데.”」

「“아아, 그러네요. 미안해요. 용사님. 됐죠?”」

「입으로는 사과를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는 미소. 체다가 웃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강한성기삽니다가 보이는 반응이 최근 들어서 떠오르기 시작한 어떤 사회문제와 매우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발달한 기술 때문인지, 일개 인공지능에 불과한 NPC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 사람들. 때문에 NPC의 인격 존중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겪는 이런 상황도 최근에 있어서는 비교적 흔한 상황이었다.」

「“그만들 해요.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굳이 용사님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중재에 나선 에드윈의 말에 체다가 다시금 느끼하게 웃어 보였다.」

「“싸우는 걸로 보였어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신경 쓰이게 해서.”」

「“신경을 쓴 게 아니라, 혹여 당신이 입을 잘못 놀려서 월드 퀘스트가 잘못될까 봐 그래요.”」

「“이크. 예쁘장한 숙녀분께서 아주 야심이 많으셨네.”」

「“……말을 말지.”」

「예전부터 느꼈던 일이지만, 평소 강한성기삽니다 같은 돌부처 같은 이와 함께 했던 에드윈에게 있어서 체다의 느끼함은 거의 상극이었다. 몇 마디만 더 나눴다가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그러나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나저나 숙녀분은 저분을 왜 선배라고 부르는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블랙로즈는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냥 닉네임으로 부르면 되지 않아요?”」

「“그걸 몰라서 묻는 거예요?”」

「“네, 몰라서 묻는데요.”」

「알면서도 놀리는 건가? 하지만 에드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통역 시스템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까방베르 길드는 7대 명문 길드 중에서도 유일하게 유럽인들로 이루어진 길드였다. 외국인이라는 말. 제아무리 완벽에 가깝다지만 통역은 어디까지나 통역에 불과했고, 그 속에 숨겨진 언어유희나 속뜻까지는 해석해 주지 않았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에드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한성기삽니다에게로 향했다.」

「“……정말이지.”」

「은근슬쩍 원망이 뒤섞인 눈빛을 눈치챈 강한성기삽니다가 태연하게 말했다.」

「“강한성기사가 어때서?”」

「저 남자…… 진심이다. 그 당당한 눈빛을 본 에드윈은 이내 체념했다. 요즘에야 저런 스타일을 상남자라며 좋아하는 부류가 있다지만, 가까이 함께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물론, 그 상남자를 따르는 부류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모른 채로.」

「“……누구일지는 몰라도, 앞으로 선배랑 결혼할 여자는 피곤하겠어요.”」

「“그거 고맙군. 독신주의라서.”」

「……저것도 진심인가? 에드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강한성기삽니다의 속을 파내려는 걸 이내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생각할수록 자신만 손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얏!”」

「그렇게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영혼 없이 길을 걷고 있던 에드윈이 무엇인가 딱딱한 것에 부딪혀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런 게 있었나? 하며 에드윈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용사 디오의 등이었다.」

「“도착이다.”」

「그리고 들려온 용사의 딱딱한 목소리. 에드윈의 입장에서 제아무리 NPC라지만 이렇게까지 감정이 메마른 NPC는 또 오랜만이었다.」

「“그 통로라는 게 있는 곳이 여기인가요?”」

「디오가 멈춘 곳은 척 봐도 던전의 냄새가 물씬 나는 어느 동굴 앞이었다. 그러나 디오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아니다.”」

「“네? 그러면 여기는 왜 온 거죠?”」

「“아직 너희들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너희는 너무 약해.”」

「묵직한 사실. 그러나 에드윈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역시 월드 퀘스트답게 쉽게는 안 끝난다는 거군.’」

「두 대륙을 한꺼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퀘스트답게 쉽게는 끝나지 않는다는 소리. 물론, 연계 퀘스트가 이어질수록 최종 보상뿐만이 아니라 중간에 얻는 보상도 상당히 컸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감 역시도 커졌다. 그렇게 기대감을 부풀린 채로 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뭔가요? 용사님.”」

「“너희가 강해지기 위해서다.”」

「설명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디오의 말에 체다가 실망했다는 듯이 조금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용사님, 저 동굴 안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희 수준으로는 이곳에 있는 평범한 들짐승도 이기지 못할 수준인데요?”」

「체다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이곳에 있는 세 명의 플레이어, 정확히는 체다와 강한성기삽니다 같은 경우는 튜드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랭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대륙에서는 들판에 돌아다니는 그 흔한 토끼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수준 차이. 던전에서 레벨업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사냥이 성립되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방법이 있다.”」

「“네? 어떻게요?”」

「그리고 이어진 디오의 비장한 말에 체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절대로 일개 인공지능에 불과한 NPC가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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