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Chapter 28: 동쪽의 주인 (1)
한때는 용사의 동료였던, 그리고 이제는 마왕으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키리엘은 걸었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거창한 목적이 있는 여정도 아니었다.
그저, 걷고 싶었을 뿐.
그리고 그녀는 이런 자신의 의미 없는 여정이 누군가의 시선을 끌기를 바랐다. 그 영악한 자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속아 넘어가 준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디오에게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그녀의 여정을 모두가 응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독자가 아무런 이정표도 없는 당신의 여행에 의문을 표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이상행동에 작은 관심을 표합니다!」
시끄러워.
키리엘은 누구도 보지 못하게 작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걸었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어차피 이제 막 제국의 국경을 넘어서 동쪽 대륙으로 발을 디딘 참이었다.
동쪽 대륙.
어떤 이들은 이 땅을 야만족의 땅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들은 낭만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그저, 환상과 설정 사이에서 존재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래, 말하자면 동쪽 대륙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이나 다름없었다.
「설명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맥거핀]이란, 이야기에 동기를 부여하지만,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장치를 말한다며 해당 용어에 대한 부연 설명을 보탭니다!」
……쓸데없이 친절하긴.
키리엘은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어느덧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지대를 바라보았다.
[설정]대로라면 저 광활한 사막지대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동쪽 대륙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정] 상에나 존재하는 사실이었고, 진실은 달랐다.
저 너머는 존재하지 않아.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동쪽 대륙’이라는 장소는 이 이야기 속에 필요한 장소가 아니었다. 용사의 모험담은 서쪽에 있는 마왕을 무찌르는 것이었지, 동쪽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영토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동쪽 대륙’이라는 장소의 의의란 그저 세계관에 필요한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혹은 세계관의 광활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흔한 [설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이곳까지 오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재미있네.”
그녀는 웃었다.
빅뱅 이론에 의하면, 지금도 우주는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바로 그 이론을 떠올리게 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럴 때마다 이곳을 이루는 세계가 새로이 창조되고, 또 뻗어나갔다.
마치 빅뱅으로 인해서 퍼져 나가는 우주의 입자처럼.
「[장르]가 요동칩니다!」
「최초의 여정으로, [세계관]이 확장됩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걸었다.
눈앞에 있는 광경은 여전히 미지 그 자체였다. 존재하지 않았던 장소들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태어난 적도 없었던 생명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생명력을 과시했다.
「일부 독자가 혼돈에 빠진 ‘서쪽 대륙’과는 달리 생명력이 넘치는 ‘동쪽 대륙’의 모습에 힐링을 표합니다!」
힐링이라…….
키리엘은 곧 자신이 저지를 일을 떠올리면서 저 표현이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쓴웃음을 짓던 그녀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를 잊고 있었다.
“음…… 곤란한데.”
그녀는 자신이 하려는 일에는 그럴듯한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당한 상대가 없으려나?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제 막 사막을 벗어난 장소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긴.”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적당한 대화 상대가 없다면, 만들어 내면 될 일이었다.
“이만 나오지?”
「눈치채고 있었나.」
“…….”
갑작스럽게 눈앞에 새겨진 메시지에 그녀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냥 지나가던 엑스트라나 불러보려고 한 말이었건만, 설마 진짜로 지켜보고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저 근본 없는 관음증 환자에 대해서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으나,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섣부르게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무슨 볼일이야?”
얼핏 들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으나, 그녀는 내심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대화하는 상대는 비록 답이 없는 관음증 환자였지만 이 세계의 창조주이기도 했다.
작가.
그자였다.
「제안할 것이 있다.」
“나한테? 뭔진 몰라도 싫은데?”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날카로운 목소리.
비록 ‘누구’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도 눈앞에 있는 ‘자칭 창조주’에게 악감정이라면 차일 정도로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그 악감정이 ‘누구’보다 나은 것은 그저 [주인공]인 디오를 만들어 낸 창조주라는 점이 참작되었을 뿐이었다.
「들어봐서 나쁠 것은 없을 거다.」
“아, 글쎄 싫다니까.”
「아인즈 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누구’의 이름에, 키리엘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녀석의 폭주를 막고 싶지 않은가?」
막고 싶어. 녀석은 너무 위험해.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을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는 없었다.
「내 손을 잡아라.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힘을 주겠다. 그건 나에게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그녀가 코웃음 쳤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쟁취할 거야. 너 따위의 도움이 아니라.”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그녀의 앞에 다가온 손길은, 척 보기에도 다 썩어서 잡는 순간 끊어져 버릴 동아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미 한번 이용했잖아?”
그렇게 말한 그녀의 눈이 눈앞의 메시지를 차갑게 훑었다. 살짝 경멸이 섞여 있는 시선이었다.
「알고 있었나?」
“자고 일어났더니 계절이 바뀌어 있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니까.”
아인즈 반의 영악함에 의해서 그녀의 함정이 수포로 돌아간 후, 꿈에서 깨어난 그녀가 본 것은 어느새 훌쩍 흘러가 버린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사태를 파악한 그녀는 눈앞에 있는 ‘자칭 창조주’가 자신을 이용해서 움직였음을 깨달았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의도한 바와 비슷한 결과가 나오긴 했다지만,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용하는 쪽이 취향이었지, 이용당하는 쪽은 영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용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긴.」
“내가 또다시 멍청하게 이용당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거부감을 가지는 건지 모르겠군. 어차피 너와 나의 목적은 같지 않나?」
“틀려.”
그녀는 저 착각에 대해서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녀가 바라는 것은 결코 작가와 같지 않았다. 작가는 이 세계의 온전한 ‘완결’을 바랄 테지만, 그녀는 오직 디오의 ‘해피엔딩’만을 바란다.
그 두 가지는 무척이나 유사하면서도, 결국 다른 것이었다.
「그런가, 알겠다.」
예상보다도 순순히 물러나는 그 모습에,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벙쪘다.
저렇게 쉽게 물러난다고?
그렇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꼭 자신이 아니라도 이미 대체재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너…… 내가 ‘몇 번째’지?”
과연 저 ‘자칭 창조주’가, 이런 식의 접근을 자신에게만 했을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
「딱히 대답해 줄 의무는 없을 텐데.」
모호한 대답이었으나,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서는 별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러면 이만 꺼져.”
「그러지.」
눈앞의 메시지가 사라지자,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독자들의 원성이 들려왔다.
「다수의 독자가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당신의 모습에 의문을 표합니다!」
「정신과 의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병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며, 정신과 상담을 권고합니다!」
「등장인물, ‘서쪽의 마왕’의 [자폐] 성향이 증가합니다!」
……썩을 놈들.
어차피 혼잣말 캐릭터로 잡힌 이상 그녀도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은, 스스로 쟁취할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그거 알아? 동쪽에는 악마들이 살고 있다는 걸.”
「다수의 독자가 뜬금없이 혼잣말을 이어 가는 당신의 모습에 깊은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설정]을 중시하는 극소수의 독자만이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 악마들은 말이야. 찢어진 눈과 들창코,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야만적인 습성을 가졌어.”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을 토대로 ‘악마’의 정체를 추측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처럼 나타나서, 나타난 자리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약탈하고, 파괴하고는 사라져.”
「일부 독자가 당신이 말하는 [설정]에 대해서 작은 흥미를 표합니다!」
“그리고 마치 바퀴벌레처럼 번식하며.”
「역사학과 학부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예로부터 쌀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인구수가 많았다며, ‘악마’의 정체를 추측합니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그녀의 입가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사악한 용을 숭배하고, 또 그 사악한 용의 수호를 받아.”
「[설정]을 중시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을 토대로 과거에 거대 제국을 건설했던 ‘기마민족’을 떠올립니다!」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거의 다 왔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춘다면, 그녀가 ‘만들어 낸’ 것들은 비록 야만적일지라도, 그저 동쪽에 사는 인간에 불과해진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공포를 형상화 시킨 것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야.”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나 설화에는 그 근간이 되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옛 민담 속에서나 등장하는 ‘이 종족’은 과거에 존재했던 훈족이나 몽골인, 혹은 아랍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심이 형상화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했다.
그 공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말끝마다 취익- 소리를 붙여.”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이 말한 ‘악마’의 정체를 ‘오크’라 추측합니다!」
「어긋나 있던 [개연성]이 회복됩니다!」
「[설정]이 요동칩니다!」
「동쪽 대륙의 지배 종족, [오크]가 등장합니다!」
이제 첫 발자국이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오크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너희의 주인에게 안내해라.”
그녀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모든 것은,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