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Chapter 30: 서브 시나리오 (2)
대충의 목표가 정해지자, 내가 슬쩍 리안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우선, 서브 시나리오에 집중한다.’
리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차피 하이디와는 머지않아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디가 먼저 나를 찾아온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즉, 하이디는 이미 리안과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하이디는 리안과는 달리 무려 [비중]을 가진 [등장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가지고 있던 [비중]을 모조리 잃어 가며 야금야금 자신의 존재를 갉아 먹히는 동안 어떻게 변모했을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리안 때처럼 이야기가 마냥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서브 시나리오에 참여하기 전에 해 둬야 할 일이 있었다.
“아자토스.”
어느 순간부터 얼굴이 보이지 않고 있는 또 다른 [공기]의 존재.
그게 누구인지는 뻔했다.
나는 이제 했던 실수를 또 범할 생각이 없었다.
[끼잇!]
내 부름에 그 모습을 드러낸 아자토스를 향해서, 내가 명령했다.
“루를 찾아와.”
만약 내가 이대로 하이디를 찾는 데만 신경이 쓰여서 은근슬쩍 루에 대해서 잊는다면, 이는 사실상 본말전도에 가까웠다.
그렇게 되면 작가는 또 루를 이용해서 하이디와 똑같은 개수작을 부렸을 테고, 이야기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한두 번도 아니고 더 이상 내가 그런 수작질을 용납할 리가 있겠는가.
“어딜 똑같은 패턴으로 날로 먹으려 해.”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내로남불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 주는 당신의 뻔뻔함에 감탄합니다!」
「저세상 칼럼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그치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반쿤…… 나를 봐주지 않는 걸!” 라며 저세상 클리셰를 시전합니다!」
「물귀신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걸 나만 볼 수는 없다며, ‘저세상 칼럼니스트’의 댓글을 추천합니다!」
……진짜 저세상에 보내 버리고 싶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츤데레] 성향이 증가합니다!」
……어딜 봐서?
분명히 [개연성]은 어떻게든 제 자리를 찾으려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어째 이 녀석들은 날이 갈수록 더 미쳐 가는 것 같다.
더 이상 상대해 봤자 나만 미친놈 될 것 같으니 애써 이어지는 메시지들은 그대로 무시했다.
“반.”
그때 베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격하게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왜요?”
“그러니까…… 흠흠.”
답지 않게 답답하게 구는 모습에 무언가 심각한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 가고 싶다는데?”
베른의 시선이 살며시 묶여 있는 키리엘을 향했다.
그런 문제였나.
“……풀어 줘요.”
어차피 지금의 그녀라면 도망쳐 봤자 금방 잡힌다.
그렇게 풀려난 키리엘의 시선에서 어째서인지 경멸이 가득 느껴졌다.
“너…….”
“왜?”
“……두고 봐.”
그렇게 말하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왜 저래?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키리엘이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전혀 이해를 못 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옛날 일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도 않고.
「야설 빌런이 예상치 못한 업계 포상에 환호합니다!」
「야설 빌런의 추종자들이 그 의견에 맹렬하게 동의합니다!」
……미친놈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한 내가 병신이지.
‘그나저나……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거지?’
지금까지 마왕의 인격을 대행했던 ‘하차자’.
이름조차도 모르는 그 여자는, [개연성]이 복원을 시작한 이후에 너무나도 어이없게 사라져 버렸다.
‘돌아간 건가? 아니면…… 아직도 키리엘의 안에?’
그녀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으로 인해서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작가에 의해서 변해 버린 [설정]을, 어쩌면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반.”
베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볼일은 다 끝났는지 베른과 키리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디오를 만나러 가죠.”
“……뭐?”
내 말에 놀랐는지, 키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내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이 소리 질렀다.
“서, 설마 나를 인질로 삼아서 디오를 협박하려고……?”
제법 예리한데.
“비슷한데, 그건 아니야.”
“……그러면?”
내가 웃으며 말했다.
“너를 인질로 삼아서, 디오를 협박할 거야.”
* * *
고요한 산맥.
서쪽 마왕의 영토와 제국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험준한 지형과 마왕의 영토와 제국 사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서 사실상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산맥의 지배자는 다름이 아닌 산적이었다.
산적왕 카밀라.
일개 산적에 불과했던 그녀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힘으로 어느새 고요한 산맥 일대를 장악해서 스스로 산적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썩어 빠진 세계를 너무나도 증오한 그녀는 결국 이 세계를 침략한 어느 침략자의 손을 붙잡았고, 그의 충실한 수족이 되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먼지로 되돌리고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했다.
그 누구도 배를 곯지 않는 세상.
그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세상.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용사의 목표가 되었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디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요한 산맥이 이제 멀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운명’만 수행하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두통도 멎으리라.
“야! 아니, 디오! 그런데 갑자기 산적은 왜 잡겠다는 건데?”
뒤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디오는 굳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에, 철저한 무시로 일관했다.
“허, 참…….”
에드윈은 어이없다는 듯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여전히 잠잠한 길드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아무나…… 대답 좀 해라.”
그녀는 그렇게 혼자서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디오의 뒤를 따라서 쫄래쫄래 뛰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고요한 산맥에 들어섰다고 느낀 순간, 그녀보다 앞서가던 디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멍하니 걷던 에드윈이 디오의 강철 같은 등판에 코를 박고는 짜증을 냈다.
“악! 뭐야? 갑자기 왜 멈춰?”
“마침 잘 됐군.”
“뭐가?”
그러나 디오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을 응시했을 뿐.
“그림 좋은데.”
디오의 시선 끝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나타난 열 명가량의 산적들이 어느새 디오와 에드윈의 주위를 포위했다.
그중에서 가장 앞에 선 사내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어디로 가시는 길이신지? 유감스럽게도, 여기부터는 통행료를 받고 있습니다만.”
“통행료라.”
디오가 웃었다.
“좋지.”
“이야기가 통하시는 분이라 기쁘군요. 남성 한 분에 여성 한 분이시니, 제국 금화 다섯 개만 받겠습니다. 저희도 상도덕을 알거든요.”
고작 통행료 따위에 붙이기에는 지독할 정도의 폭리였으나, 디오는 여전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쉽게도 지금 돈이 없군. 다른 것으로도 받나?”
“물론입니다. 저희는 현물의 가치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거든요. 어디 한 번 볼까요?”
사내가 웃으며 다가온 순간, 섬광이 번뜩였다.
“……어?”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어느새 떨어져 내린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셈이 됐나?”
“이, 이 미친…… 끄아악!”
순식간에 오른팔이 잘려 나간 사내의 모습에 이를 지켜보던 산적들에게서 험한 욕이 터져 나왔다.
“이 개새끼가!”
“쳐!”
“통행료가 부족했나 보군.”
그리고는 디오의 검이 또다시 번뜩이자, 이번에는 산적 셋의 목이 차례대로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도, 도망가!”
비록 첫 판단은 오판이었으나, 지금 상황에서까지 목을 내밀만큼 산적들은 미련하지 않았다.
디오가 ‘값’으로 치러진 머리 세 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충분했나 보군.”
디오는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일부러 이 정도로 판을 벌여 놓았으니, 그런 고생은 할 필요도 없이 그쪽에서 알아서 찾아올 터였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땅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고요한 산맥에 울려 퍼졌다.
쿠웅-!
쿠우웅-!
그리고 그 진동은 점차 가까워졌다.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이가 왔음을 깨달은 디오가 성검을 뽑아 들고는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감-히!”
도저히 사람이 내질렀다고는 믿기지 않는, 말 그대로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
산맥에 늘어선 나무가 들썩이고, 에드윈이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으나 디오는 고통스러운 기색은커녕 오히려 더 귀를 기울였다.
그 포효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왔군.”
디오의 말과 함께,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기둥 하나가 그를 향해서 쇄도했다.
부웅-!
디오가 성검의 날을 세우자 그를 향해서 달려든 아름드리나무 기둥이 통짜로 잘려 나갔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당황했는지 나무 기둥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걸 통째로 잘라 버리다니…… 너, 정체가 뭐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산적왕 카밀라의 모습은, 디오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온몸에 드러난 터질듯한 근육과 맹수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눈빛.
그러나 디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다른 것보다 무엇인가 이질감을 먼저 느꼈다.
단순한 악이 아니다.
더없이 이질적이지만, 또한 익숙하다.
그것은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를 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 저건 마치…….
“아인즈 반과는 무슨 관계지?”
산적왕 카밀라의 눈빛에 잠시나마 동요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사나운 미소로 그 동요를 지웠다.
“네놈이 알 것 없는데? 젖비린내 나는 애송아.”
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 입에서 제발 말하고 싶다고 애원이 나오게 만들어 주지.”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시끄러워.”
어차피 결국 그렇게 할 거니까, 일단 닥치고 좀 있어.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산적왕, 카밀라를 처치하시오!」
「어긋난 [개연성]을 바로잡으시오!」
디오가 표정을 찌푸리며 카밀라의 팔을 거두려던 순간이었다.
파지직-!
작게 일어난 스파크.
그러나 그 현상은 이미 디오가 질리도록 경험했던 현상 중 하나였다.
“뭐, 뭐야?”
카밀라 역시도 이런 현상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함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디오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 현상은 너무나도 익숙했고, 또 진절머리가 났다.
「[개연성 무시]가 발동하였습니다!」
“……또냐.”
그리고는 스파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소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방해할 셈이냐.”
디오가 어느새 증오로 가득 물든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인즈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