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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30화 (130/164)

◈ 130화 Chapter 29: 개연성 (5)

“……하이디라고?”

“응. 하이디. 항상 같이 붙어 다녔잖아? 웬일로 안 보이나 해서.”

하이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 잊고 있었지?

아니, 잊고 있던 것이 아니다. 그저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을 뿐.

그렇다면 왜?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내가 하이디를 잊고 있었다면 그에 대한 이유 역시도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내 동요가 표정에서도 드러났는지, 리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곁에 없나 보네?”

「야설 빌런이 매의 눈으로 경쟁자의 유무를 파악한 ‘리안’의 안목에 감탄합니다!」

「일부 독자가 ‘하이디’가 누구였냐며 머리를 긁적입니다.」

물론, 내가 단순하게 하이디에 대해서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한때 나 자신의 [설정]마저도 건드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그녀를 구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하이디에 대해서 잊어 갔다. 그에 대한 원인은 깊게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등장인물, ‘하이디’의 [공기] 속성이 강하게 발동 중입니다!」

……언제부터였지?

처음에 저 메시지를 보았을 때는 그러려니 하며 웃어넘겼다. 으레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있는 법이었고, 각자가 가진 캐릭터성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것은 곧 어떠한 사건의 발생을 말했다.

하이디.

그녀를 찾아야 한다.

“가려고?”

내 표정을 읽었는지 어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리안이 물음에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국 그런 선택을 하는구나.”

리안의 목소리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이내 내 옷자락 끝을 잡았다.

“가고 나면?”

“뭐?”

“가고 나면 어쩔 거냐고.”

……얘는 또 왜 이래?

그러나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어찌 보면 이 또한 내가 뿌린 씨앗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말하자면 내가 예전에 뿌렸던 ‘떡밥’들인 셈이었다.

「야설 빌런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치정극에 큰 흥미를 표합니다!」

「야설 빌런의 추종자들이 당신에게 상남자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상남자의 결단은 무슨.

어쨌거나, 나는 지금 리안의 응석을 받아 줄 시간이 없었다.

“미안해. 이번만큼은 가야 할 것 같아.”

내가 하이디를 방치한 지도 어느덧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은 아마 내가 ‘작가’의 농간에 놀아나서 건너뛴 시간 역시도 포함되어 있을 터.

‘잠깐.’

‘작가’라고?

그와 함께 머릿속에 합리적인 의심이 깃들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더 이상 하이디를 찾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

“아자토스.”

[끼이잇!]

내 부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아자토스가 내 의도를 읽기라도 한 건지 조금도 지체 없이 내 전신을 감쌌다.

내가 말만 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곳을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가지 마.”

작게 울려 퍼진 리안의 갈라진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물기가 뚝뚝 묻어 나왔다.

“또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려고?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감춰져 있던 고개를 든 리안의 얼굴에는 어느새 물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줘.”

* * *

……망할 년이.

디오는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죽일까?’

그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디오는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어느새 그의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에드윈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성검을 만지작거렸다. 그 생각은 거의 실행 직전까지 닿았다.

‘지금?’

그러나 그는 이내 그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를 응시하고 있는 ‘운명’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닥쳐.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해.

디오는 맹렬하게 반발했으나, 실상은 그저 혀끝에서만 맴도는 미약한 외침일 뿐이었다. 이미 겪었듯이 이제 디오는 스스로가 결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전력으로 행동했다. 그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운명을 속이기 위해서.

“……둘이라.”

갑작스러운 에드윈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베른은 그저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로 손에 들린 쟁기로 땅을 짚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재미있지.”

“거기 아저씨, 허세 부리지 마시죠?”

어느새 양손에 화염구를 만들어 낸 에드윈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죽거리자, 베른이 여전히 사나운 미소로 그 이죽거림에 맞섰다.

“허세라…… 재미있는데? 이봐, 너도 그렇게 생각해?”

베른이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옮겨진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디오였다.

마치 고요한 바다를 보는 듯한 그 시선에, 디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읽었나.’

디오는 자신의 망설임이 어느새 베른에게 읽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베른의 눈치가 초월적으로 빠른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역시도 같은 ‘용사의 운명’을 겪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기에 디오는 말했다.

“이제 용사도 아닌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같은 용사’인 그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래, 그렇겠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베른의 모습에 디오 역시도 그에게 그가 지었던 사나운 미소를 흉내 내며 웃었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그 시끄럽기 짝이 없는 지적에 디오는 성검 다이베른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더없이 무겁고 진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정정당당’히 상대해 주지.”

디오의 말에 베른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거 고마운데? 감사의 뜻으로 네 묘비에 그에 대한 감사 인사 정도는 남겨 주지.”

“할 수 있다면 해 봐.”

그렇게 말하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디오가 에드윈에게 물러나라고 턱짓하자, 이에 에드윈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헐…… 뭐야 방금? 설마 나보고 빠지라고?”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군. 생각보다는 눈치가 영 없지 않아서.”

“미쳤어? 도와준다니까? 아까 보니까 답지 않게 쩔쩔매던데.”

“정정당당히라고 말했을 텐데.”

디오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에드윈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디오라는 존재는 트라우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됐어. 뒈지든지 말든지.”

에드윈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났으나, 여전히 전투태세를 풀지 않은 모습으로 보아 디오가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다시 참전할 듯했다.

디오 역시도 그녀의 그런 행동까지 저지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어느새 자신의 앞에서 쟁기를 들고 서 있는 베른을 응시했다.

베른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질리도록 경고했을 거다. 운명에 먹히지 말라고. 그런데 지금 네 꼴이 이게 뭐냐?”

답지 않게 선배 노릇이라도 하려는 건가.

디오는 그러한 베른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잘난 척 떠들기는. 당신 ‘일’이나 똑바로 해.”

디오가 ‘일’에 악센트를 주어서 말했다. 그러자 베른이 껄껄 웃었다.

“일이라…… 그것도 좋겠지. 그런데 우선 내 말 좀 들어보지 않겠어?”

그리고는 이내 더없이 익숙한 첫마디를 내뱉었다.

마치 그의 숙적이 그랬던 것처럼.

“그거 알아?”

베른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번졌다.

* * *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모르겠다. 시간에 대해서 그 어떤 감각도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는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물기가 가득 묻은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불쾌하고, 또 축축하다. 그러나 그 불쾌하기 짝이 없는 축축함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아직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곳은 나만의 성이고, 나만의 요람이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원히.」

「그녀는 조심스럽게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의식을 떠내려 보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형체를 보았다.」

「“…….”」

「검은 형체는 웃고 있다. 또 울고 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다. 바로 자신의 얼굴. 그러나 울고 있는 얼굴과 웃고 있는 얼굴. 그중에서 무엇이 자신의 얼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검은 형체와 마주 보며 마치 새끼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검은 형체가 그녀를 점차 삼켜 갔다. 그러나 그녀는 반항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나를 바라보지 않아.」

「나를 바라지 않아.」

「나를 불러 줘.」

「없어져 가.」

「살려 줘.」

「제발.」

「반.」

「…….」

「고요하다. 그녀는 죽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내 죽음조차 넘어선 완전한 소멸을 느낀다. 사라져 가는 그녀의 앞에 이용당하고, 버려진, 비참하고 비루한 그녀의 운명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의 삶은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인지 모르게, 더없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가.」

「…….」

「뭐야?」

「누구야?」

「누구냐니까?」

「네가 나라고?」

「……웃기지 마.」

「내가 속을 것 같아?」

「그딴 말, 나는 안 믿어.」

「필사적으로 악을 쓰는 그녀의 모습에, 거울 속에 비친 검은 형체마저도 그녀를 향해 마치 안쓰럽다는 듯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그 동정 어린 시선에 그녀는 또다시 울컥한다. 나를 그렇게 바라보지 마. 나를 동정하지 마. 그리고 그녀를 깨닫는다. 이제 그녀를 바라봐 주는 것은, 오직 한 존재뿐이라는 것을.」

「“……아.”」

「마치 눈이 타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과 함께 하이디는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침실의 풍경이 보였다. 그것은 그저 짧은 악몽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공포와 외로움으로 찌든 뇌가 보여 준 환각. 그러나 그녀는 그 환각에 불과할 터인 악몽 속에서 이미 한번 진정한 의미의 죽음을 경험했다.」

「“아하하…….”」

「그녀는 웃었다.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은 악몽에서 보았던 것처럼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아하하하……!”」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이제는 자신이 미쳐 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입을 벌려서 비명을 지른다. 아아아.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달려와서 왜 그러냐고 보듬어 주지 않는다. 그 비명은 오직 그녀가 미쳐 가고 있음을 표현할 뿐, 그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는다. 오직 한 존재만 빼고.」

「[바라는가?]」

「거울 속에 비친 그녀가 물었다. 이전에는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질문. 그러나 하이디는 이제 그 질문에 조금도 망설임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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