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Chapter 26: 레이드 (2)
불어온 것은 여전히 끈적하고, 불쾌한 바닷바람이었다.
“굳이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건가?”
비록 입으로는 불만을 쏟아냈지만, 지금 베른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껏 차려입은 선장님 그 자체였다. 굳이 입으로 말은 안 했지만, 나름대로 기대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부 독자가 말과 행동이 다른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모습에 인간미를 느낍니다!」
「[진주인공]을 지지하는 한 독자가 베른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그를 응원합니다!」
이 정도면 거의 광신도 수준.
뭐, 베른의 지지율이 올라가서 나에게 크게 나쁠 건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그다지 상관없는 사안이긴 했다.
“방심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내 말에 베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한번 진행되었던 현실이 한낱 꿈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마왕에게 보여 주었다.
즉, 마왕 역시도 내가 빈틈을 보인다면 모종의 방법을 통해서 현실을 짓뭉갤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개연성 무시]를 이용해서 대륙을 건너간들, 마왕이 그 자체를 근거 삼아서 ‘꿈’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굳이 귀찮게 배를 타고 이동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곧 도착이군.”
망원경을 바라보던 베른의 말과 함께, 어느새 지평선 너머에서 우리들의 고향 땅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였다.
“어?”
“왜 그래?”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울렁거림.
이대로 무사히 도착하면 좋았을 테지만, 이변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갑작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변인 법이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지평선 너머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빛의 기둥.
그렇게 솟구친 기둥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보이는 것만 해도 최소한 수십 개.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점은 그다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 현상은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히든 피스]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그와 함께, 하늘을 향해서 치솟은 빛의 기둥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빛의 기둥의 정체가 바로 [주인공]이 연 [통로]임을 추측합니다!」
통로.
지금껏 내가 있었던 세계인 [미지의 대륙]과 플레이어들의 세계인 [튜드 대륙]을 잇는 것.
결국 그것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연다고?’
이건 예상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제아무리 디오가 전면에 나서서 플레이어들을 키우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이곳을 그저 게임으로 여기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그들에게도 엄연히 바깥의 생활이 있을 것이고, 설령 그들이 인생이라고는 게임밖에 없는 게임 폐인이라고 한들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생리적 현상을 해결해야만 한다.
즉, 지금 시점에서 [통로]가 열리기에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로는 열리려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이미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디오가 내가 [미리보기]를 통해서 지켜볼 것까지 예상해서 거짓 정보를 흘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아무리 디오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까지 영악한 수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나나 마왕이나 할 법한 짓이었지, [주인공]이 할 만한 짓은 아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한다.’
통제되지 않는 변수만큼 성가신 것은 없었으니까.
“베른.”
“뱃놀이는 여기까지인가?”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됐어. 즐길 만큼 즐겼어.”
베른이 가볍게 동의하자,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내 발밑 그림자 속이 꿀렁이며 아자토스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끼잇!]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서둘러야 한다는 내 마음을 읽었던 모양이었다.
「소수의 독자가 한 독자가 주인의 마음을 아는 반려동물의 모습에 감동합니다!」
“가자.”
* * *
오랜만에 밟은 ‘고향 땅’의 느낌은 별로 색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어딘가 엉성했고, 여전히 어딘가 [설정]이 덜 짜인 듯이 삐거덕댔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우선, 빛의 기둥의 근원지로 가죠.”
“그러니까 어느 빛의 기둥으로 갈 거냐고.”
베른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끝도 없이 하늘을 향해서 뻗은 저 빛의 기둥들의 숫자가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려 봐요.”
“언제는 시간이 없다더니?”
이쯤이면 슬슬 답답해하는 놈들이 나올 때가 됐는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한 독자가 내비게이션을 자처하며 그쪽에서 왼쪽 길로 꺾으라며 안내를 시작합니다!」
그럼 그렇지.
“따라오시죠.”
“……뭔가 이상한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시죠.”
「내비게이션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사거리에서 우회전으로 꺾으라며 방향을 지시합니다!」
……이거 참, 편하구만.
아닌 게 아니라, 편하기는 진짜 오지게 편했다.
「훈수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그쪽에서는 오른쪽으로 빠지는 것이 더 빠르지 않냐며 길 안내에 끼어듭니다!」
「내비게이션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며 당신을 독려합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생긴 내비게이션 덕에 비교적 빠르게 도착한 곳은 어느 음침한 동굴이었다.
“어떻게 도착하기는 한 것 같군.”
“서두르죠.”
내가 그렇게 발을 디디려던 순간.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익숙한 울렁거림.
그와 함께 들려온 것은 베른의 거친 목소리였다.
“피해!”
쐐애애액-!
순간적으로 바람을 가르고 날아든 화살.
제법 괜찮은 기습이었으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자연스럽게 손에 잡힌 화살을 부러뜨리며 말했다.
“내가 왜요?”
「일부 독자가 당신의 [먼치킨]스러운 발언을 지지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군.”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지은 베른의 모습.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에게 보호받던 시간이 길긴 길었다.
“이만 나오지.”
내가 동굴 안쪽을 향해서 말하자, 그제야 그곳에서 껄렁하게 생긴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왔네.”
플레이어?
아니, 그보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체다?”
“허어…… 내 닉네임은 또 어떻게? 하긴…… 이 상황 속에서 놀랄 일이 뭐가 더 있겠어.”
기억났다.
눈앞에 느끼하게 생긴 저 남자는 디오가 데리고 빠져나갔던 세 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제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이제 그의 공격이 베른마저도 놀라게 할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점이었다.
“제법 흥미롭기는 하지만, 일단 난 너한테 관심 없어. 디오는 어디에 있지?”
체다가 웃었다.
“네 뒤에.”
쩌저적-.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갈라진 공간에서 익숙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손에 들린 것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성검 다이베른.
모든 마를 멸하는 빛이 나를 향해서 거침없이 쇄도했다.
“반!”
그와 거의 동시에 들려온 베른의 외침.
“걱정 마요. 멀쩡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금 놀랐다.
마치 준비된 듯한 기습.
아니, 이 경우에는 치밀하게 함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거기다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타이밍까지.
그제야 내비 독자 놈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굴었는지 이해가 갔다.
‘빨리 가서 당해 주라 이거지.’
아무튼, 꼴에 주인공이라고 편애하기는.
내가 성검의 빛무리를 털어낸 후, 어느새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디오를 바라보았다.
생김새 자체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것은 그가 예전보다도 훨씬 더 강해졌다는 점이었다.
“환영이 제법 성대한데?”
“이미 늦었다. 아인즈 반. 네가 졌어.”
다짜고짜 승리 선언이라니.
제법 강해졌다 싶더니만 디오치고는 제법 뻔뻔해지지 않았는가.
“누구 마음대로?”
“통로는 이미 열렸다.”
“나도 봐서 알아. 그래서?”
새삼스럽지만, 튜드 대륙은 이미 내가 뿌려 놓은 분란의 씨앗으로 인한 토착민과 플레이어들 간의 갈등으로 전란에 휩싸인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 통로 정도가 열렸다고 해서 당장 나에게 크게 불리해질 건 없었다.
“아직 이해를 못 하고 있군.”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르면 물어보면 그만이다.
“내가 뭘 모르는데?”
「다수의 독자가 뻔뻔한 당신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말 같지도 않은 당신의 질문에 코웃음을 칩니다!」
디오가 조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또 같잖은 말장난으로 내 속내를 읽을 셈인가?”
“왜, 쫄리냐?”
“아니, 우스워.”
그와 함께 더욱 짙어진 조소.
그러나 녀석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그래? 어쨌거나 덕분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아니, 내가 이렇게 열렬하게 궁금해하면, 친절한 누군가가 알려줄까 해서.”
“웃기지도 않은 소리.”
그래, 분명히 웃기지도 않은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섯 명이 모이면 한 명은 반드시 쓰레기가 있다는 누군가의 명언도 있듯이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삐딱한 성격을 가진 자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지금처럼.
「스포일러 빌런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미리보기]를 통해서 본 디오가 간직한 비밀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발설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고, 고마워라.
「대다수의 독자가 의도치 않았던 스포일러에 억지로 눈을 감으며 맹렬한 비난을 쏟아냅니다!」
「대다수 독자의 맹렬한 비난을 받음에 따라, ‘스포일러 빌런’의 등급이 [네임드]로 승격됩니다!」
「‘스포일러 빌런’의 등급이 [네임드]로 승격됨에 따라, ‘스포일러 빌런’의 명칭이 ‘스포충’으로 변경됩니다!」
“이제 알겠군.”
스포일러 빌런…… 아니, 스포충이 한 스포일러는 간단했다.
내가 아자토스를 이용해서 잠들어 있었던 시간. 비밀은 바로 그 시간 속에 있었다.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내가 잠들어 있었던 시간이 마치 겨울잠이라도 잔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사실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작가]의 개입.
요즘 뜸하다 싶더니만, 아무래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한들, 무엇이 변하지?”
“그럴지도.”
디오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비록 튜드 대륙의 상황은 알지 못했으나, 디오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전세가 플레이어 쪽이 우세하거나 어쩌면 전쟁 자체가 이미 끝났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통로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결국 내가 처음에 염려했던 일이 이뤄졌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부터는 내 입장이 철저하게 사냥당하는 쪽이 되었다는 말.
비참하다면 비참한 입장이었지만, 디오 녀석이 아직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너를 패 줄 수는 있지.”
“……뭐?”
그런 말이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좀 맞자.”
괜히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