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129화 (129/164)

◈ 129화 Chapter 29: 개연성 (4)

기억났다.

마왕 므.

베른의 옛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재앙’.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설정]에 의해서 언급된 존재.

말하자면 내가 비튼 설정에 의해서 탄생한 ‘전대 용사 베른’이라는 존재에서 또다시 파생된 수많은 ‘등장인물’ 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재미있는데.’

[응? 뭐가?]

본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설정]에 불과한 인물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그 인물이 이 정체 모를 ‘경계’라는 공간에서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므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런데 그 질문은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나는 애초에 ‘죽은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말.

[뭐, 애초에 ‘태어난 적’도 없지만.]

그 순간, 나는 마치 뒤통수를 해머로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므’는 이 세상이 거짓과 뻔함으로 점철된 세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낱 ‘등장인물’ 아니, 그조차도 되지 못한 일개 ‘설정’에 불과할 터인 존재가 도대체 어떻게?

‘너…….’

[어머, 내 정신이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쉽지만 우리 대화는 여기서 끝내야겠어.]

그 말이 끝나기도 채 무섭게 눈앞에서 이내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개연성]을 확보 중입니다.」

「현재 확보된 개연성: 98%」

그 순간 이곳에 올 때 보았던 빛무리가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징조였다.

‘한 가지만 묻지.’

[응? 아직 안 갔어? 말해 ]

‘너 혼자인가?’

내 질문이 의외였다는 듯이 이내 키득 웃어 보인 므가 이내 기묘한 웃음기를 머금고는 말했다.

[아니.]

……역시.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단어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와 함께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빛무리가 나를 완전히 집어삼키자, 나는 순순히 그 빛을 받아들였다.

「[개연성] 확보가 완료되었습니다.」

「[개연성]이 확보된 장소로 이동합니다.」

* * *

아까와는 다른, 더없이 익숙한 하늘.

돌아온 곳은 제국의 수도 한복판이었다.

“일어났어?”

그리고 그런 하늘을 가리며 불쑥 나타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얼굴.

“다행이야! 걱정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그리고 무척이나 오랜만에 본 얼굴이었다.

“……리안?”

제국의 일황녀 리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그녀였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온 거야?”

“내가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부탁했어. 너를 찾아 달라고. 지금까지는 전혀 소용이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 성공한 거야.”

그제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 마법진이 보였다. 척 봐도 보통 규모는 아닌 것이 마족인 내가 수많은 시도 끝에 어쩌다 한번 소환당한다고 해서 따로 [개연성] 지적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과연.’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사라진 [개연성]을 메꾼다는 건가.

어쨌거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사태에 대해서 더 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마왕 므라…….’

도대체 어떻게 일개 설정에 불과한 심지어 옛날에 죽은 인물이 직접 의지를 가지고서 뛰쳐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그것 역시도 얼마 전에 일어난 [개연성 복원]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베른을 시작으로 그에게서 파생된 모든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 그 근본이 비틀려 있을 테니까.

“저…… 반?”

조심스럽게 퍼진 목소리와 함께 그제야 눈앞에 있는 리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였지?

그러나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때에 어느새 얼굴이 귀까지 붉게 물든 리안이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 만나서 반가웠다고.”

“어, 그래.”

「야설 빌런이 오랫동안 가슴 졸이며 이 만남을 고대한 ‘리안’의 마음을 가볍게 무시하는 당신의 행태를 맹렬하게 비난합니다!」

물론 내가 리안이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치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한 찜찜함만이 있었을 뿐.

“이만 가 봐야겠어.”

“벌써?”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리안의 머리를 내가 쓰다듬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일단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보자면, 마왕 므에 대한 건은 분명히 꺼림칙한 부분이 많기는 했으나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 이건 기각.

그렇다면 역시 가장 급한 일은 [메인 시나리오]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생각해 보려 해도…… 아는 게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의 끝은커녕 시작도 제대로 보지 않은 내가 앞으로 디오가 할 일을 알 리가 없었다.

뻔하디뻔할 터인 녀석의 결말 역시도 예측만 할 뿐 사실은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참은 [메인 시나리오]와 떨어져 있던 [주인공]이 갑작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로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베른도 찾아야 할 것 같고…… 왜 이렇게 거슬리는 게 많아?’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예견된 사태이긴 했다.

작용은 늘 반작용을 부른다.

그 법칙대로 과할 정도로 파괴된 [이 세계]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 드디어 자정 작용을 시작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 모르겠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던 내가 결국 선택한 것은 포기였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내가 날뛰며 제멋대로 부숴 놓은 이 세계는 이제 나조차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옮겼던 발걸음을 다시금 안쪽으로 옮기며 리안에게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은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때, 리안이 물었다.

“그런데 하이디는?”

“뭐?”

“하이디는 어디에 있냐고. 너희, 질투 날 정도로 항상 붙어 다녔잖아?”

* * *

디오는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했다.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에 들린 성검은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 상대를 내려치지 못했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계속해서 그를 옥죄는 운명에 디오는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음을 느꼈다.

“……키리엘.”

디오는 억지로 짜내듯이 말했다. 부디 그녀가 이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쓰러져 있는 마왕에게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디오의 마지막 바람 따위는 아무런 부질도 없다는 듯이.

디오는 성검을 쥔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죽이고 싶지 않아.

죽여야 해.

죽이고 싶지 않아.

죽여야 해.

고작 한 걸음을 내딛는 데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수십, 수백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제발.”

디오는 기도했다. 제발 누군가가 자신을 멈춰 주기를.

그러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고, 이내 그의 손에 들린 성검이 불을 토했다.

디오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그리고는 조용히 절망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저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그러나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디오는 질끈 감았던 눈을 다급하게 뜰 수밖에 없었다.

“뭐하냐?”

“베, 베른?”

지금 이 상황에는 디오조차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 베른의 허리춤에 어느새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마왕의 몸이 축 늘어진 채로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 하하…….”

디오는 허탈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내가 그토록 말했을 텐데? 죽을 때까지 후회할 짓은 하지 말라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디오가 성검을 든 채로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조금 전과는 다르게 지금 육체의 통제권은 온전히 자신에게 넘어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하나였다.

‘운명’의 시선을 피해서 저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녀를 놓고 가십시오.”

아니야, 놓고 가지 마.

“싫다고 말한다면?”

“당신도 죽일 수밖에.”

죽이고 싶지 않아. 빨리 도망가 줘.

“여전히 귀염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녀석이야. 미안하지만, 지금은 나도 절박해졌어. 이 여자…… 마왕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거든.”

“관심 없습니다.”

빨리 도망가기나 해.

“그래, 그렇게 말하겠지.”

베른이 그렇게 말하며 애병, 쟁기를 꺼내 들었다. 새삼 볼 때마다 느끼지만 농사짓기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흉악스러운 물건이었다.

“당신이 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제발 그냥 빨리 도망가.

내가 또다시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기 전에.

“그거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꼭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입니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데? 무언가 바라는 거라도 있나 봐?”

베른의 말에 디오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시끄럽고, 어서 덤비기나 하십시오.”

“말투도 최근에 비하면 그나마 부드러워졌고.”

베른이 그렇게 말하며 그 흉악한 쟁기를 휘두르자, 땅이 울음을 토했다.

콰카카카캉!

언제 보아도 무지막지한 위력.

디오는 흩날리는 돌 파편에 맞아서 얼굴이 찢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성검을 뻗었다.

“흐읍!”

디오의 기합성과 함께 그에게 날아들던 돌 파편과 모래들이 순식간에 튕겨 나가며 사방에 비산했다.

“너답지 않게 방어적인데?”

베른의 조롱이 들려왔으나, 디오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에게 조롱을 퍼붓는 저 남자가, 부디 자신을 쓰러뜨려 주기를 바라면서.

“……시끄러워.”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렇게 떠들 시간에 제발 그냥 도망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만약 그런 말을 직접 내뱉었다가는 ‘운명’이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몰랐기에 디오는 지금처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조롱,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디오가 그렇게 외치며 적당히 검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의 검에서 원치도 않던 불길이 치솟으며 그의 공격을 도왔다.

「폭염 술사 고유 스킬, [억겁의 염화]가 발동합니다!」

“너…….”

갑작스럽게 일어난 그 불꽃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저도 도울게요!”

플레이어 에드윈.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여자의 참전에, 디오의 표정이 흉악하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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