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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34화 (134/164)

◈ 134화 Chapter 30: 서브 시나리오 (3)

어째 오자마자 환영이 조금 거친걸.

“잘 지냈지?”

나름대로 친해지려고 한 인사건만 디오에게서는 여전한 살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죽고 싶어서 알아서 찾아왔군.”

“꼭 그렇지만도 않고.”

“일단 그 혀부터 뽑아주지.”

“그러지 말고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보는 건 어때? 제법 괜찮은 이야기일 텐데.”

“네 시체에 대고 물어볼 생각이라면 조금 있다. 곧 그렇게 만들어 주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당연히 내가 그에 대한 준비도 없이 여기에 기어 왔을 리가 없었다.

“일단 들어보면 마음이 바뀔걸?”

“네놈의 세 치 혀에 내가 이번에도 놀아날 것 같나?”

“응.”

“……죽여주지.”

어째 녀석과의 대화도 이쯤 되면 원 패턴이 아닌가 싶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내가 공략할 부분도, 바로 그 변하지 않는 [주인공]의 뻔한 부분이었으니까.

“키리엘을 만나고 싶지?”

그 순간 나를 향해서 뻗어 오던 디오의 검이 멈춰 섰다.

“……뭐?”

“내가, 그녀를 만나게 해 주지.”

“나는 또 무슨 얘기라고…… 웃기지 마라. 마왕을 얘기하는 거라면…….”

“마왕이 아니야.”

“……그게 무슨 얘기냐.”

이제야 제대로 얘기를 들어주시는군.

“내가 말했잖아? ‘마왕’이 아니라, ‘키리엘’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얘기……!”

명백하게 동요를 머금은 디오의 표정.

이제 녀석은 내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동료로 삼아라.”

그리고는 속삭인다.

디오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그렇게 하면, 키리엘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지. 마왕이 아닌, 네가 알고 있던 그녀를.”

* * *

그리고 들려온 것은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래, 어디까지나 얼핏 듣기에는 말이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디오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그의 눈동자는 예전에는 없던 동요로 가득 물든 지 오래였다.

“그래? 그러면 키리엘에게는 안 됐다고 전해 줘야겠네. 유감이지만, 디오가 너를 버렸다고.”

“너…….”

「다수의 독자가 뻔뻔하게 인질극을 벌이는 당신의 모습에 혀를 내두릅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이럴 줄 알았다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당신의 인성에 또다시 감탄합니다!」

이왕 버린 몸. 더 사릴 것도 없었다.

내가 최대한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래?”

“이 새끼가……!”

드디어 쌍욕까지 나오는 것을 보니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자, 이제 쐐기를 박을 때였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잖아? 만약 내 말이 거짓이라면, 너는 그대로 내 제안을 없었던 셈 치면 되는 거야. 안 그래?”

“……내가 또 속을 것 같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 번 낚인 놈은 두 번도 낚인다.

“어.”

내가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잘난 [개연성]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망할 고구마 덩어리도, 원래의 호구로 돌아왔다는 뜻이었으니까.

“당장 죽여…….”

그 순간, 디오가 갑자기 자기 머리를 쥐어 잡고서 신음했다.

“……끄윽!”

그리고는 마치 미친놈처럼 혼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닥쳐! 닥쳐!”

……얼씨구야.

물론, 어떻게 된 건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개연성]이 [주인공]에게 [서사]의 이행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개연성]이 [주인공]에게 [서사]의 이행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개연성]이 [주인공]에게 [서사]의 이행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개연성]이 저 난리를 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비록 대부분 내가 원인이기는 했지만, 변해도 너무 변해 버린 디오는 더 이상 [주인공]으로 써먹기에는 안 맞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말하자면, 뒤늦은 인성 교정인 셈이었다.

“……아인즈 반.”

간신히 고개를 든 디오의 얼굴은 진이 다 빠진 듯 고개를 드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네 거래에, 응하겠다.”

“잘 생각했어.”

“그러면 이제 키리엘을…….”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어.”

어떻게 보면, 이게 내 진짜 목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뭐? 네놈, 또 같잖은 수작을 부리려는 거라면…….”

“그게 아니야.”

“……그러면 뭐지?”

내가 슬쩍 시선을 옮겨서 저 멀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카밀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산적왕을 해치지 마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악을 배제하는 것은 용사의 의무다. 네가 끼어들 사항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순간부터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정말로 악인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생각해 봐. 산적왕 카밀라가 정말로 악인이었다면, 이 많은 사람이 그녀를 따르고 있을까?”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악이 악을 따르는 게 어쨌다는 거지? 쓰레기가 모여 있으면, 한꺼번에 치워야 하는 법이다.”

“정말 그럴까?”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이미 디오는 내 페이스에 말린 지 오래였다.

“그녀를 포함해서, 이들은 그저 시대가 만들어 낸 희생자에 불과해. 썩어 버린 제국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강하지도, 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정도로 타락하지도 않은 자들. 그저 살아남기만을 바라서 고요한 산맥까지 도망쳐 온 이들. 과연 네가 이들을 함부로 악이라 치부할 자격이 있을까?”

「상당수의 독자가 또다시 시작된 당신의 개소리에 주목합니다!」

「철학과 학부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여전히 되는대로 지껄이는 당신의 궤변에 작은 흥미를 표합니다!」

“그렇다면 그 ‘악’은 누가 정하지? 잘나디잘난 네 용사의 눈이?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겠다는 네 오만함? 디오. 잘 생각해. 그들은 그저 시대가 낳은 약자였을 뿐이야.”

“또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잘도……!”

그러나 디오는 그 이상 항변하지 못했다.

내가 한 말은 분명한 궤변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디오가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고민이기도 했을 테니까.

「[서브 시나리오]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웃기지…… 웃기지 마라.”

디오의 몸이 비틀거렸다. 비틀대던 그를 부축한 것은 다름 아닌 어느새 살며시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는 산적왕 카밀라였다.

“베고 싶다면 베라.”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하지만, 내 부하들은 살려다오.”

산적왕 카밀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목을 내밀었다.

그 순간, 다른 산적들이 들고 일어섰다.

“두목님!”

“아, 안 됩니다! 두목님이 죽으면 저희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놈! 차라리 나를 죽여라!”

“아니다. 나를 죽여라!”

「다수의 독자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신파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연극학과 학부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산적들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눈물 연기를 지적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이긴 했으나, 어쨌거나 큰 상황 자체는 결국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디오의 앞에 서서 말했다.

“선택해라, 디오.”

당연히 이렇게 말하면 저 녀석의 성격상 어영부영 시간만 끌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사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키리엘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지키겠다.”

“뭐……?”

“산적왕을 죽이든지 말든지. 네가 선택하라는 말이다.”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그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디오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나는…….”

「[서브 시나리오]의 균열이 점차 번져 갑니다!」

「[개연성]이 해당 [서사]를 강하게 주시합니다!」

어디선가 나를 내쫓기 위해서 [개연성]이 눈알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으나, 어차피 디오가 무엇을 선택할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이지 않겠다.”

「[서브 시나리오]가 파괴됩니다!」

“두목님!”

“도대체 어쩌려고……!”

그와 함께 산적들이 환호하며 카밀라에게 달려들었다. 카밀라는 머쓱한 표정으로 디오와 나를 훑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겠습니다.”

카밀라의 선언에, 어렵게 불살(不殺)을 선언한 디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아마 그 선언과 함께 그를 괴롭히던 [개연성]의 외침이 조금은 줄어들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도록.”

「다수의 독자가 어딘가 엉성한 결말에 찝찝함을 표합니다!」

「상당수의 독자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마무리에 노잼을 표합니다!」

「철학과 학부생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재미가 없으니 교훈이라도 있을 거라며 무언가를 찾아보려 했지만, 허탕을 치고는 매우 분개합니다!」

독자들이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했다.

[서브 시나리오]의 파괴로 인해서 이번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재미도, 감동도, 심지어 교훈마저도 없는 에피소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의도한 바였다.

「[서브 시나리오]가 파괴되어,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39.8%」

일찍이 내가 본래의 계획대로 ‘용사의 동료’가 되었다면 하려고 했던 일.

그것은 바로 지금처럼 디오의 곁에서 온갖 [시나리오]에 훼방을 놓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유능한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몸소 증명할 생각이었다.

“……무언가 찝찝하군.”

“기분 탓이야.”

“약속은 언제 지킬 셈이지?”

“이것만 끝나고.”

내가 디오의 말에 그렇게 대답해 주고는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에게서 ‘고의 트롤’의 정황을 포착합니다!」

짜식, 역시 눈치가 제법인데.

어차피 적당히 눈치를 채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이미 나는 공식적으로 ‘용사의 동료’로서 인정을 받았고, [개연성]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더 이상 제멋대로 나를 [시나리오] 바깥으로 내쫓지는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내가 이 세계에 날리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그리고 그 대답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다가왔다.

「이야기의 [서사]가 붕괴하여, 클리셰가 추가적으로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41.3%」

「[클리셰 붕괴율]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재해’의 출현 빈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클리셰 붕괴율]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개연성]이 자동 복원을 더욱 강하게 발동합니다!」

「[개연성의 사도]들에 대한 제약이 일부 약화 됩니다!」

「강력한 제약에서 풀려난 [개연성의 사도]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개연성의 사도라.

그에 대해서 생각하니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명확할 정도로 떠올랐다.

‘마왕 므.’

어쩌면…… 리안과 하이디까지도.

아직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있었다.

이제 그들이, 날 찾아올 것이다.

* * *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여느 때와는 명백히 다른, 무척이나 상쾌한 아침이었다.」

「“읏차.”」

「침대를 벗어난 그녀는 슬쩍 화장대 위에 놓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했던 그녀의 모든 것들은 이제 너무나도 선명한 빛깔을 뽐냈다. 그녀는 더는 자신이 사라질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음음~”」

「절로 나오는 콧노래. 이렇게 깊이 잠들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흥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메뉴는 무엇일까요~”」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다는 절망감에 허덕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찾아오던 악몽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를 찾았고, 이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아침 식사를 마친 그녀는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는 다시 화장대 앞에 섰다. 오늘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예쁘게 하고 가야 하는데.”」

「예쁘게, 더 예쁘게. 입술에 바른 립스틱이 유난히 번들거리는 게 영 거슬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제 그는 나만 바라볼 테니까.」

「“음, 좋아.”」

「하이디는 조금 전에 뿌린 라벤더 향을 느끼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향해서 말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서였다.」

「“아무 데도 못 가.”」

「하이디의 눈동자에서 살며시 누군가가 비쳤다.」

「“늘 나와 함께 있을 거야.”」

「그리고는 마치 주문처럼 그것을 속삭인다.」

「“영원히.”」

「거울 속의 그녀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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