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Chapter 28: 동쪽의 주인 (6)
‘……이것 봐라.’
「다수의 독자가 ‘디룽 칸’의 날카로운 발언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당신의 반응을 살핍니다!」
제법 예리한 질문이었으나, 어차피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
무덤덤한 내 말에, 디룽 칸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무엇이?]
“전부 다. 힘없는 자는 핍박받고, 돈이 없는 자는 팔려 나가며, 결국 당연한 듯이 목숨까지도 내놔야 하는 이곳이 내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마치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당신의 발언에 기억을 더듬거립니다!」
「설정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이 과거에 ‘전대 용사 베른’에게 했던 발언과 같은 발언임을 확인합니다!」
[가식적인 말이구나. 이방인인 네가 그따위 오지랖을 부릴 이유는 없을 텐데?]
하긴.
상대가 베른이라면 모를까, 디룽 칸은 저런 가식적이고 교과서적인 대답을 바라고 나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더욱 웃으며 말했다.
“들켰네?”
사람들은 누구나 겉으로는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저 자신이 바라는 대답을 원할 뿐이다.
디룽 칸이 원하는 대답.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 된다.
“장난이고, 더 이상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건 마음에 들지 않거든.”
디룽 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가? 마치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 같군. 그게 누구지?]
내가 더욱 짙게 웃었다.
“글쎄? 말해 주면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감히 짐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인가?]
“이제 빠질 머리도 없어 보이는데, 공짜는 그만 밝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부 독자가 단 한마디조차도 지지 않는 당신의 발언에 박장대소합니다!」
「오늘도 머리에 한 줌의 희망을 심고 온 한 독자가 당신의 끔찍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깊은 증오를 품습니다!」
「한 독자가 파충류는 원래 모발이 자라나지 않는다며, 눈물을 머금으며 ‘디룽 칸’의 탈모를 변호합니다!」
그와 함께, 디룽 칸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물들었다.
[……감히 짐을 농의 소재로 삼은 것이냐?]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이라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
당연한 이야기였다.
타고난 지배자인 디룽 칸의 [설정]상, 이런 모욕을 받을 기회는 흔치 않았을 테니까.
“싫으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던가.”
내가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흐름이 나에게 넘어왔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내 확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곧 디룽 칸의 목소리가 누그러들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까 말했던 동맹, 그것인가?]
“조금 전까지는 그랬는데, 이제는 아니야.”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또다시 사기 협상에 나선 당신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말해 보아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디룽 칸’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완전한 단절(斷絶).”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만 이쪽의 일에는 신경 끄고 영원히 이곳 일에는 상관하지 마.”
내가 이런 제의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보여 준 [설정]대로라면 디룽 칸은 얼마든지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다.
자기 입으로 자신 있게 [주인공] 따위는 자신을 찾을 수 없다고도 했으니, 그가 이대로 사라져 준다면 적어도 [최종보스]가 죽는 형태로 이 소설이 [완결] 날 가능성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서쪽의 마왕’이 [최종보스]로서의 자격을 잃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주인공]이 죽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 세계를 [완결]로 이끌 방법이 사라지게 된다.
즉, 지금 닥쳐온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던 문제가 말끔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디룽 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원하는 것이 고작 그것인가.]
짧게 울려 퍼진 목소리.
그리고 들려온 것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명백한 조소였다.
[너무나도 하찮은 목적이지 않은가?]
그와 함께, 디룽 칸의 입가가 비웃음으로 씰룩였다.
[실망이다. 무려 ‘바깥’에서 온 존재의 목적이 고작해야 그것이라니.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숱하게 죽어 나갔던, 제 나름대로 야망을 품고서 초원을 누비던 그 어떤 패배자들보다도 못하구나.]
「당신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일부 독자가 ‘디룽 칸’의 신랄한 발언을 지지합니다!」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디룽 칸의 모습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진심으로 화내는 것 같았던 모습조차도, 실상은 나에게 보여 주려 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어쩌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를 꿰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진실보다도, 어떻게 보여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과연…… 그 여자가 경계할 만해.’
디룽 칸이 어떻게 저 진리까지 닿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이 주눅이 들 필요는 없었다.
디룽 칸이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나 역시도 그를 대하는 행동 방침을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그 방식이 설령 싸구려 도발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래서라니?]
“말 그대로야. 그래서 어쩌라고?”
「다수의 독자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당신의 철면피에 감탄합니다!」
「진지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업계 용어로 ‘짜치는’ 당신의 발언에 실망감을 표합니다!」
디룽 칸이 고개를 저었다.
[말을 섞을수록 실망만 늘어가는구나. 더 이상 그대에게 흥미는 없다.]
그와 함께, 디룽 칸의 몸이 거침없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득-!
머리 위에 돋아난 사슴뿔을 시작으로 전신에 자리를 잡은 붉은색 비늘.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적룡(狄龍)이었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위용을 풍기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절대적인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방문자라 하여 기대했건만 그대에게는 그 어떤 대의도, 명분도 찾아볼 수가 없구나. 그저 한낱 감정에 휘둘릴 뿐.]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디룽 칸’의 날카로운 발언에 동의합니다!」
[짐이 손수 그 부질없는 바람을 거두어 주마.]
“할 수 있으면 해 봐.”
「일부 독자가 마치 [삼류악당] 같은 당신의 발언에 실망감을 표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에게 [삼류악당] 속성이 추가됩니다!」
마치 어제 산 가상화폐마냥 추락하는 평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현상을 손 놓고서 방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자극적인 추락이 있어야만 그럴듯한 변화가 일어날 테니까.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러나 찾아온 것은 내가 기다리고 있던 이가 아닌, 디룽 칸의 거대한 아가리에서 뿜어진 섬광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다.
콰콰콰카카-!
거침없이 뻗어 나온 그것은 닿은 모든 것을 일순간에 없애 버리는 소멸의 빛이었다.
피해야 한다.
내가 맞서는 것보다는 피하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
[반!]
다급하게 들려온 외침과 함께, 어느새 나타난 루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호오.]
그 순간, 나를 향해서 쇄도하던 섬광이 순식간에 멎었다. 디룽 칸이 의도적으로 멈춘 것이었다.
[의외로다. 아직도 살아 있는 잡종이 있다니?]
호기심으로 물든 디룽 칸의 눈과는 다르게 루의 눈동자에는 공포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필사적인 항변.
그러나 디룽 칸에게 들려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내가 하찮기 짝이 없는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단 한 가지라도 있더냐? 잡종.]
[저를 포함해서, 우리 동족은 당신에게 그러한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루가 필사적으로 말하자, 디룽 칸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서쪽 땅에서 잡학 몇 가지를 익혔다고 하여 드디어 미쳐 버린 게로구나. 감히 짐에게 항변하는 것이냐?]
[……오래전 일입니다.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다릅니다.]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르지? 여의주는커녕, 그럴듯한 옥석 하나 키워내지 못하는 너희가 진정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여기느냐?]
「설정을 중시하는 일부 독자가 ‘디룽 칸’이 흘리는 떡밥에 주목합니다!」
[아서라. 너희는 예나 지금이나 용은커녕 이무기조차도 되지 못한 그저 잡종에 불과하다. 개천에 난 뱀도 너희보다는 나을 것이다. 적어도 뱀은 제 주제를 알 테니까.]
「인권운동가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디룽 칸’의 용종차별(龍種差別) 발언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런 뱀만도 못한 잡종인 너에게 지금 짐의 호기심이 동하는구나.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이냐? 너희 잡종들은 이미 순리를 따라서 멸종했을 터인데.]
[당신께서 그걸 어떻게…….]
[고작 잡종 따위에 대해서 짐이 모르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 그 때문에 이상한 것이다. 네가 살아 있는 이유는 짐조차도 알 수 없음이니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드래곤과 디룽 칸의 관계는 결코 평범한 관계는 아닌 듯했다.
이대로 저 대화를 내버려 두는 것도 영 몹쓸 짓이었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궁금해?”
[그대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예상했다.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음이니,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작 이따위 사실을 교섭의 대가로 삼으려는 것은 아닐 테지?]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면 나도 이 대화 속에서 적당히 얻어낼 것만 얻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럴 리가. 나도 그저 궁금한 것 몇 가지를 알려주면 돼.”
[말해 보아라.]
“루와, 정확히 드래곤들과는 무슨 관계지?”
내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무슨 관계인지는 알아야, 내가 나중에 루를 딸이라고 사기를 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지금 감히 그따위 하찮은 잡종들과 짐의 연관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냐?]
“닮은 건 사실이니까.”
「인권운동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당신의 모습을 지지합니다!」
[좋다.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디룽 칸이 조소를 머금고서 계속해서 말했다.
[잡종들은, 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이 가진 신성함을 버리고서 짐승의 길을 택한 패배자들이다.]
「설정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디룽 칸’의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본디 용이란, 신성함을 머금은 존재로서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잡종들은 그 신성함을 스스로 버리고서, 일개 생명체로서 자신들의 격(格)을 낮췄다. 의무가 두려워서 도망치고, 자신들의 본능에 얽매여서 쾌락만을 원하는 어리석은 짐승들이 된 것이지. 참으로 우습지 않느냐?]
“그렇군.”
말은 길었지만, 결국은 한 뿌리가 맞긴 맞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언젠가 내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제 내 의문에 답해 줄 차례다. 저 잡종은 어떻게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난 것이지?]
물론, 그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를 죽음의 경계에서 꺼내 왔다.
단지 그렇게 말해 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그렇게 순순히 거래에 응하기에는 성격이 너무나도 꼬인 인간이었다.
“미안한데, 생각이 바뀌었어.”
[뭐?]
“별로 말해 주고 싶지 않아졌다고.”
「대다수의 독자가 당연한 듯이 약속을 어기는 당신의 파렴치함에 주목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그럴 줄 알았다며 어딘가로 도망간 당신의 양심을 찾아 나섭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에게 [사기꾼] 속성이 추가됩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디룽 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군. 지금 이러한 장난질이 그대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지?]
“아주 큰 의미가 있지.”
바로, 시간을 끌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시간을 끈 이유는 간단했다.
이 판을 뒤집기 위한 가장 중요한 퍼즐 조각이 도착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멈춰.”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멀찍이서 짧고 굵게 울려 퍼진 목소리.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던 그 살기등등한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토록 강렬하게 나에게 애정 공세를 펼칠 존재라면, 오직 한 녀석뿐이었으니까.
“그 녀석은 내가 죽인다.”
이 뻔한 세계의 [주인공]이자, 지금 당장 나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존재.
용사 디오.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