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126화 (126/164)

◈ 126화 Chapter 29: 개연성 (1)

「대다수의 독자가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는 전개에 혼란을 표합니다!」

「설정충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무림]의 등장에 주목합니다!」

「불필요한 [세계관]이 확장되며, 이야기의 [서사]가 흔들립니다! 이후 일정 시간마다 클리셰가 추가적으로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35.5%」

「클리셰 붕괴가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개연성]이 자동 복원을 시작합니다!」

자동 복원?

척 봐도 엄청나게 거슬리는 단어가 튀어나왔으나, 유감스럽게도 당장 나에게 처한 상황은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쿵! 쿵! 쿵!

“아인즈 반!”

그 거친 발걸음 소리만큼이나 분노로 가득 찬 디오의 외침.

아무래도 난데없이 등장한 방해꾼들의 출현으로 무척이나 화가 난 듯했다.

물론, 세상사가 저렇게 무작정 화내면서 떼쓴다고 다 이뤄질 정도로 만만할 리가 있겠는가.

“으음…… 매우 사악한 기(氣)로구나. 소협, 내 뒤에 서게.”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내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 수십 명의 무림인.

“보통 상대가 아니다. 대룡합격진(對龍合格陣)을 펼쳐라!”

척 봐도 누구를 위해서 준비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은 합격진이 외쳐짐과 함께, 수십 명의 무림인이 순식간에 진형을 잡고는 달려오는 디오에게 맞섰다.

디오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뜬금없이 훼방꾼들이 등장한 것이다.

“꺼-져-라!”

콰카카캉-!

디오와 그들이 격돌하는 도중 내 시야 속에 한 가지 묘한 장면이 포착됐다.

‘베른?’

그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멀찍이서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베른의 모습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평소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테지만, 지금 베른의 기색은 멀리서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해 보였다.

그래, 마치 죽은 애인이라도 다시 만난 것 같은 표정.

그러나 나에게 더 이상 딴청을 부릴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주인공] 버프가 강하게 발동 중입니다!」

“커헉!”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신위란 말인가……!”

순식간에 합격진을 꿰뚫어 버리고는 내 앞에 선 디오의 모습.

제아무리 수많은 소설 속에서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무림인이라고 한들 어차피 이곳의 [설정]에서는 동쪽의 절대적인 지배자인 디룽 칸에게 맞서는, 그리고 아직 넘어서지 못한 일개 세력에 불과했다.

“또 수작을 부릴 게 남았나?”

“무슨 소리야? 누가 보면 내가 뭐라도 저지른 줄 알겠네. 보면 몰라? 그냥 단순히 지나가던 협과 의를 중시하는 분들께서 도우러 온 거잖아?”

“……됐다.”

디오가 성검을 잡은 손목을 한 바퀴 돌리고는 말했다.

“어차피 너는, 이곳에서 죽는다.”

멀리 있는 베른이 눈에 밟혔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눈앞에 있는 내 적에게 온 신경을 다 써야 할 때였다.

* * *

「토할 것 같다.」

「언제고 느꼈던 것 같은 울렁거림에 하이디는 헛구역질을 했다.」

「루가 떠나 버린 후, 그녀의 일상은 완전히 멈춰 버렸다. 따라가고 싶었다. 제발 데려가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허락을 구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녀 스스로는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선택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억지로라도 토하고 싶었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깔끔하게 게워내고 싶었다.」

「“……어?”」

「그 순간.」

「왜일까.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의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고개를 떨구지 못했다. 두려웠다. 시선을 내려서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나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럽게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웁!”」

「그와 함께 보인 것은, 어느새 희미하게 변해 버린 자신의 하반신이었다.」

「“우, 우웨엑!”」

「하이디의 눈가에서 물기가 흘러내렸다. 사라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부정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흐느끼며 바라는 것뿐이었다. 나를 찾아 줘. 나를 불러 줘.」

「그녀는 애원했다. 누구라도,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자신을 불러 달라고.」

「하이디의 간절한 바람이 마침내 닿은 걸까, 아니면 다른 무엇인 거일까. 정답은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바라는가.]」

「짧게 들려온 목소리.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목소리. 어느새 정신을 차린 하이디의 목소리에 경계의 기색이 깃들었다.」

「“당신…… 누구야.”」

「하이디의 시선 끝에, 정확히 거울 맞은편에서 그녀와 똑같이 생긴 검은 형체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 바람을 이루어 줄 존재.]」

「소개는 짧았다. 그러나 하이디는 그 검은 형체가 결코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등장부터 남의 집 거울 속에서 등장하는 존재가 소원을 이뤄 주는 친절한 요정일 리는 만무했으니까.」

「“……관심 없어.”」

「[있을 텐데.]」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침을 삼켰다. 당연히 저 수상한 존재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내 바람이 뭔 줄 알고?”」

「거울 속에 비쳐진 하이디가 미소 지었다.」

「[존재.]」

「의미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그저 짧은 단어에 불과한 대답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하이디의 몸이 움찔했다.」

「“……뭐?”」

「저도 모르게 그녀가 되물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거울 속에 비쳐진 조소와 불쾌한 웃음소리만이 흘렀을 뿐.」

「그 웃음소리가 흐른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엇인가 결심을 한 하이디가 씹어 삼키듯이 내뱉었다.」

「“……꺼져.”」

「하이디답지 않게 험악한 단어.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평소에 사용하던 단어를 일일이 선별하고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 못했다. 그녀가 한 것은 그저 가면을 뒤집어쓴 것에 불과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대답이었음에도, 검게 물들어 있는 거울 속의 ‘그녀’는 그저 낮게 웃었다.」

「[후회할 텐데.]」

「하이디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떨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멎어서, 이제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그딴 거 안 하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반발은 없었다. 그저 작은 끄덕거림. 거울 속에 있는 ‘그녀’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지.]」

「스르륵-.」

「검은 연기가 치솟으며 마침내 검은 형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아.”」

「검은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뒤집어썼던 허세의 가면을 벗어 던졌다. 항상 그리워하던 이의 흉내. 그래, 그저 흉내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과는 썩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검은 형체가 물러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이디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았다. 당장 얼굴을 들었다가는, 무엇인가 왈칵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무릎이 점점 축축해졌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참아 보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하이디는 무릎을 끌어안고 울었다.」

「“……흐, 흐끅!”」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이 약했다면 그대로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참아냈다.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유혹을 견뎌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 던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무릎을 끌어안고서 조용히 울었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 * *

베른은 표정을 찌푸렸다.

세계(世界)에 일어난 기묘한 울렁거림은 이제 그에게 있어서도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의 어리고 건방진 동료가 무엇인가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익숙하지도 않고, 또 순순히 수용하기에도 너무나도 난해했다.

“……바네사?”

베른은 스스로 입에 뱉은 그 이름을 부정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죽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에 직접.

“오랜만이야.”

“…….”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현실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죽었던 바네사가 지금 멀쩡히 살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령인가?

죽은 존재를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베른은 그렇게 납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묻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정말로…… 바네사라고?”

“왜, 기껏 죽였는데 살아 돌아와서 아쉽나 봐?”

“그건…….”

“농담이야.”

유령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천진난만하고 생기 넘치는 웃음.

베른은 혼란을 감출 수 없었다.

성녀 바네사.

용사로서 자신이 남긴 추악한 악의 배출구가 되어, 끝내 마왕이 되어 버린 비운의 여인.

도저히 잊으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이름.

“어떻게…….”

베른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물어야 할까? 어떻게 살아 있냐고?

아니, 그 질문 자체가 너무나도 우스운 말이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그렇기에 베른은 그녀를 마주 보고서 인사했다. 자신이 잔혹하게 죽였던 그 사람에게.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바네사의 물음이었다.

도저히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

베른은 깊게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보고 싶었어.”

그렇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로 솔직한 고백은 예상치 못했는지 바네사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흐응.”

유령치고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썩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나 베른은 이제 사사로운 감상을 벗어던지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였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지.

“너…… 뭐지?”

“뭐가?”

“너 뭐냐고.”

“이미 알잖아?”

아니, 몰라.

알 턱이 없다. 애초에 베른은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바네사 본인이 맞기는 한 건지, 만약 본인이 맞다면, 그 모습은 유령인 건지 아닌 건지조차도 판단할 수 없었다.

“보통 이럴 때는 사랑의 힘으로 알아보고 그러지 않나?”

“…….”

“쓸데없이 혼자서 나이 먹더니 애정이 식었어.”

도대체 뭘 믿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베른은 굳이 부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그냥 무시했다.

그러나 그런 베른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바네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베른.”

스르릉-.

그러나 그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것은 결코 호의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

우스운 사실이었다. 생전의 바네사는 검을 거의 사용할 줄 몰랐다. 만약 이것이 어떤 함정이라면 너무나도 성의 없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베른은 그 허접한 함정에 대해서 비웃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너…….”

그와 거의 동시에 바네사가 그에게 검 끝을 겨누었을 때, 베른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바네사가 그를 향해서 검을 겨누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에 비쳐진 바네사의 모습에서 무엇인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라져야 해. 아니, 애초에 존재하면 안 됐어.”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바네사의 목소리는 베른의 귓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이질감에 모든 신경을 집중할 뿐.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베른이 인지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연성]이 자동 복원 중입니다!」

「[설정 오류]를 수정합니다!」

운명이, 그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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