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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11화 (111/164)

◈ 111화 Chapter 25: 하차 이후의 게임 속 (4)

「[공기화]가 강력하게 진행 중입니다! 등장인물, ‘하이디’의 [비중]이 감소합니다!」

「현재 비중: 1.1%」

사라진 마왕.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잊고 있던 하이디와 루의 존재.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이미 그것은 어느 상황에 대한 징조나 다름없었다. 그래,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런 뻔한 상황 말이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귀찮게 됐군.”

서쪽의 마왕을 상대하는 일은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었다. 그녀는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이 불합리한 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대부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존재였고, 이 싸움의 승자가 결국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 그녀는 디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그녀 자신의 죽음일지라도.

“어떻게 할 거냐?”

베른이 묻는 바는 간단했다.

“확인을 해야겠죠. 과연 무슨 속셈인지.”

아니, 속셈이야 뻔하긴 했다.

마왕은 디오에게 승리를 안겨 주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이건 그 목적의 첫 번째 행보에 불과했다. 예전에 나에게 했던 말도 결국에는 경고였다. 이쯤에서 멈추라는 경고. 그러나 내가 들을 리가 있겠는가.

상황이 그러했으니, 마왕이 이쯤에서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긴, 그나마 다행일지도.’

만약 마왕이 정말로 이 모든 걸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굳이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쓸 것도 없었다. 디오에게는 지금 베른에게서 훔친 성검이 있었고, 마왕은 지금 죽음조차도 불사하며 그의 ‘해피엔딩’을 바라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세계는, 이 소설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마왕은 ‘아직’ 디오의 손에 죽을 생각이 없었고, 지금의 행동도 그저 나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다.

“까탈스럽기는.”

“뭐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에 베른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으나, 이내 스스로 납득 했는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갈 건가?”

“그래야겠죠.”

어디로? 라는 뒷말은 이제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제 베른도 알만큼은 알고 있었으니까.

“한숨 자야겠어요.”

“그래.”

그렇기에 베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이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상 진실을 파고들었다가는, 스스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른다는 걸.

「미리보기 결제]를 사용하였습니다!」

「[100G]가 소요됩니다.」

* * *

「서쪽의 마왕, 키리엘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의 풍경은 얼핏 보면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공간이었으나, 이는 드래곤의 마법에 의한 환각에 불과했다. 마왕이 살며시 손을 젓자, 공간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깨져 나가며 이내 그 실체가 드러났다.」

「“방문이 제법 과격하신데.”」

「그녀를 맞이한 집주인은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루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한껏 누리고 있는 단잠을 깨운 불청객의 존재에 무척이나 불쾌해하고 있었으나, 이내 그 정체가 구면임을 확인하고는 조금은 노기를 누그린 상태였다.」

「“잘 지내는 것 같네.”」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이 인위적인 공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여자 둘이서 지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더러운 풍경. 먹다 남은 케이크 조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상 위에 놓여 있고, 둘이서 패션쇼라도 했던 건지 드레스 룸 근처에는 제멋대로 입었다 벗었다 한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말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반이 보낸 건가?”」

「루의 물음에 마왕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주 짧았고, 이내 그녀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

「“관심 뚝 끊고 까먹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났나 보네. 아무튼, 못된 꼬맹이야.”」

「못된 꼬맹이라…… 마왕은 루의 표현이 무척이나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 말처럼 아인즈 반의 외형은 꼬맹이가 맞기는 했지만, 그가 저질렀던, 그리고 저지르고 있는 행위들을 떠올리면 뭐랄까…… 단순히 못됐다는 수식어는 너무 귀염성이 넘쳤다.」

「“하이디는?”」

「“저쪽.”」

「루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침대 위에 이불을 뒤집어쓴 산 하나가 봉긋 솟아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퍼질러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 분만 더…….”」

「잠꼬대까지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쉽게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하이디의 모습을 함께 바라보던 루가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온 용건은?”」

「“아인즈 반이 너희를 찾는다.”」

「“그래? 그러면 조금 기다려. 아무래도 저 짐짝부터 일어나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러지.”」

「마왕은 급하게 굴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까지 아마추어가 아니었으니까. 루가 내온 차 한잔을 마시면서 마왕은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마치 물 흐르듯이 지나가는 이 찰나를 간직이라도 하고 싶다는 듯이.」

「“왜 그래? 곧 죽을 사람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루의 말에 마왕은 순수하게 놀랐다. 그녀는 지금껏 루에 대해서 ‘어디에나 있는 수동적이고 자주적이지 못한 흔한 히로인상’ 중 한 명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왕은 이내 그러한 자신의 시선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인즈 반이 늘 행동으로 보여 주었듯이, 보이는 것과 진실은 언제나 한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만약, 너와 반 중에서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너는 누가 죽길 바라?”」

「그래서일까,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문득 눈앞에 있는 드래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졌다. 설정대로라면 그녀는 수천 년을 살아왔을 드래곤이다. 개인의 사소한 고민이나 근심 따위는 호쾌하게 답을 내려줄지도 모른다. 왜인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어이없는 질문이네. 전제 조건 자체가 글러 먹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가 죽을 생각이야.”」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뻔한 대답. 마왕은 하마터면 그 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실망할 뻔했으나, 이내 실망감을 감추고는 물었다.」

「“왜지?”」

「“반이 나를 한 번 살렸으니까. 말하자면 목숨을 빚진 셈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죽어야지.”」

「마왕은 여전히 실망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 대답은 너무나도 뻔하고, 자기만을 위한 기만처럼 들렸다. 차라리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런 원초적인 감정이라면 납득하기라도 쉬웠을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조용히 루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 때, 루는 계속해서 말했다.」

「“늘 그랬어. 반은 늘 나를 어둠 속에서 꺼내 줬어.”」

「그래, 고작 그런 얘기겠지. 마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용히 루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죄악감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포기해 갈 때도, 네 손에 모든 동족이 죽고, 그 동족들을 인질로 신의 노예가 되었을 때도.”」

「그런 일도 있었던가. 마왕은 스스로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놀랍도록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며 내심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런 놀람조차도 이들에 대한 기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그녀는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등장인물’들을 같은 인격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직 단 한 존재만 빼놓고.」

「“사과 안 하네? 빈말로라도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듯한 루의 말에 마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안 하니까. 내가 너에게 사과하는 건 그들의 선택에 대한 기만에 불과해. 정 원한다면 빈말이라도 해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빈말은 필요 없어. 그걸로도 충분해.”」

「마왕은 왠지 루의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그녀가 보아 왔던 루의 모습은 아주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왜인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반은 늘 나를 구해 줬어. 한 번쯤은 내가 반을 위해서 죽는다고 해도, 후회할 것 같지는 않아.”」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던가. 마왕은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디오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싸늘한 고시원 한편에서,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미래에 청춘을 맞긴 채로 숨만 붙이고 살아가던 그녀였다. 우연히 본 그것은 그다지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주인공의 존재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누가 보았다면 답답하다며 호소할 정도로, 미련할 정도로 착해 빠진 그 주인공에게 그녀는 마치 자신이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

「마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가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사이, 이내 들려온 루의 말이 그녀를 감상에서 깨웠다.」

「“그건 그렇고, 거짓말은 왜 한 건데?”」

「“……눈치채고 있었나.”」

「“모를 리가 있겠어? 반이 우리를 찾아오는데 다른 사람을 보낼 리가 없잖아?”」

「무언가 대단한 독심술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저 자뻑이라니. 마왕은 자신의 속내가 이런 어이없는 자신감에 읽혔다는 사실이 우스웠으나, 어차피 물은 이미 엎질러진 뒤였다. 아니, 차라리 잘됐다.」

「“이야기가 빠르겠네. 나를 조금 도와줘야겠어.”」

「“내가 왜?”」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마왕의 목소리는 협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마치 이런 협박 따위는 그녀에게 그 어떤 동요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처럼.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루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감이 넘치네?”」

「“그건 내가 아니라 너희 같은데.”」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어떤 위협이나 힘도 내세우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힘의 차이는 명백했으니까.」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어.”」

「“유감이네. 나는 쉽게 제압할 생각인데.”」

「“하이디!”」

「루의 외침과 함께, 어느새 뿔과 날개를 드러낸 하이디가 마왕의 뒤에서 나타났다.」

「“이럴 줄 알았어!”」

「자는 건 연기였나. 마왕은 자신이 이토록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내가 말했을 텐데. 과하게 자신하고 있는 건 ‘너희’라고.”」

「마왕의 손짓 한 번에, 그녀를 향해서 달려들던 하이디와 루의 몸이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끄흐!”」

「싸움은 길지 않았다. 하이디와 루는 몇 번인가 다시 일어서서 그녀에게 달려들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마족과 드래곤이라지만, 상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륙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마왕이었다.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하이디와 루가 완전히 제압되자 마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입을 열었다.」

「“아인즈 반. 아마 너라면 지금쯤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아인즈 반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신중한 남자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정보를 얻으려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그를 지켜보았던 그녀가 내린 판단이었다.」

「“그리고 너라면 내가 너에게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겠지.”」

「마왕의 눈이 살며시 쓰러져 있는 하이디와 루를 훑었다.」

「“맞아, 나는 지금 그녀들을 인질로 너에게 협상을 요구할 거야. 네가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하이디와 루는 죽어.”」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이디와 루의 심장 위에는 아주 강력한 저주가 새겨져 있었다. 마왕이 죽어야만 풀리는, 그런 저주가.」

「“처음에는, 너에게 지금 튜드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위들을 멈추라고 하려고 했어.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너라면, 아인즈 반 너라면 내가 아무리 막아서도 결국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을 거라고. 그래서 다른 결론을 내렸어.”」

「마왕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아마 궁금하겠지? 내가 왜 지금 같은 절호의 기회에 디오에게 죽으러 가지 않았는지.”」

「지금뿐만이 아니라, 몇 번이고 그녀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주인공인 용사 디오의 손에 죽을 기회가.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용사 디오의 ‘해피엔딩’ 속에는 옛 연인을 제 손으로 죽이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마왕은 말했다.」

「“내 요구 조건은 간단해.”」

「주인공에게 누구보다도 완벽한 ‘해피엔딩’을 안겨 주기 위해서.」

「“나를 죽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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