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Chapter 29: 개연성 (3)
디오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라졌다.
자신이 데려왔던 수많은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의문의 세력들. 심지어 마지막에는 이 모든 일의 흑막이라고 생각했던 숙적까지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디오는 혼란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이와 비슷한 현상은 지금까지 숙적, 아인즈 반이 얼마든지 보여 주었었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아인즈 반이 일으키는 괴상한 현상에 대해서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만 손해 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어난 일은 달랐다.
그 ‘아인즈 반’마저도 지금 일어난 괴현상을 피해 가지 못했다. 즉, 이 현상은 아인즈 반이 직접 의도한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
디오는 아인즈 반이 있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그저 누군가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짓눌린 풀포기만이 오직 그가 보았던 것들이 환상 따위가 아님을 말해 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디오는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선배?”
멍한 표정을 지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친 디오는 거침없이 그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너.”
그 거침 없는 발걸음에 그녀 역시도 디오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야! 아니, 너. 디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당황함과 반가움이 뒤섞인 그녀의 외침에, 디오는 이내 실망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발걸음을 멈췄다.
“……역시 너도 모르는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잠깐, ……너, 아니 당신도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른단 말이야?”
반말할 거면 차라리 편하게 하던가. 디오는 에드윈의 기묘한 화법에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만약 있다고 하면, 오직 한 녀석뿐이긴 하다만…….”
문제는, 지금 그 녀석조차도 용의선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아니면 이것조차도 의도했거나.’
그러나 디오는 아인즈 반이 마지막에 보였던 당혹감을 떠올렸다. 그 표정과 말투. 제아무리 사기를 치는 데 능한 녀석이라지만, 그것마저도 연기해 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게 누군데? 아…….”
에드윈이 누구를 떠올렸는지야 뻔했기에, 이내 디오가 그녀의 생각을 정정했다.
“녀석은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마족 왕자가 아니라고?”
“녀석도 함께 사라졌거든. 표정이 꽤나 볼만하더군.”
그나마 얻은 소득이 있다면 그 정도일 터다.
디오는 굳은 표정으로 지금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했다. 사라진 플레이어들과 무림인. 만약 그들만 사라졌다면 디오는 이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디룽 칸을 비롯한 아인즈 반까지. 특히 아인즈 반이 사라진 일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서사]가 요동칩니다!」
「당신의 의무를 수행하십시오.」
디오는 그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느낌은 받았다.
“어디 가? 요.”
여전히 반말인지 경어체인지도 모를 에드윈의 말은 무시한 채로 디오는 걸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로.
“저기요? 야! 어디 가냐고!”
……이젠 아예 제멋대로 부르는군.
그러나 디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스스로도 무엇이 있는지 모를 곳으로.
그리고 마침내 디오의 발걸음이 멎었을 때 에드윈이 우뚝 멈춰 선 그의 등에 부딪히고는 눈알을 부라렸다.
“저기요! 갑자기 멈춰 설 거면 말이라도…….”
“……키리엘?”
“네?”
에드윈은 전혀 처음 듣는 이름에 디오의 어깨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쓰러진 한 여인을 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잠깐.”
에드윈은 심각한 표정으로 곰곰이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누구였지…… 아, 알 것 같은데. 잠깐, 키리엘이라고? 그렇게 눈알을 돌리던 그녀는 이내 눈앞에 쓰러져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서쪽의 마왕.
이제는 희미해진 [월드 퀘스트]의 사냥 대상 중 하나이자, 최종 목표인 마족 왕자의 수하.
그 정체를 확인한 에드윈이 자연스럽게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 마나를 끌어모았다.
“……뭐 하는 거지?”
디오의 질문에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에드윈이 외쳤다.
“죽여야지! 마족 왕자의 일행이잖아.”
그러나 들려온 것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디오의 목소리였다.
“그만둬라. 죽고 싶지 않다면.”
“……뭐라고? 지금 제정신이야?”
“아닐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라면 굳이 제정신이 아닌 상대를 건드리지는 않을 거야. 정말로 죽을 테니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디오였기에, 에드윈으로서는 디오의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에드윈의 다리가 두려움으로 조금 떨렸으나, 그녀는 애써 그것을 감추려는 듯이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리고 디오는 조금은 무심하게, 그리고 아련하게 쓰러져 있는 서쪽의 마왕을 바라보았다.
“…….”
저 남자는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에드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감히 그것을 입 밖으로 물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는 저 미친놈이 정말로 죽이려 들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할 거야?”
그렇기에 아주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른다.”
그렇게 대답한 디오는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녀를 죽여야 하나?
눈앞에 있는 존재는 그 가녀린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무려 마왕이었다.
죽여야 한다.
디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를 죽인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정말로 ‘그 약속’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디오는 그 답을 알지 못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지금 눈앞의 마왕을 죽인다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그가 인식한 [악]에 마왕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악]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디룽 칸.
서쪽의 마왕보다도 훨씬 더 사악하고 거대한 존재.
우습게도 디오는 그동안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혀왔던 아인즈 반을 자신의 숙적이라 여기고 있으면서도 용사로서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은 전혀 다른 이를 떠올렸다.
그 사실이 스스로조차도 너무나도 의문스러웠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대답을 줄 존재는 이곳에 없었다.
그 기나긴 고민 끝에 디오는 외면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기에 그는 결국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냥 가려고?”
“……그래.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
디오의 말에 그제야 조금 전에 일어난 괴현상을 떠올린 에드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꺼림칙한 부분은 있었지만, 디오의 말대로 지금 급한 것은 눈앞의 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가지.”
그렇게 디오가 애써 뒤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강제 복원력]이 발동합니다!」
「[Chapter 29]의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됩니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
[디오의 서사]
[1] 이방인. [완료]
[2] 용사. [완료]
[3] 타락 용사. [완료]
[4] 히든 플레이어. [현재 진행 중]
[5] ???
+
「용사의 과업인 서쪽의 마왕을 처단하라.」
그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운명에 디오는 그저 멍하니 서서 눈만 껌뻑였다.
“왜 그래?”
이상함을 느낀 에드윈이 그렇게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한 시선으로 쓰러져 있는 키리엘을 훑었을 뿐.
“아.”
디오는 입을 끔뻑였다.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제 도망칠 수 없었다.
* * *
뿌옇다.
흐려진 눈앞이 선명해진 것은 그 감각을 느낀 후 조금 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여기는 어디지?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같은 시시한 클리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메인 시나리오]에서 이탈하여, 일정 시간 동안 대기합니다.」
「[개연성]을 확보 중입니다.」
「현재 확보된 개연성: 3%」
……오호라.
대충 해석해 보자면, 나를 제멋대로 [메인 시나리오] 바깥으로 내쫓은 것에 대한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끌기 위해서 나를 이곳에 처박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러한 ‘대기 장소’인 이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그 의문점에 대한 해답은 곧 찾아왔다.
[일어났니?]
들려온 것은 포근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야?’
그러나 내 의지와는 달리,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라는 것은 성대에서 시작되는 공기의 파동이야. 지금 네 상태는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해. 이미 잘 알고 있잖니?]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내 의문에 답하는 그 ‘목소리’의 말에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판타지스러운 풍경 속에서 어울리지도 않게 현실을 들이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됐고, 당신 누구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성격 한번 급하구나.]
이미 알고 있다고? 그것참, 묘한 말이다.
‘그렇게 잘 알면 대답이나 하던가.’
[그러니까 왠지 말하기 싫어지는구나. 혹시 청개구리 효과라고 알고 있니?]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해졌다.
지금 이 목소리는, 상당히 재수 없는 녀석이다. 그것도 좆나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구나. 이곳을 찾아온 손님은 거의 처음이라서.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돋았구나.]
‘됐고, 그냥 조용히 있으쇼. 어차피 나도 시간만 되면 이곳에서 나갈 거니까.’
내가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은 삐진 투로 말하자, 의문은 목소리는 그것마저도 유쾌하다는 듯이 몇 번인가 더 꺄르륵 웃었다.
[우선, 이곳은…… 정확한 설명은 할 수 없으나 일종의 ‘경계’라고 보는 게 좋겠구나. 아무튼 그런 곳이다.]
성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설명이었지만 어차피 꼭 알아야 하는 장소도 아니었다.
‘아, 그러십니까.’
내가 여전히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그놈의 ‘청개구리 효과’라도 발동했는지 목소리가 더욱더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더냐?]
‘이제 별로 안 궁금해졌는데.’
[그렇게까지 궁금하다면야, 대답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처음에 물을 때는 그렇게 빼더니 관심 없다고 하자 어떻게든 말하려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제멋대로였다.
‘할 거면 하든가.’
[그렇게까지 듣고 싶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들려온 이름은, 의외로 나도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름이었다.
[내 이름은 므.]
므라고?
므라…… 어디서 들었었지?
분명히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이긴 했는데 그 출처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런 내 의중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말하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내 므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계의 마왕이었던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