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Chapter 28: 동쪽의 주인 (7)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강렬한 등장에 환호합니다!」
「썩은 물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은근슬쩍 당신을 위기에서 구하는 [주인공]의 등장에 고구마를 호소합니다!」
제법 눈치가 빠른걸.
하지만 그런 내막을 눈치채고 있는 이가 이곳에 나 이외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서쪽의 구원자인가.]
디룽 칸이 어디선가 등장한 디오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으나, 디오는 그런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나를 향해서 곧장 다가왔다.
“아인즈 반.”
자신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떨떠름했는지, 디룽 칸이 몇 번인가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그를 무시했던 디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시끄럽군.”
[좋구나! 그대 역시도 대의가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스스로조차도 얽매고 있는 그 증오는 감히 한낱 감정 따위로 치부할 것이 아니구나. 서쪽의 구원자여, 좋다. 짐이 너를 인정하겠다.]
꼴에 [주인공]이라는 건지 나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차별적인 반응.
그러나 배가 불러 터진 건지, 아니면 저런 호의가 익숙한 건지는 몰라도 디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관심 없다. 볼일이 없다면 꺼져.”
「[선]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악]과 타협하지 않는 [주인공]의 철벽에 환호합니다!」
만약 저 말을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들은 사람이 당장 죽이겠다고 달려들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저 싸가지 없는 놈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그 [주인공]의 특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그 오만함 또한 마음에 드는구나. 언젠가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야.]
「일부 독자가 업계 용어로 ‘벨’도 없는 [최종보스]의 모습에 불편함을 표합니다!」
「썩은 물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지나친 [최종보스]의 호의에 [주인공 보정] 의혹을 제기합니다!」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디오의 표정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런가…… 네가 ‘디룽 칸’이구나.”
[호오…… 짐을 알고 있었느냐?]
그러나 디오는 대답 대신에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 갔다.
“차라리 잘됐군. 오늘 이곳에서, 모든 걸 끝내주지.”
의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계속되는 개무시.
디룽 칸의 인내심도 딱 거기까지였는지, 이내 그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감히 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싸가지 없는 놈이 들어먹을 리가 만무했지만.
“아인즈 반, 너와의 악연도 이곳에서 끝이다.”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상대하는 것처럼 디오가 곧장 나에게 시선을 옮기자, 결국 참지 못한 디룽 칸이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그 순간, 지옥의 업화라도 불러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화염이 일대에 치솟았다.
땅이 녹아내리고, 그 밑으로 용암이 흘러내린 그 광경은 마치 지옥을 현세에 불러온 것 같았다.
그 위력은 나조차도 긴장할 정도였으니, 예전의 디오였다면 곧바로 녹아내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정도였다.
하지만 디오의 모습은 멀쩡하다 못해 평온했다.
“고작 이 정도인가.”
그 이유에는 디오가 강해졌기 때문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디오를 감싸고 있는 수백 개의 버프 때문이었다.
「성자 고유 스킬, [축복]이 발동합니다!」
「성자 고유 스킬, [신성화]가 발동합니다!」
「폭염 술사 고유 스킬, [이프리트의 수호]가 발동합니다!」
「혹한의 지배자 고유 스킬, [절대 영도]가 발동합니다!」
「자연의 동반자 고유 스킬, [자연화]가 발동합니다!」
그와 함께 열린 푸른색 포탈.
그곳을 통해서 수백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야 찾았다. 마족 왕자.”
“우리 드디어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아직 방심하지 마. 보통 상대가 아니니까.”
“그나저나…… 여기 왜 이렇게 더워? 냉기 술사 클래스 없어? 에어컨 좀 틀어 봐!”
그렇게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플레이어]들의 수준은, 이제 과거에 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저건 뭐야? 드래곤? 아니지…… 생긴 거 보니까 도마뱀보다는 구렁이인데?”
“이왕 잡으러 온 거, 저것도 같이 잡고 가자고.”
“나쁘지 않지.”
나는 그렇다고 치고, 나름대로 이 세계의 [최종보스]일 터인 ‘디룽 칸’까지 지나가는 일개 잡몹 취급하는 수준.
이것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결국, 내가 그토록 염려하던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
「[파워 인플레이션] 클리셰가 발동 중입니다!」
「[파워 인플레이션] 클리셰 효과로, 기존 [등장인물]들의 위엄이 감소합니다!」
「[파워 인플레이션] 클리셰 효과로, [진최종보스] 및 [최종보스] 버프가 크게 약화됩니다!」
[감히!]
그 말을 들은 디룽 칸이 크게 진노하며 [플레이어]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온다. 다들 진형 잡아!”
“탱커 라인 선두로!”
지금 보이는 것처럼, 서쪽의 마왕과 작가 놈의 농간으로 사태는 결국 내가 그토록 염려하던 상황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망치지 않고 지금까지 디오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을 기다린 이유는 간단했다.
‘판을 뒤집는다.’
이 [게임]은 처음부터 결국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나는 숙적인 디오를 죽일 수 없고, [플레이어]들은 불사의 존재다. 내가 그들은 모조리 잡아서 감옥 안에 가둔다고 한들, 디오 역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이런 상황이 오는 것 자체가 시간문제였다는 이야기.
만약 [작가] 놈이 중간에 농간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든 그 시간 안에 모든 [클리셰]를 파괴하고 이 세계를 끝장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농간을 부렸고 나는 더 이상 이 판에 낄 생각이 없었다.
이제, 이 게임을 끝낼 시간이 온 것이다.
“무언가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어?”
내가 슬쩍 말문을 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디오가 받아쳤다.
“또 무슨 수작질을 부리려 하는군. 죽어서도 그 입을 열 수 있나 보겠다.”
그렇게 말한 디오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성검을 뽑아 들고는 거침없이 나를 향해서 쇄도하자, 내가 그것을 피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진정해. 이건 사실 너희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니까.”
“닥쳐라.”
“이 세계는, 사실 [게임]이 아니야.”
「다수의 독자가 이미 예상했던 뻔한 [반전]에 식상함을 표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예상할 가치조차 없는 [반전]이기 때문에 굳이 예상하지 않은 것이라며 자신의 추리를 변호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수월한 반응.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도 있듯이,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도대체 어떻게 일개 [게임]이, 사람을 가두는 것도 모자라서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킬 수 있는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그 순간, 세상에 작은 일렁거림이 일어났다.
그 일렁거림은 생각보다도 훨씬 작게 일어나서 그대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 말은 즉, 내가 말한 이 사실이 그다지 큰 충격이 아니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어긋난 [개연성]이 회복됩니다!」
「장르가 변경됩니다!」
「[게임 판타지] → [퓨전 판타지]」
디오가 여전히 온갖 버프를 두른 채로 위협적으로 성검을 뻗으며 말했다.
“……우리를 바보로 알고 있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네가 이곳에서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인즈 반.”
디오의 말이 맞았다.
고작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고 해서, 지금 나에게 있어서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내 눈앞에는 여전히 수백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나를 죽이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여기서 끝내겠다면 말이지만.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또 무슨 수작질을 부리려는 거냐. 하지만 이미 늦었어. 너는 이곳에서 죽는다. 아인즈 반.”
이곳은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그 사실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궁금하지 않아? ‘디룽 칸’이라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어째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는지.”
“닥치라고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디오가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고 무식하게 힘을 쏟아냈다.
콰카캉-!
물론, 제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고 하더라도 내가 저런 눈먼 칼질에 허무하게 죽을 만큼 약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쩌면, ‘디룽 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혹시 어떤 존재들이 그를 억제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개연성]이 살며시 꿈틀거립니다!」
“아인즈 반!”
디오가 다급하게 외치며 더욱 힘을 뿜어내자, 그제야 기묘한 느낌을 받은 [플레이어]들이 움직였다.
“야…… 용사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
“느낌이 안 좋아. 가세하자.”
“마족 왕자를 죽여!”
그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수백 명의 [플레이어]의 모습.
만약 이대로라면, 나는 몇 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위기였다.
물론, 내가 이대로 당해 줄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만.
“괜찮겠어?”
“곧 죽을 놈이 입만 살아서!”
“이런 식으로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일은, 협(俠)과 의(義)를 중시하는 그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기묘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디오의 표정이 굳었다.
“……뭐?”
“디룽 칸은, 서쪽 땅으로 진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거야. 어떤 특정한 ‘세력’ 때문에.”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는 너무나도 강대하게 성장한 [플레이어]들을 견제할 세력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세력이 저토록 강력한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간단했다.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이 말한 ‘세력’의 정체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내가 다시 알려주지.
진정한 동쪽의 주인이 누구인지.
콰직.
콰지직-!
「어긋나 있던 [개연성]이 회복됩니다!」
세상이 요동쳤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더없이 큰 요동.
마치 이대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요동침이었다.
「[장르]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34.3%」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각자의 병장기를 든 수백 명의 사람.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소협! 괜찮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백 명의 고수가 단 한 명의 소협을 핍박하는 일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만약 이를 그냥 지나친다면 천하가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
“적룡대제(狄龍大帝)를 쫓아왔으나, 이 같은 일을 그냥 지나치는 것도 강호의 도리가 아니겠지. 소협! 우리가 돕겠소.”
강자지존(强者至尊)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
무림인(武林人).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