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Chapter 28: 동쪽의 주인 (4)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에 대한 대답이 들려오기까지는 일말의 시간조차도 필요하지 않았다.
“개소리.”
그러면 그렇지.
혹시나 해서 던져 봤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다수의 독자가 충격적인 당신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마왕’의 모습에 카리스마를 느낍니다!」
「옛 [최종보스]를 지지했던 일부 독자들이 그녀의 모습에 걸크러쉬를 외칩니다!」
「완벽한 논리에 의해서 논파 당하셨습니다! [개연성]이 요동치지 않습니다!」
저 짧은 말 한마디에 얼마나 대단한 논리가 숨어 있는지 절로 궁금증이 솟구칠 정도였지만, 굳이 따지기에는 어차피 처음부터 그다지 기대하고 했던 말도 아니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나는 그에 대한 부정보다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님 말고.”
「방구석 심리학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뇌 내 필터링 없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당신의 모습에 [뇌절]을 의심합니다!」
방구석 심리학자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왕이 코웃음 쳤다.
“설마 나한테 그딴 어설픈 수작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테지?”
“조금은?”
물어보길래 솔직하게 대답해 준 것뿐이건만 마왕의 표정이 어째 언짢아 보였다.
뭐, 그러라고 한 말이기는 했지만.
“……너라는 놈은.”
「다수의 독자가 한마디의 말조차도 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에 유쾌함을 표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냉소주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쿨병] 속성이 요동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애써 자기 페이스를 찾고자 했는지, 마왕이 말했다.
“흥……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디룽 칸은 드래곤 따위는 동족으로조차도 여기지 않아.”
“그래? 그리고 또?”
“그야…….”
「[말 많은 악당]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지금 자신이 어떤 [클리셰]에 따르려고 했는지 눈치챈 마왕이 표정을 찌푸렸다.
“……네가 스스로 알아내.”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29.91%」
“아쉽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과 ‘마왕’ 사이에 오가는 기묘한 신경전에 주목합니다!」
「방구석 판정단을 자처하는 일부 독자들이 일단 [1라운드]는 당신이 승리하였음을 선언합니다!」
「[방구석배 토론배틀]에서 [1회] 승리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16.9%」
마왕과 조금 말을 섞은 것만으로도 쏟아지는 이득.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여기서 죽치며 노가리나 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곳에서 멍청하게 시간을 끄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었다.
“말장난은 이쯤 하고, 이만 비켜 주겠어?”
“지금까지 도대체 뭘 들은 거지? 조금 전까지 내가 입이 아프도록 말하지 않았나? ‘디룽 칸’을 만날 생각이라면 그만둬.”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비켜서지 않는 것도 내 판단이야.”
「일부 독자가 ‘마왕’의 뚝심 있는 모습을 지지합니다!」
「등장인물, ‘서쪽의 마왕’의 [단호박] 성향이 증가합니다!」
아무래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는 모양.
그렇다면 이쪽도 무력 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야기를 원론적으로 바꿔서 말할게. 지금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먼치킨]스러운 발언에 흡족해합니다!」
“너야말로 우습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 그녀의 전신에서 붉은빛의 아우라가 감돌기 시작했다. 본래 그녀가 사용하던 마왕의 힘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디룽 칸에 대해서.”
“……흥미로운데.”
“다행이네. 마침 질릴 틈은 없을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그녀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그 공격 목표는 내가 아닌, 내 뒤쪽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일행들이었다.
콰카카카캉!
예고 없는 그녀의 선공에, 멀찍이서 오크들과 대치하고 있던 베른이 신경질적으로 고함쳤다.
“망할!”
마왕의 공격을 신호탄으로, 군세를 이루고 있던 오크들이 거침없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취익! 다 죽여라!”
“칸의 이름으로! 췩!”
루와 베른이 오크들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동안, 붉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마왕이 내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 상황을 쉽게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면모를 보이셨습니다! 등장인물, ‘서쪽의 마왕’에게 [냉정] 속성이 추가됩니다!」
내가 가볍게 수긍했다.
“그래 보여.”
가볍게 대답했지만, 결코 빈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이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 그다지 유리할 것이 없는 전장이었다.
“너도 그렇고, 오크들도 그렇고…… 역시 디룽 칸이라는 작자가 꽤 대단하긴 한가 봐?”
지금 내 앞에 있는 마왕의 힘은 예전과 비교해도 몇 배는 강력해져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랬다.
“다시 한번 말하지. 지금은 물러나라. 아인즈 반.”
내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싫은데?”
「[먼치킨]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먼치킨] 버프의 효과로, 선제공격 시 공격력이 [50%] 증가합니다!」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나를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야.”
“지금이 그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라니까.”
어차피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 없었다.
문답무용.
[먼치킨] 버프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 내 공격이 요동쳤다.
내가 말했다.
“그거 알아?”
「다수의 독자가 이제 원 패턴을 넘어서 유일한 패턴으로 가 버린 당신의 발언에 식상함을 표합니다!」
“또 그 패턴이라면,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말해 두고 싶은데.”
“그 얘기가 아닌데? 아무래도 네가 이곳이 어디인지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야…….”
그와 함께, 그녀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이다.
“너……!”
으레 그렇듯이, 사람은 어느 한쪽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당연하게도 다른 한쪽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래, 마치 이곳을 철저하게 [소설 속]으로 알고 있는 그녀처럼 말이다.
결과론적으로 따지자면 옳은 관점이었으나, 그에 대해서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미 늦었어.”
그와 함께 내 오른손에서 푸른빛이 작렬했다.
참으로 [게임]스러운 연출이었다.
「마족 고유 스킬, [마력 방출]이 발동합니다!」
* * *
「튜드 대륙. 이제는 전란에 휩싸여 버린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한 사내가 한 플레이어를 무참히 도륙하고는 중얼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군.”」
「피바람이 부는 전장에서 하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장은 이미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그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용사 디오였다.」
「“이 싸움도 거의 다 끝났군요.”」
「얼굴은 익숙하지만 이름은 모르는 그런 플레이어 한 명이 어느새 디오의 곁에서 그렇게 말하자, 디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나도 덤덤한 그 반응에 말을 건 플레이어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를 모르시는 건 아니죠?”」
「“…….”」
「“오, 맙소사…… 제가 옆에서 함께 싸운 지도 어느덧 1년 가까이 지났는데…….”」
「물론, 디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전장을 오가며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를 베고, 또 베었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용사의 동료] 역시도 바뀌었고, 어느덧 그는 주변의 사소한 변화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미안하군.”」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디오의 입장에서였고,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보면 무려 1년 가까이 죽을힘을 다해서 디오를 도왔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조차도 기억해 주지 않은 상황이었다.」
「“됐어요. 지금부터라도 기억하면 되죠. 제 닉네임은 ‘멘솔’입니다.”」
「“이제부터 기억하지.”」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네요.”」
「약간의 원한이 섞인 빈정거림이었으나, 디오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가볍게 피식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디오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의문이었다. 아인즈 반.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언제나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방해하고, 괴롭히는 고약한 존재. 그러나 최근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자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그 덕분에 [용사의 동료]와 [마족의 회유]로 나누어져 있던 플레이어들 사이에 있던 세력전은 어느새인가 마무리 단계로 돌입하게 되었다. 디오의 적극적인 참전 덕분이었다.」
「이제 [마족의 회유] 측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이 전쟁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고, 남은 일은 ‘아인즈 반’을 사냥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아인즈 반’이, 방해는커녕 꽁무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 지금 디오와 플레이어들이 처한 상황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찾았다고?”」
「생각에 잠겨 있던 디오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멘솔의 목소리였다. 그는 길드 채팅으로 무언가 정보를 얻었는지, 이내 상기된 표정을 지은 채로 디오에게 달려갔다.」
「“미지의 대륙, 그곳에서 마족 왕자의 자취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역시 있었군.”」
「계속된 ‘아인즈 반’의 침묵에, 디오는 왜인지 모르게 그가 혹시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으나, 포기하지 않고서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원정대를 소집한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 보겠습니다.”」
「비록 디오의 앞에서는 비교적 작은 모습을 보였으나, 멘솔 역시도 7대 명문 길드 중 하나인 ‘금연구역’의 길드장이었다. 그의 영향력이라면, 원정대에 속할 플레이어들을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멘솔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디오는 조용히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인즈 반.’」
「디오가 비참한 패배를 한 후 벌써 1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끊임없이 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했고, 또 강해졌다. 과거의 자신과는 비교조차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강해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디오는 어느새 [포탈]과 [순간이동] 스킬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는 수많은 플레이어를 바라보았다. 강해진 것은, 저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들이 가진 힘은, 제아무리 미지의 대륙이라고 할지라도 가볍게 여길 수준이 아니었다.」
「“출발한다.”」
「디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 게임의 끝을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