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108화 (108/164)

◈ 108화 Chapter 25: 하차 이후의 게임 속 (1)

「[튜드 대륙(북부)]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미지의 대륙에서 튜드 대륙을 방문한 첫 번째 방문자가 되었습니다! [명성]이 증가합니다.」

「북부의 패자, 라스 왕국의 영토에 무단 침입하였습니다! 라스 왕국의 용맹한 전사들이 당신을 주시할 것입니다.」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디딘 후, 내 감상은 비교적 간단했다.

“거창하구만.”

해변을 넘어서 드러나기 시작한 웅장한 항구 도시의 모습.

도대체 항구에 저런 게 왜 있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실용성 없는 생김새를 보니, 이제야 이곳이 조금이나마 [게임]처럼 느껴졌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난 이곳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만.”

“그렇겠죠. 저도 그렇고.”

“무지를 너무 당당하게 밝히는 거 아냐?”

“걱정하지 마시죠.”

그 점에 있어서 베른이 아직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곳은 [게임]이었지만, 명백하게 따지면 [소설 속]이라는 사실을.

으레 그렇듯이 소설 속에서 존재하는 최고의 정보원은 돈만 받고 뒤통수칠 궁리나 하는 도둑 길드도, 자칭 예언자랍시고 저주나 퍼붓고 가는 마녀도 아니었다.

“마침 지나가네요.”

“누가?”

내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지나가던 평범한 행인들이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일단 있어 봐요.”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대화가 시작됐다.

“자네, 그 소문 들었는가?”

“어떤 소문?”

“이번 미지의 대륙 원정에 대한 소문일세.”

“그것참, 흥미롭군. 자세히 말해 보게.”

“사실, 그 원정의 배후에서 버밀리온 제국이 은밀하게 관여했다는 소문이네.”

“관여하다니?”

“자네도 이미 알고 있을 거네. 버밀리온 제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의 상층부들이 ‘여행자’들의 존재를 무척이나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불사의 존재인 그들이 이미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제아무리 제국이라 할지라도 대놓고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기에 이미 버밀리온 제국과 오즈 제국을 필두로 7대 길드와 ‘포르크 조약’을 맺은 것 아니겠나.”

“바로 그 때문일세. 조약 때문에 대놓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 뒤에서 움직인 게지.”

“그렇군. 계속해 보게.”

“…….”

“…….”

「프로불편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어차피 알아먹지도 못할 ‘포르크 조약’이니 ‘버밀리온 제국’이니 하는 무분별한 고유 명사의 남발에 큰 불편함을 표합니다!」

「매의 눈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쓸데없이 분량을 잡아먹는 [작가] 놈의 수작질을 지적합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길어지기 시작한 그들의 대화를 대충 요약하자면, 버밀리온 제국이 미지의 대륙 원정의 건과 관련해서 모종의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말하자면, 어디에나 있는 시시한 음모론인 셈.

물론 그것이 시사한 음모론으로 끝날지 아닐지는 지금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들었죠?”

“……듣긴 했다만, 솔직히 말해서 조금 어이없군. 그냥 행인들끼리 떠드는 헛소문일 확률이 더 높지 않나?”

과연 베른다운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이곳에서 그런 상식을 일일이 따졌다가는 끝도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물론, 여기서는 아니겠지만.

그리고 조금 전 행인들의 대화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영향이란, 다름 아닌 [클리셰 붕괴율]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래 있던 장소이자, 이곳에서는 ‘미지의 대륙’이라고 부르는 원래의 세계는 이미 내가 질릴 정도로 활개 치고 다닌 덕에 물리 법칙 같은 상식은 물론이거니와 시체들마저도 살아서 걸어 다니는 혼돈의 땅이 되어 있었다.

물론, [등장인물]들 역시 변한 것은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도시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고, 인물들은 순수했다.

아직까지는.

‘마침 잘됐군.’

안 그래도 [장르 변경] 이후에 나타난 현상 때문에 내 진짜 목적인 [클리셰 파괴]가 주객전도화 될까 염려했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베른.”

“왜?”

“갈 곳이 생겼습니다.”

“어딘데?”

“일단 따라오시죠.”

그렇게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번화한 시장이었다.

“여기는 왜?”

“사람 좀 만나려고요.”

“사람? 이곳에 아는 사람이 있어?”

“지금부터 만들면 되죠.”

“……뭐?”

「오늘도 홀로 화장실에서 도시락으로 한 끼를 해결한 한 독자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인간관계를 우습게 보는 당신의 발언을 지적합니다!」

……어째 조금 슬픈 지적인데.

비록 사회성이 크게 의심되는 의견이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독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외부인인 우리를 경계할 텐데? 지금 우리의 상황이 눈에 띄어서 별로 좋은 상황도 아닐 테고 말이야.”

역시나 그 다운 상식적이고 타당한 의견.

그러나 베른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렇겠죠. 정말로 우리가 외부인이라면.”

“그게 무슨 뜻이야?”

“지켜보시죠.”

그리고 내가 걸어간 곳은 척 봐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조리 다 꿰고 있을 것처럼 생긴 어느 아주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버밀리온 제국으로 가고 싶다고?”

“예.”

“그 이야기라면 마침 잘됐어. 시장 중심에 있는 헤일로 상회에서 조만간 버밀리온 제국으로 향하는 상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해.”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토착민’끼리 돕고 살아야지.”

조금의 의심도 없는 깔끔한 대답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베른의 표정이 살며시 놀람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된 거냐?”

“별거 아니에요. 그저, 어쩌면 우리가 저들에게 있어서 외부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와 함께 베른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졌다.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불사의 군대와 관련된 이야기냐?”

아니나 다를까, 눈치 하나는 여전히 귀신 같았다.

“맞아요.”

“과연……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주민이 불사의 존재라는 건 아니라는 소리군.”

“정확해요.”

베른이 말하는 것처럼, 아까 내가 행인들의 대화로 알아낸 사실은 버밀리온인지 뭔지 모를 제국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시시한 사실 따위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짜 정보는, 바로 이 게임 속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숨겨진 대립이었다.

말하자면,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과 이방인에 해당하는 [플레이어]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인 셈이었다.

“아마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토착민들이 착취당하는 구조였을 겁니다.”

예전에 [미리보기]를 통해서 보았던 정보에 따르면 이곳의 국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2대 제국이니 왕국이니 하는 것들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실상은 이미 7대 길드로 나누어진 [플레이어]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꼭두각시 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 와중에 그 꼭두각시에 불과한 제국이 미지의 대륙 원정과 관련된 일에서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말하자면, 이번 [월드 퀘스트]를 기회로 삼은 것은 플레이어들뿐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제야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

그와 함께 베른의 입가에 살며시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일부 독자가 어느새 당신과 유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진주인공]의 모습에 경악합니다!」

「선비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근묵자흑(近墨者黑)이 따로 없다며 혀를 찹니다!」

「[진주인공]을 추종하는 한 독자가 순수했던 [진주인공]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며 거칠게 항의합니다!」

……사람을 무슨 병균 취급하는구만.

어쨌거나,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가시죠.”

* * *

그렇게 헤일로 상회에 도착한 우리는 별다른 수고 없이 버밀리온 제국으로 향하는 상행에 동행할 수 있었다.

“버밀리온 제국으로 간다고? 마침 잘됐군. 우리도 상행을 호위해 줄 용병을 찾고 있었거든. 아무래도 ‘여행자’들은 영 책임감이 없어서 말이야. 예전에 몇 번 놈들을 믿고 의뢰를 맡겼다가, 책임감 없이 도망가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과연…….

아무래도 토착민과 플레이어들 사이의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도 깊은 듯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여행자, 즉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그저 게임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의 판단 아래 ‘상행’이라는 퀘스트가 실패할 것 같거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경우, 그냥 제멋대로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게임에 불과했고, 실패한 퀘스트는 다시 하면 됐으니까.

‘생각보다 일이 쉽겠군.’

상행은 무난했다.

물론 도중에 몇 번의 몬스터와 산적을 만나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곳의 몬스터와 산적들의 수준이라고 해 봤자 내가 살짝 째려보면 알아서 제멋대로 죽는 수준이었다.

말하자면, 고작 그따위 등장으로는 전혀 위협이나 이벤트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설정]을 중시하는 한 독자가 그 정도 힘의 차이라면, 몬스터들이 본능적으로 알아서 피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개연성] 오류를 지적합니다!」

그것도 그러네.

「전투 민족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상대의 힘을 느끼는 것도 역량이라며, 해당 [개연성] 오류 지적에 반박합니다!」

이것도 그럴듯하군.

그렇게 [독자]들의 말을 보며 말 위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버밀리온 제국의 국경 도시를 지나서 버밀리온 제국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이네.”

시간으로 따지면 대충 3일 정도.

제법 일찍 도착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이곳이 [게임] 속임을 감안한다면 지금껏 플레이어들이 도망친 이유도 납득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3일짜리 퀘스트라…… 망겜이 따로 없군.’

내가 그렇게 평가하는 사이, 무난하기 짝이 없는 이번 상행에 크게 만족한 상인이 나에게 말했다.

“정말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상행이 아무런 피해도 없이 무사히 끝나게 됐어.”

“그렇군요.”

“이건 감사의 표시일세.”

「[버밀리온 제국 금화] 5개를 획득하였습니다!」

거참, 보상 한 번 게임답구만.

어차피 보상을 바라고서 한 일이 아니었으니, 딱히 뭘 주든지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수도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역시 그곳으로 가겠다는 건가?”

“아마 맞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수도의 중심이자, 버밀리온 제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황궁이었다.

「튜드 대륙의 패자, 버밀리온 제국의 황궁에 무단으로 침입하였습니다! 버밀리온 제국에 충성하는 모든 존재가 당신을 적대합니다!」

“웬 놈이냐!”

“알아서 뭐 하게.”

고작 말 한마디.

그래도 명색이 제국의 황궁을 수호하는 기사들이랍시고 째려보는 정도로는 죽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 정도 수준이었다. 원래의 세계에 존재하는 토끼보다도 약한 이들이 그 한마디를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끄어어억!”

“귀, 귀가……!”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척 봐도 가장 화려해 보이는 궁이었다.

그와 함께, 그런 내 짐작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기사들과 시녀들이 궁을 둘러싸며 외쳤다.

“어, 어서 빨리 황제 폐하를 모셔라!”

“꺄아악!”

여기 있나 보군.

너무 친절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비켜.”

이곳에 있는 그 무엇도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서 궁 안에 도착하자, 척 봐도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한 의자에 앉은 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황제인가?”

“맞노라. 그러는 너는 누구냐?”

「버밀리온 제국의 지배자, ‘알칸 대제’를 대면하였습니다! 당신의 [명성]이 증가합니다.」

맞나 보군.

누가 게임 아니랄까 봐, 쓸데없는 부분에서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내 이름은 됐고, 짧게 용건부터 말하지. 나에게 충성을 바쳐라.”

“감히 짐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느냐.”

그런 말을 지껄이면서도 귀를 비롯한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알칸 대제의 모습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그냥 바치라는 게 아니야. 나에게 충성을 바치면, 이 대륙을 주지.”

“……뭐, 뭐라?”

당혹감과 공포, 그리고 욕망이 뒤섞인 눈동자.

그렇다면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싫으면 그냥 죽던가. 어차피 오즈 제국의 황제는 이미 나에게 충성을 바쳤다.”

“자, 잠깐!”

정확히 ‘오즈 제국’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보인 격한 반응.

“그, 그 말이 사실이냐? 카를로스…… 그가 정말로 충성을 바쳤다고?”

“아닌 것 같나?”

그와 함께, 내가 마족 왕자로서의 본신의 모습을 살며시 드러냈다.

흉악하게 자라난 뿔과 날개.

그 모습을 본 알칸 대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설마…… 신탁이 가리킨 악마가…….”

“아마 나인 것 같군.”

“어떻게 그 악마가 튜드 대륙에 직접…….”

경악한 그를 향해서 내가 살며시 말했다.

그래, 마치 악마가 속삭이듯이.

“너희의 고충을 알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이번 미지의 대륙 원정에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어, 어떻게 그 비밀을…….”

“하지만 생각해 봐라. 만약 내가 그들에게 죽는다면, 그들은 미지의 대륙의 병력을 이끌고 튜드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거다. 토착민인 너희가 살아갈 유일한 장소가 사라지는 셈이지. 지금 너희가 나에게 반기를 들어봤자, 너희에게 남은 것은 파멸뿐이다.”

「사탄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뱀의 혀를 가진 당신의 속삭임에 배움을 청합니다!」

“나에게 충성을 바쳐라. 그리하면, 너희는 다시금 고향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허, 허허허.”

한 번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 후, 알칸 대제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이유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이 숙적이라고 여겨 왔을 터인 오즈 제국의 황제가 이미 항복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아야 할 유일한 이유인 황제의 자존심이, 이미 무너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사실로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

“이제 어디로 갈 거지?”

베른의 질문에 내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오즈 제국이죠.”

「인과관계를 역전시켰습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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