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Chapter 30: 서브 시나리오 (1)
지금 상황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그래,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설명해! 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어느새 꽁꽁 묶인 채로 아등바등하고 있는 키리엘의 모습.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는지, 마왕의 힘을 사용하기는커녕 반항다운 반항조차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베른에게 제압된 상태였다.
“이거 풀라고! 도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정정했다.
“굳이 따지자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웃기지 마!”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봐?”
「소수의 독자가 그것도 그러네 하며 머리를 긁적입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그녀의 인격에 덧씌워져 있던 이름 모를 ‘하차자’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이 그 이유였지만, 내가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 리가 만무했다.
안 그래도 상황이 복잡한데 답도 없이 더 꼬이게 만들 수야 있겠는가.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베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사라진 후 도대체 뭘 보고 온 건지,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고민을 일부러 외면했다. 여기서 저 고민까지 더 끼얹었다가는 정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일단, 상황 좀 정리하죠.”
“……어휴.”
베른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내려서 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또 다른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 하나가 어울리지 않게 악을 쓰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익! 비켜!”
“이봐 애송이, 설명 좀 해 봐. 도대체 얘까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베른 역시도 뒤늦게 자신이 깔고 앉았던 것이 리안임을 알고는 당황했으나, 이내 그녀의 상태가 예전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리안 역시도 제압했다.
차라리 끝까지 기절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두고 봐…… 이 수모,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디오는 어디 있어! 나를 놓아 줘. 디오에게 가야 해!”
「다수의 독자가 답도 없는 상황에 대해서 혼란을 표합니다!」
「야설 빌런이 상황이 어떻건 간에 일단 묶어 놓고 보는 당신의 선택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진짜 개노답이다.
“……씨잉.”
그리고는 어느새 리안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 모습을 본 베른이 마음이 약해졌는지, 그녀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내가 이를 제지했다.
“하이디는 어떻게 됐어?”
“또, 또, 그 여자. 그 여자 일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설사 알아도 알려줄 것 같아?”
아니,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하다.
적어도 지금 리안의 상태가 어떤지는 확실해졌으니까.
“뭐야? 하이디는 또 왜?”
베른이 끼어들었으나, 지금은 그에게 일일이 설명이나 해 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리안의 상태는 간단했다.
그녀는 리안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 모순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설정]의 변화.
어느 순간부터 이 소설 내에서의 [비중]이 완전히 사라진 그녀는 더 이상 이 소설 속에서의 그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
즉, 존재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야기 바깥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고, 그런 그녀의 상황을 이용해서 [작가]가 개입했다.
그리고는 보이는 것과 같았다.
“반, 반, 반. 너를 저주해. 네가 미워.”
“그동안 나를 이용하면서 속으로는 얼마나 비웃었어? 순진해 빠진 멍청한 여자를 이용하는 게 그렇게 즐거웠어?”
“꺄하하! 뭐해? 어서 죽이지 않고. 나를 죽여. 아니면 네가 죽어 줘도 좋고.”
……가관이군.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작가에 의해서 [설정]이 변화한 리안의 모습은 극단적이었다.
자신마저 갉아 먹을 정도의 지독한 애증.
그러나 그 모습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었다.
“내가 왜 미운데?”
“네가 나를 버렸으니까.”
“왜 버려졌다고 생각하는데?”
“뭔…… 설마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거야? 그딴 변명이라면 집어치워. 듣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강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나, 그녀가 리안 본인이 맞다면 아직 대화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변명이 아니야.”
내가 강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버린 적 없어. 리안.”
「야설 빌런이 당신의 느끼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주목합니다!」
「모태 솔로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상황 파악 못 하고 일단 지르고 보는 당신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연애학개론 교수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에게 F 학점을 수여합니다!」
……다른 데면 몰라도, 여기서는 이게 맞아, 이놈들아.
“그, 그게 무슨…….”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살며시 붉게 물든 리안의 얼굴.
제아무리 [설정]을 섞고 난리를 쳐 봤자, 그녀는 태생적으로 이 뻔한 세계의 인물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라고 할 줄 알았어?”
……는 줄만 알았다.
이거, 생각보다 까다롭겠는걸.
“네 달콤한 말은 이제 지긋지긋해. 이 쓰레기야.”
「연애학개론 교수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그럴 줄 알았다며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쓰레기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뻔뻔함에 배움을 청합니다!」
그래, 인정한다. 이번은 네가 이겼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모순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데?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를 부른 건 너야.”
“……그건.”
그 순간 리안의 얼굴에 아주 작은 동요가 떠올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동요는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변 때문이었다.
「[서브 시나리오]가 발동합니다!」
「[서브 시나리오]가 발동하여, 해당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등장인물]을 제외한 인물들이 일시적으로 배제됩니다.」
……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
그와 함께, 눈앞에 있던 리안에게서도 이변이 일어났다.
“……아.”
일시적 배제.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리안의 몸이 서서히 흩어져 갔다.
안 된다. 이대로 그녀가 가 버리면 하이디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말해 줘. 하이디는 어디에 있어?”
“……이 상황에서도 그 여자 이야기야? 진짜 쓰레기네.”
이죽거리는 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하이디를 찾고 나면, 너도 찾을 거야.”
「연애학개론 교수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그래도 이 정도면…… 다시는 재수강하지 말라는 의미로 D- 학점을 수여합니다!」
「인싸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럴 때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라며, 당신의 어설픔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쓰레기 같은 대답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어느새 사라져 가던 리안의 눈가가 물기로 촉촉해졌다.
“진짜…… 쓰레기야.”
내가 가볍게 수긍했다.
“알아.”
“……죽여 버리고 싶어.”
그리고는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제 그녀의 모습은 반대편의 배경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투명해져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안이 말했다.
“……그 여자는 이제 찾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단순히 늦었다거나, 포기하라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 여자가 먼저 찾아올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리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이 말 같지도 않은 쓰레기 [시나리오]에서 배제되었을 뿐.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그녀가 있던 자리가 휑하게 느껴졌다.
“……같이 들어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하이디가 너를 찾아온다는 건가?”
침묵을 깬 베른의 말에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래. 어쨌거나 당장 골칫덩이 하나는 사라졌군.”
눈앞에서 리안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이제 그 역시도 이 세계가 만들어 내는 불합리함이 질릴 정도로 익숙해진 듯했다.
“그러면 이제 저건 어떻게 할 거지?”
베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키리엘이었다.
“저, 저건? 내가 무슨 물건이야?”
키리엘이 애써 항변했으나, 베른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싸늘한 무시였다.
“저기요? 제 말 안 들려요?”
그러나 베른의 시선은 오직 나에게로 향해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렇게 쳐다본다고 해서 나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흠.’
생각을 해 보자.
난데없이 등장한 [서브 시나리오].
이것으로 인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해당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등장인물]들을 제외한 인물들의 배제였다.
말하자면, 그 잘난 복원력이 더 이상의 통제되지 않는 변수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베른과 키리엘은 리안처럼 이 [시나리오]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즉, 지금의 우리는 이 [시나리오]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것은 이번 [시나리오]에 한해서지,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기는 했지만.’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말하자면, [개연성]이 복원을 시작하면서 더 이상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클리셰]를 부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졌다는 말이었다.
만약 그런 짓거리를 했다가는 잔뜩 뿔이 난 [개연성]이 나를 또 어디로 던져 버릴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나와 베른은 현재 [주연]급의 [비중]을 가지고 있으니 리안처럼 허무하게 배제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행동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듯이, 그 망할 [복원력]은 우리가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해도 언제든지 이야기 바깥으로 우리를 내쫓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이상, 아예 처음부터 그 행동 방식을 바꾸는 게 옳았다.
“아무래도…… 첫 번째 플랜으로 가야겠네요.”
“갑자기 첫 번째라니?”
첫 번째 플랜.
옛날에 디오를 두 번째로 만났던 그 날, 녀석이 내 예상을 깨고 페론 마탑으로 나를 먼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행했을 방법.
“우리는 이제부터, 용사의 동료가 될 겁니다.”
예전에 내가 주축이 되어서 디오와 잠시 동행했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의 행동 주체는 [주인공]이 아닌 나였고, 당시 우리의 목적은 정식적인 [시나리오] 진행은커녕 창조주의 목을 죄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짓거리는 불가능해졌다.
이제 우리는 철저하게 정해진 길로 갈 것이다.
물론, 그 정해진 길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거지만 말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도, 디오 녀석이 순순히 우리를 받아 줄 것 같지는 않은데?”
맞는 말이다.
지금 디오가 나에게 가진 악감정을 단순한 증오를 넘어섰다.
그러나 그러한 증오마저도 억지로 삼키게 만드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디오가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이를 만나게 해 준다면요?”
“그런 사람이 있어?”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묶여 있는 키리엘을 향했다.
“마침,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거든요.”
그제야 베른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조금 전까지는 골칫덩이에 불과했던 그녀지만, 이제 그녀의 신분은 최고의 교섭 재료로 승격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키리엘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뭐야?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