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127화 (127/164)

◈ 127화 Chapter 29: 개연성 (2)

나와 디오의 전투는 거의 백중세였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시종일관 나를 압도하던 디오에게 걸려 있던 수많았던 버프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풀려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버프들이 풀려나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끄아악!”

“도대체 이놈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어느 순간 들이닥친 무림인들이, 디오를 지원하던 플레이어들을 도륙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플레이어들 역시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무림인들의 난입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플레이어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내 전세는 백중세를 이루었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디오에게 향하던 지원까지 유지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콰카카캉-!

그 순간, 멀찍이서 뿜어진 성검의 빛이 폭발했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내가 휘두른 마족의 마력에 의해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놈!”

그런 식의 힘의 교환이 나와 디오 사이에서 몇 차례 반복되자, 디오가 전략을 바꾸려는 듯 곧 나를 향해서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무슨 멧돼지도 아니고.”

분명히, 누군가의 개수작에 의해서 디오에게 주어진 시간은 녀석을 강하게 만들었다.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꾸준한 노가다를 통해서 레벨을 올린 셈.

그러나 녀석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진최종보스] 버프가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전투력]이 [200%] 상승합니다!」

비록 [먼치킨] 버프처럼 말도 안 되는 보정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는 이 정도만 있어도 충분했다.

“넌 나한테 안 돼.”

디오가 강해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플레이어 사이에 껴서 약자나 잡으면서 얻은 강함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레벨만 높지, 그 외의 것들은 여전히 예전의 디오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개소리!”

분노에 찬 디오의 외침과 함께, 녀석의 전신에서 더욱 강력한 힘이 분출됐다.

「[주인공] 버프가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용사 디오’의 전투력이 [300%] 증가합니다!」

……제법이네,

어차피 저 정도의 효과는 충분히 예상 내였기에, 나는 다시금 숨을 고르고는 디오를 향해서 마력을 뿜어냈다.

치지직-!

마치 번개처럼 갈라진 마족의 마력이 디오를 향해서 쇄도하자 거침없이 달려들던 디오 역시도 그 기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걸리적거린다!”

디오의 포악하기 짝이 없는 포효와 함께 뿜어진 마력이 모조리 상쇄되고 다시금 디오의 낯짝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래,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왜, 뽀뽀라도 하려고?”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저질스러운 농담에 더러움을 표합니다!」

「야설 빌런이 성별조차도 초월한 당신의 진심 어린 발언에 콧김을 내뿜습니다!」

그냥 딱딱하다 못해 살기만 풀풀 넘치는 이 분위기나 풀어 보려고 했던 말인데, 디오의 반응은 과격하다 못해 이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의를 품고 있었다.

“……죽인다.”

그렇게 나와 디오가 다시 한번 격돌하려던 순간.

쩌적-.

쩌저적-!

그 현상을 보자, 나는 아까 일어났던 [개연성]의 복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와 디오 사이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 모를 균열이 우리를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전개입니다! 사라진 [메인 시나리오]의 [복원]을 시행합니다!」

「[개연성]이 안정을 찾기 위해서 강제적인 복원력을 발휘합니다!」

……뭐지?

이변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던 디오의 모습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접근하려고 어떻게든 애를 쓰고 있었지만 [개연성]에 의해서 저지당하고 있었다.

“너…… 또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거냐.”

아무래도 디오는 내가 이 일을 저질렀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

뭐, 근본적인 원인으로 따지면 내가 저지른 일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맞기는 하겠지만, 결코 이 현상 자체가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 역시도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순순히 디오에게 알려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이용해야지.

“글쎄?”

산뜻하게 지은 내 [흑막] 전용 미소에 디오는 껌뻑 속았는지, 이내 분노로 얼굴을 물들였다.

“너!”

디오를 도발하는 것까지는 쉽사리 성공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나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이변은 곧 일어났다.

「[강제 복원력]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지만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니, 모순적인 표현이었으나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바로 그러했다.

“……어?”

짧게 울린 탄식.

그곳에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가는 플레이어와 무림인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자리처럼.

“이게 무슨…….”

의아한 목소리는 그 끝맺음을 맺지 못했다.

사라졌다.

그 어떤 맥락도, 이유도 없이.

마치 이곳은 그들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이 세계] 자체가 강력하게 주장하듯이.

[어이 없군.]

그 목소리의 주인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흩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직 순서가 아니라는 건가?]

목소리의 주인이자 동쪽의 주인인, 디룽 칸이 낮게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몸이 점차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희미해졌다.

[아직 내 순서가 아닌 것 같군. 다음에 보지. 서쪽의 구원자.]

일찍이 사라진 플레이어와 무림인들처럼 디룽 칸은 그 말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

그러나 이 현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강제 복원력]이 발동합니다!」

그 순간, 부자연스럽게 눈앞이 흐려졌다.

그제야 내 몸을 확인하자 나는 내 모습 역시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져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

당연히 이 모든 소행을 내 짓으로 알고 있는 디오였기에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거…….’

그 순간, 내 눈앞에서 나타난 또 다른 메시지.

「경고! 당신은 [Chapter 29]의 올바른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강제 복원력]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메인 시나리오]에서 배제됩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조졌다.’

그와 함께, 눈앞에서 수십 갈래의 빛이 쏟아졌다.

* * *

바네사의 검이 베른을 향해서 거침없이 쇄도했다.

그것은 마왕의 힘도, 성녀의 힘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검술.

그녀의 검을 받아내는 베른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눈앞의 상대를 어설프게 대할 수는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그대로 목이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예전처럼은 잘 안 되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베른은 저 말이 ‘예전처럼 쉽게 죽일 수 없지?’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예전 같은 사이는 아니지?’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기에, 침묵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

“재미없게.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

바네사가 저런 성격이었던가?

베른은 이제는 희미해진 옛 기억을 되새겨보려 했으나, 고통뿐인 그 기억은 왜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옛 기억을 떠올리기를 포기한 베른이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흉내를 낼 거라면, 조금 더 그럴듯하게 준비하지?”

“뭐? 흉내? 꺄하하!”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바네사’는 연신 베른의 급소를 노리며 해맑게 웃었다.

“지금 나를 가짜로 알고 있는 거야?”

“그러면 아니라는 건가? 바네사는 검을 쓸 줄 몰라.”

“정확히 말하자면, ‘그랬던’ 거지. 지금은 아니야.”

“그녀는 죽었어.”

“아,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 구해 달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베른의 몸이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글쎄요오? 어떻게일까요오?”

“……놀리는군.”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몇 있다. 아인즈 반과 디오. 그리고 이제는 생사유무조차도 모를 에단까지.

하지만 그들이 눈앞에 있는 정체 모를 여자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한 가지.

바로 눈앞에 있는 ‘바네사’가 정말로 본인일 경우였다.

“너…… 정말로 바네사냐?”

“이제 알았어?”

그렇다면 어떻게?

베른은 당장 닥쳐오는 혼란을 도저히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베른의 혼란을 눈치라도 챈 듯이, 바네사의 검이 베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선혈이 흩날렸다.

“아까워라. 조금만 더 깊었으면 정맥이 잘렸을 텐데.”

“……검은 어디서 배웠지?”

베른은 어떻게 살아 있냐. 어째서 이곳에 왔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 질문 자체가 스스로의 목을 죌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 복잡한 베른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바네사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무림(武林)에서.”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곳에서 나는 꽤, 이름난 여고수거든.”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는 건 알겠군.”

그러나 그 순간, 바네사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잘 지낸다고?”

그 후에 휘둘러진 검이 순식간에 베른의 왼팔을 베고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어딘가 화난 기색을 품은 바네사가 말했다.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는 베른을 노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베른. 너는 아직도 모르고 있어. ‘우리’가 무엇인지.”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전부 다.”

계속되는 알 수 없는 바네사의 말에 베른은 슬슬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나 지껄일 거라면.”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죽인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수비 일변도로 잠자코 있었던 그의 ‘쟁기’가 서서히 그 크기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대장장이 한스가 숨겨 놓은 안배가 그 힘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베른의 모습에 바네사가 여유롭게 말했다.

“과연 네가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바네사의 태도에는 확신마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네사의 태도가 우습다는 듯이, 이내 베른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한결같이 여유로움을 유지하던 바네사의 표정이 동요로 조금 들썩였다.

“……변했구나, 베른.”

“네가 정말로 바네사가 맞는다면, 변한 건 나뿐만이 아닐 텐데?”

“그런가.”

그렇게 배시시 웃어 보인 바네사가 겨누고 있던 검을 거두며 말했다.

“이크. 벌써 시간이 됐나 보네.”

“뭐?”

“나중에 또 봐.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까.”

베른은 바네사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되다니?

그때였다.

“……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탄식과 함께, 저편에서 한창 싸움을 이어 가고 있던 플레이어와 무림인들이 순식간에 말 그대로 ‘사라지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나, 눈앞에 있는 바네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베른을 바라보며 손바닥을 쳤다.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아, 그리고.”

바네사는 뒷말을 할까 말까 조금 고심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이 말했다.

“베로니카가 안부 전해 달래.”

“……뭐?”

그것은 결코 바네사가 알고 있을 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바네사! 지금 그게 무슨……!”

그러나 베른은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강제 복원력]이 발동합니다!」

바네사가 있던 자리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황량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