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Chapter 28: 동쪽의 주인 (3)
마침내 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뀐 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베른의 짧은 탄식과 함께, 수많은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등장인물, ‘서쪽의 마왕’이 [최종보스] 자격을 완전히 상실하여,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29.9%」
「새로운 [최종보스]가 등장합니다!」
「동쪽의 주인, ‘디룽 칸’이 새로운 [최종보스]로 등극합니다!」
‘동쪽의 주인’의 등장.
지금 일어난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마왕의 [최종보스] 자격 박탈.
굳이 따지자면 충분히 예상했던 사태였으나, 한편으로는 일어나지 말았으면 했던 일이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그녀가 어째서 저런 일을 벌였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지독할 정도의 자기모순.
그녀는 디오의 행복을 바라지만, 디오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마왕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멍청할 정도로 순진해 빠진 디오에게 있어서 연인의 죽음을 딛고서 행복을 누릴 만큼의 뻔뻔함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왕이었기에, 그녀는 결국 직접 만들어 내고야 만 것이다.
자신을 대신해서 희생할 대상을.
“저…… 나 왔는데?”
「일부 독자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루’의 존재에 화들짝 놀랍니다!」
「등장인물, ‘블랙 드래곤 루’의 [공기] 속성이 강하게 요동칩니다!」
그제야 자신의 존재를 알린 루의 말에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하이디는?”
“하이디는…… 조금 피곤하다고 해서. 요즘 들어서 잠을 설쳤거든.”
“그래?”
루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그대로 이 소설이 [완결]이 날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출발할 준비해.”
“출발한다니? 어디로?”
“동쪽 대륙.”
“……동쪽이라고?”
그와 함께 살짝 굳은 루의 표정.
“그곳은…… 왜?”
“볼일이 있어. 무척이나 급한 일이야.”
내 다급함을 느꼈는지, 루가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루’의 이상한 반응에 주목합니다!」
분명히, 루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지금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가자.”
* * *
거대한 도시조차도 개미처럼 보일 정도로 드높은 창공 위. 우리는 바로 그 창공 위를 루의 등에 탄 상태로 날고 있었다.
그것도 어딘가 어색한 상태로.
“……이상한 일이군.”
이 기묘한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른이었다. 유난히 찌푸려진 그 표정은 아무래도 루의 등 위에서 느껴지는 칼바람 때문은 아닌 듯했다.
“분명히 동쪽에 오크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거지?”
「다수의 독자가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매의 눈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베른’의 발언에 [개연성] 오류 의혹을 제기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그때였다.
[……아마 결계 때문일 거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타고 있는 루였다.
「[개연성]이 안정화됩니다!」
그제야 자신이 깔고 앉은 자리를 향해서 시선을 옮긴 베른이 물었다.
“결계라니?”
[가지고 있는 인식 자체를 바꿔 버리는 주술이지. 혹시 학살 도끼 테무르라는 자를 알고 있나? 제국에서 상당한 명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명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학살 도끼 테무르’는 과거 제국의 세 손가락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의 영웅이었지만, 일전에 ‘아인즈 반’에게 이용당해서 ‘용사 디오’와의 전투 중에 살해당한 비운의 영웅이라며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을 덧댑니다!」
베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싸웠었다. 조금 흉포하긴 했지만, 꽤 훌륭한 사내였지. 결국 디오에게 당하긴 했지만…….”
옛 생각이 났는지, 베른이 말끝을 흐리고는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내 루가 뱉은 말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 말은…… 그자가 오크였다는 건가?”
[맞다.]
「다수의 독자가 ‘루’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설명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학살 도끼 테무르’에게는 ‘동쪽의 야만족’이라는 이명이 있다며,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을 덧댑니다!」
충격적인 말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덤덤한 루의 목소리에 베른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군. 나도 그렇지만, 디오 역시도 용사다. 지금 네 말은 그자가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용사의 눈을 피했다는 이야기인가?”
[정확히는, 칸의 주술이 그렇게 했다고 봐야겠지.]
베른이 표정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칸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가?”
「일부 독자가 ‘베른’의 발언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프로불편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근본도 없이 난데없이 출현한 새로운 [최종보스]의 등장에 불편함을 표합니다!」
「소수의 독자가 프로불편러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난장판이 난 상태였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덤덤히 대화를 이어 갔다.
[지배자.]
“요컨대, 왕이라는 건가?”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 구조적 지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種)으로서의 근본을 지배하는 지배자. 동쪽의 주인, ‘디룽 칸’은 그런 존재다.]
「소수의 독자가 마침내 등장한 ‘칸’의 이름에 주목합니다!」
「설정을 중시하는 한 독자가 이어지는 ‘디룽 칸’의 설정에 주목합니다!」
베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제법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까는 인식을 막는 주술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용사조차도 당하는 주술인데, 너는 어떻게 무사한 거지?”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합니다!」
[그건…….]
루가 천천히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구름과 함께, 지금껏 가려져 있던 동쪽 대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지의 대륙(동부)]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동쪽의 주인, ‘디룽 칸’의 영토에 무단으로 침입하였습니다! 그의 충성스러운 하수인들이 당신을 적대할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사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건만, 참으로 게임 같은 안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다.
[……도착한 것 같군.]
「매의 눈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상황을 타고 은근슬쩍 위기를 넘기는 ‘루’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그제야 날갯짓을 멈춘 루의 몸이 지상을 향해서 뻗어 가자, 하늘 위에서 바라보았던 동쪽 대륙의 모습이 점차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다 못해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루의 몸이 순식간에 지상에 도착했다.
그렇게 우리가 지상에 도착했을 때,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우리를 반기는 이들이 있었다.
“……오자마자 환영식이 거칠군.”
베른의 말처럼, 어느새 우리를 둘러싼 수천 마리의 오크들이 완전히 무장한 채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취익!”
“췩! 췩!”
나름대로 위기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건만, 이런 상황에서도 베른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한 채로 그저 나지막하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아까부터 말이 없어? 너답지 않게.”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베른’의 발언에 동의합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무슨 생각?”
“말해야 하나요?”
“하기 싫으면 말던가.”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쿨함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인싸] 성향이 증가합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던 거지? 칸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칸이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그건 그자의 개인적인 능력이 대단한 것이지 그의 하수인에 불과한 오크들이 이렇게까지 체계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이만 나오지?”
내가 살며시 말하자, 진형을 잡고서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오크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들썩였다. 진영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자, 또 이미 예상했던 얼굴이었다.
“아인즈 반.”
서쪽의 마왕, 키리엘.
이제는 [최종보스]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린 그녀의 모습은 이제 예전에 보았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어딘가 약해지고, 수척해 보이는 모습.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단 보이는 외견일 뿐이었고 내 입장에서는 그저 크게 엿을 먹인 장본인에 불과했다.
내가 말했다.
“꽤 재미있는 짓을 했던데?”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꽤…… 후회 중이야.”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가볍게만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지. 나도, 너도.”
「일부 독자가 당신과 ‘마왕’의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대화에 주목합니다!」
그와 함께,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달싹였다.
“이만 돌아가.”
“내가 왜?”
“네 능력은 인정해. 하지만 이번만큼은 불가능해.”
“딱히 싸우러 온 건 아닌데?”
사실이었다.
어차피 내 입장에서는, 새롭게 [최종보스]가 된 ‘디룽 칸’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저, 그를 내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어느 정도의 통제하에 두고 싶을 뿐이었다.
“……네가 싸우지 않으려 해도, 그는 너를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는 ‘바깥’에서 찾아온 존재인 너에 대해서 아주 큰 흥미를 갖고 있거든.”
「다수의 독자가 ‘서쪽의 마왕’의 기묘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파워 밸런스를 중시하는 한 독자가 [먼치킨]인 당신조차도 위협하는 새로운 강적의 등장에 호기심을 표합니다!」
그나저나…… 루는 그렇다고 치고, 나와 같은 ‘하차자’인 서쪽의 마왕까지 저런 반응이라니?
알면 알아갈수록 ‘디룽 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내가 무엇인가 상당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뭘 만든 거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완전히 버리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디룽 칸’이라는 자가 지금 눈앞에 있는 ‘서쪽의 마왕’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사악한 존재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야만, 그녀가 온전히 [최종보스]로서의 역할을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새롭게 출현한 거악의 존재.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거 알아?”
「대다수의 독자가 언제고 몇 번인가 반복되었던 상황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미리 당신의 발언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습니다!」
이제는 내가 입만 열어도 저런 걸 보면 어지간히도 원 패턴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원 패턴이라도 좋으니.
“루는, ‘디룽 칸’의 외동딸이야.”
일단 한번, 던져 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