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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23화 (123/164)

◈ 123화 Chapter 28: 동쪽의 주인 (5)

싸움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것도 너무나도 일방적인 결과로.

「다수의 독자가 ‘디룽 칸’의 비호를 받아 더욱 강력해진 ‘서쪽의 마왕’을 일격에 침묵시킨 당신의 강함에 환호합니다!」

「[먼치킨] 클리셰가 강하게 발동 중입니다!」

“끄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 나간 오크 떼들은 둘째 치고, 무려 [스킬]을 사용한 내 공격에 에누리 없이 맞은 마왕의 모습은 말 그대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옆구리는 흉하게 찢어져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왼팔과 오른쪽 다리는 기묘하게 꺾여서 제대로 일어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만약 보통 인간이었다면 시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중상.

그러나 그녀는 마왕이었고, 고작 이 정도로는 그녀의 생명을 끊기에는 모자랐다.

내가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당장은 그럴 수도 없겠지만, 이 이상 나를 막아설 생각은 하지 마. 더 이상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알 수 없는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이 흘린 기묘한 떡밥에 [3번째 단서]라는 주석을 달아놓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은근슬쩍 거슬리던 그녀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성검이나 용사의 힘 같은 자질구레한 이유 따위가 아니라, 그저 그녀를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왕을 죽였다가는, 이 세계의 작가 놈이 그토록 원하는 [완결]이 찾아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는 [최종보스]라는 가장 강력한 자신의 역할을 버렸고, 이제는 말 그대로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다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 그 무엇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여 보지 그래?”

마왕이 그렇게 씹어 삼키듯이 말하자,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도발은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으득-.

으드득-.

“끄하악!”

「다수의 독자가 이미 저항 불능이 된 상대에게 일말의 자비도 없는 당신의 행동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악] 성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에게 [소시오패스] 속성이 추가됩니다!」

물론, 내가 정말로 당장 그녀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디오와의 관계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토록 잔학하게 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종의 경고.

더 이상 나를 방해했다가는, 이 이상의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아인즈…… 반. 카, 칸은…….”

그 말을 끝으로 애써 버티던 마왕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제아무리 ‘디룽 칸’의 비호를 받아서 더욱 강해진 힘을 손에 넣었다지만, 그 힘이 [최종보스]라는 역할에 주어진 버프와 혜택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는 약해졌고, 그렇기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마왕’이 쓰러지기 전에 하려던 말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물론, 나도 그 말이 조금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굳이 들어서 어떤 ‘사실’을 기정사실화 시킬 필요는 없었기에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확정되지 않은 ‘사실’은 언제나 바꿀 수 있는 미래와도 같았으니까.

“끝난 건가?”

그렇게 말하며 모습을 드러낸 베른의 거대 쟁기의 날 끝에는 오크 몇 마리가 흉하게 매달려 있었다.

“대장장이 한스가 보면 화내겠네요.”

“괜찮아. 가끔은 이런 특별한 비료도 필요한 법이지.”

「주말농장 농사 2년 차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전대 용사 베른’의 엽기적인 발언에 충격을 호소합니다!」

베른이 눈앞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마왕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 예상보다 훨씬 더 쉽게 끝난 것 같군.”

하긴.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할 정도로, 베른이 기억하고 있는 [최종보스]로서의 마왕과 저곳에 형편없이 쓰러져 있는 마왕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지만 말이다.

“이게 정말로 끝이라면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내가 베른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 경험상, 지금까지 너랑 엮여서 쉽게 끝나면 끝났지, 허무하게 끝난 일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거든.”

「정보통신학과 학부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아아- 이것은 [빅데이터]란 것이다.’라며 베른식으로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가지가지 하네.

어쨌거나, 그러한 베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말하기 무섭게, 지평선 너머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정말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 빌어먹을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일어난 울렁거림.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그에 대해서 대비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에서 보인 거대한 빛이 번뜩였을 때 순식간에 모든 빛과 소리가 삼켜졌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마치 운석이 떨어져 내린 것 같았다.

「[최종보스 등장]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최종보스 등장] 클리셰 효과로, 주변 일대가 소멸합니다!」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섬광.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며 나타났다.

[흥미롭구나.]

빛무리 사이에서 짧게 울려 퍼진 목소리.

그것은 굶주린 포식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기도, 천하를 손에 넣은 황제가 모든 것들을 내리깔며 하는 광오한 목소리 같기도 했다.

「대다수의 독자가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최종보스]의 등장에 주목합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것’의 모습은 붉은색 비늘이 돋보이는 용인(龍人)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디룽 칸.

동쪽 대륙의 지배자이자, 마왕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최종보스]

제아무리 [개연성]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한들, 그 존재감과 힘은 진짜였다.

그 증거가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강적을 맞이하였습니다! [먼치킨]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29.92%」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린 [먼치킨] 클리셰.

이 현상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마족의 왕자인 나와 동격 혹은 그 이상의 존재라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디룽 칸이었다.

“말이 많은 타입일 줄은 몰랐는데.”

디룽 칸이 그 길쭉한 입가를 씰룩였다.

[짐을 어떤 상식과 알량한 지식만으로 판단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지. 그대는, 내가 기다리고 있던 이는 그렇게 어리석은 자였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참, 재미있는 말인데.”

[짐은 그대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온 이방인아.]

「대다수의 독자가 마침내 만난 당신과 [최종보스]의 회담에 큰 흥미를 표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디룽 칸’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독자들의 흥미도는 정점을 찍고 있었으나, 그와 반대로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디룽 칸이 말한 ‘이방인’이 ‘아인즈 반’의 고향인 ‘불지옥 반도’를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다른 곳을 가리키는 건지 읽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 도대체 뭘 만든 거야?’

그녀가 [개연성]의 허점을 이용해서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 줄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리고 그 존재가 기존의 [최종보스]였던 그녀를 압도할 만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예전에 ‘남쪽의 마왕’이 등장했던 것처럼 이 세계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사라졌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디룽 칸’이 보이는 모습은 단순히 그러한 사실 정도로 보기에는 어딘가 과한 점이 있었다.

‘……잠깐.’

그와 함께,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직도 충격의 후유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베른을 향했다.

[개연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

평범한 등장인물과는 태생부터가 궤를 달리하는 이들은 어딘가 비틀리고, 엇나가 있다.

‘디룽 칸’ 역시도 그런 존재일 것이다.

비틀리고, 엇나간 존재.

그렇다면 그 점을 노릴 수밖에.

“스스로에 대해서 의구심이 아주 많은가 봐?”

그와 함께 디룽 칸에게서 조용한 동요가 일었다. 눈에 띌 정도로 격한 동요는 아니었으나, 내가 그 미세한 차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재미있구나.]

짧게 내뱉은 그 말과 함께 기나긴 침묵이 찾아왔다.

우선, 내가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서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곳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아니,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았을 때 ‘디룽 칸’이 죽으면 곤란한 것은 절대적으로 내 쪽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좋은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장 먼저, 디룽 칸을 [역할] 안에 가둔다.

“용사 디오가 너를 노리고 있다. 나는 그걸 경고해 주러 왔어.”

물론, 거짓말이다.

지금 디오는 디룽 칸의 존재를 알기는커녕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서쪽의 구원자 말인가?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존재가 내 존재를 인식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다수의 독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을 무시하는 [최종보스]의 발언에 [방심하는 최종보스] 성향을 의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골로 간 놈들을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재미있구나. 어디 한번 계속해 보거라.]

“간단해. 너와 동맹을 원한다.”

[동맹?]

“용사 디오가 노리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야. 나 역시도 노리고 있지. 말하자면, 우리는 같은 적을 둔 동지라는 거야.”

디룽 칸이 웃었다.

[그대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역시나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태도.

어차피 속아 줄 거라 기대를 했던 건 아니었기에, 눈치채고 있었다면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구나.]

“어차피 용사가 너 역시도 적대할 것이라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으니까.”

이건 사실이었다.

디룽 칸이 [최종보스]가 된 이상, [주인공]으로서 짊어질 의무가 있는 디오로서는 언젠가 디룽 칸을 죽이려 할 것이다.

없던 [개연성]을 만들어 내서라도.

[기대했던 대로, 그대는 정말로 흥미로운 존재구나.]

그렇게 말한 디룽 칸이 고개를 길게 뻗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묻겠다.]

디룽 칸의 노란빛 눈동자가 빛났다.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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