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Chapter 29: 개연성 (6)
“가지 마…… 이렇게 또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마.”
그리고는 리안의 얼굴에서 살며시 떨어져 내리는 작은 물방울.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독자들이 마치 간만에 먹잇감을 찾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일부 독자가 이대로 가 버리면 인간도 아니라며 당신의 인성을 시험합니다!」
「야설 빌런이 눈을 크게 뜨며 당신의 대답을 기대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라면 충분히…… 아이 엠 나뭇가지를 선언합니다!」
……아주 그냥 뼈 사이사이도 발라 먹어라.
그러나 그런 맹렬한 반응 속에서도, 어차피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가야 해.”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매정한 선택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쓰레기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며 동지애를 느낍니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하이디를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기묘한 꺼림칙함.
마치 내가 무엇인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간다고?”
“그래.”
“결국…… 또 그 여자를 선택하는구나.”
그 순간.
스스로조차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리안의 얼굴이 더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리안?”
“그렇게 부르지 마. 처음부터 불러주지 않을 거라면, 아예 부르지도 마.”
조금 전까지 울먹거리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
그녀는 리안이 아니다.
“너 누구야.”
그와 함께 그녀의 표정이 어느새 환하게 물들었다.
더없이 환한 미소였지만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의는 결코 내가 알고 있던 리안이 아니었다.
“이제야 궁금해졌어?”
「다수의 독자가 갑작스럽게 변모한 ‘리안’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함정인가?
아니,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했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 나는 그녀를 완벽하게 ‘일황녀 리안’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이 뻔한 세계에서 나를 속일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 세계를 질릴 정도로 겪어 보았던 나였기에 확신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개연성]이 스스로 복원을 개시한 이후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갑작스럽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 변화에 적응해야만 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자는 결국 도태될 뿐이다. 그래, 내가 그토록 욕하던 뻔한 클리셰 덩어리처럼.
‘……잠깐.’
그와 함께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가능성.
그 가능성은 다름 아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의 변화에 대해서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너…… 리안이 맞구나.”
“관점이 틀렸어.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야. 네가 버린 그 여자는 이미 이곳에 없어.”
그리고는 리안이 여전히 악의로 물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
마치 조롱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미 늦었다는 거.”
무엇이 늦었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리안을 찾는 것이 늦었다는 건지, 아니면 하이디를 찾는 것이 늦었다는 건지.
아니면 두 가지 전부 다인지.
그러나 그녀 덕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작가 놈이 나 몰래 지금껏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누구를 만났지?”
그녀는 만났을 것이다.
나는 아직 모르는 작가 놈의 또 다른 얼굴을.
그리고 그 유혹에 결국 넘어간 것이고.
“글쎄?”
리안은 그저 그렇게 웃었다.
이 세계에서의 [비중]은 곧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 [비중]이 없는 인물은 사라지며, 그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기에 리안은 선택한 것이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단지 그녀뿐이었다면 이 상황도 조금은 위안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이디는 어떻게 됐지?”
“흐응, 그 여자도 버렸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걸까.
둘 중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쿡쿡…… 이제 너도…….”
마치 저주처럼 시작된 그 말은 그녀로서는 유감스럽게도 끝 맞춰지지 못했다.
“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갑작스럽게 그녀의 위에서 나타난 무엇인가가 그녀를 깔고 앉았기 때문이었다.
「다수의 독자가 갑작스럽게 ‘리안’을 [참교육]한 정체불명의 인물에 주목합니다!」
「당신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뜬금없는 상황에 탄산 빠진 사이다를 표합니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미안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꼬장꼬장한 목소리였다.
“아이고 미안해라. 밑에 괜찮나?”
세상사 모든 불만을 혼자서 짊어지기라도 했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꼬장꼬장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
그런 얼굴을 한 남자는 내가 알기로 오직 한 명뿐이었다.
“……베른?”
베른은 자신이 깔고 앉은 사람의 정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는지 눈길 한번조차도 주지 않고는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야.”
살짝 시선을 돌려보니, 어느새 나를 소환했던 마법진에서 기묘한 빛이 발하고 있었다.
즉, 지금 나타난 저 낯짝은 저 마법진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눈앞에 나타난 꼬장꼬장한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그것도 저기에서?”
“뭐…… 누구 흉내를 좀 내봤는데, 썩 괜찮지?”
그렇게 멋쩍게 웃어 보인 베른의 옆구리에는 어딘가 익숙한 짐 덩이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혹시 그건…….”
“어, 맞아.”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어 보인 베른이 그 짐 덩이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짐짝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가 봤다면 기겁할 만한 장면이었다.
“어이, 일어나.”
그렇게 떼구루루 구른 ‘짐짝’이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눈가를 부르르 떨었다.
“……여기는?”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눈을 뜨자 나는 왜인지 모를 이질감과 익숙함을 함께 느꼈다.
“당신들은……?”
그녀가 그렇게 묻자 베른이 피식 웃었다.
“장난칠 시간 없어. 나는 너에게 볼일이 있다. 마왕.”
“……마왕이라뇨?”
“그래, 항상 이런 식이지. 좋게 말로 해서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지.”
베른이 사납게 웃으며 쟁기를 꺼내 들자, 내가 그를 제지했다.
“잠깐만요.”
“왜?”
“무언가 달라요.”
“뭐가?”
“보세요.”
내가 가리킨 것은 그녀의 눈동자였다.
예전에 봤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 눈동자는, 마치 그녀의 본래 인격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런 확신에 쐐기를 박듯이 이내 그녀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그렇게 말하려던 베른의 표정이 살며시 굳었다. 그 역시도 서쪽의 마왕에게 일어난 몇 가지 이변을 목격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른이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디오는?”
“내 질문에 대답해라. 전대 마왕에 대해서 알고 있나?”
“디오는 어디에 있어?”
예전의 ‘마왕’이었다면 결단코 보이지 않았을 맹렬한 반응에 베른은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이 결코 싸구려 연기 따위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빌어먹을…… 유일한 단서였는데.”
키리엘.
그 육체의 본래 주인이, 되돌아온 것이다.
* * *
디오는 허탈한 눈으로 베른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저 몇 마디의 말.
그러나 그 효과는 지대했고, 이내 베른은 순식간에 마왕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갔다.
“어이가 없군.”
설마 이런 식의 발상을 ‘녀석’이 아닌 다른 자가 할 줄이야. 정말로 꿈에도 몰랐다.
디오가 그렇게 쓴웃음을 짓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에드윈이 이죽거렸다.
“혼자서 충분하다더니 코앞에서 놓쳤네? 꼴이 아주 볼만해~”
“마음대로 떠들어라. 그 주딩이가 내일 아침까지도 무사히 붙어 있기를 바란다면.”
“웁스.”
애초에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디오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이건만, 그 내막을 모르는 에드윈의 표정은 마치 자기가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지금 디오에게 있어서는 그런 그녀를 비웃을 여유조차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운명’이 그를 죄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디오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끊임없는 살의가 그의 머리에 들끓었다.
“닥…… 쳐.”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에드윈이 살짝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디오의 손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움켜쥐었다.
“닥치라고 했다.”
“커, 컥!”
디오는 애써 이성을 찾아보려 했으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새롭게 죽여야 할 대상이 떠올라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에 실패하였습니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서브 시나리오]가 발동합니다!」
「고요한 산맥의 지배자, 산적왕 카밀라를 처치하시오.」
“끄윽…….”
에드윈이 스킬까지 써 가면서 발버둥 치자 디오는 그녀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꺅!”
그리고는 디오의 눈에 어느새 붉은색 안광이 깃들었다.
“산적왕…… 카밀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는 그저 죽여야 할 [악]에 불과했으니.
디오가 쓰러져 있는 에드윈을 향해서 말했다.
“따라오지 마라.”
어차피 앞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은 수라의 길이다. 더 이상 타인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이라도 한 건지 에드윈이 선명한 손자국이 남은 목을 어루만지며 외쳤다.
“누가 너 같은 사이코 새끼를…… 따라갈 거야!”
“……말이 앞뒤가 안 맞는데.”
“내 마음이야!”
“죽을 거다.”
디오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결코 농담이나, 협잡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누, 누가 그렇게 말하면 쫄기라도 할 줄 알고?”
제법 의기양양한 외침이었으나 그 목소리의 떨림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디오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협박 따위로 들렸나?”
디오는 이제 용사의 곁에 있는 이가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베른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도 늘 같았다.
용사의 곁에서 끊임없이 악에 노출된 그 희생양은 위선뿐인 용사의 무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낸다.
마왕이라는, 악의 군집체를.
디오는 더 이상 그따위 결말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한 것이다.
정말로 따라올 것이라면 죽음을 각오하라고.
그러나 들려온 것은 조금 전의 겁먹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숨 따위는, 이미 진작 걸었어.”
그렇게 말한 에드윈의 눈동자는 어딘가 공허했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어디로 사라진 지 모를 옛 동료?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그러나 디오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어차피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했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그런 그의 귓가에 작은 조롱 소리가 들려온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는, 운명의 조롱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