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Chapter 31: 현실과 공상의 악마 (3)
그딴 식으로 나오겠다면, 나도 이딴 식으로 나갈 수밖에.
“그렇다면 이제부터 알려줄게. 내가 누군지.”
[건방진.]
그와 함께 현실과 공상의 악마에게서 정체 모를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힘.
[감히 창조주에게 반역을 든 죄, 존재의 소멸로 벌하리라.]
그와 함께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들이 슈뢰딩거의 전신을 감돌며 주위의 공간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얼씨구야.
이제야 감이 온다. 녀석이 사용하는 힘이 대충 무엇인지.
“창조주는 무슨.”
사용하는 힘도 그렇고, 말하는 게 꼭 누구를 닮은 걸 보니 아마 공략법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물 안에서 신 노릇 하니까 좋냐?”
[한낱 데이터 쪼가리가 감히.]
거봐라.
그나저나…… 내가 여기에 들어온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용사 파티’의 나머지 일행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슈뢰딩거가 어떤 수작을 부린 모양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우리 일행은 어디에 있어?”
「프로불편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그런 뻔뻔한 질문에 어떤 머저리가 대답해 주냐며 당신의 발언을 지적합니다!」
짜식, 아직 이 동네를 모르는구만.
아니나 다를까, 슈뢰딩거가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쉬운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미련한 것. 이곳은 내가 통제하는 공간. 너희들은 영원히 허무 속을 헤매리라.]
「프로불편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예상을 뛰어넘는 머저리의 등장에 경악합니다!」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어서 와, 여기는 처음이지?’라며 프로불편러를 반깁니다!」
“그래? 친절하기도 하지.”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슈뢰딩거의 저 친절 아닌 친절이 정말로 고마웠다.
슈뢰딩거 덕분에 나는 지금,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이만 사라져라.]
슈뢰딩거의 손짓과 함께 내 몸이 서서히 0과 1의 데이터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이제 쓸모없어진 데이터를 삭제라도 하듯이.
눈앞이 서서히 심연과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고, 느껴지던 감각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다.
작다. 너무나도 작다.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지금 나를 가둔 세계는 이토록 작았다.
“성격도 급하기는.”
[살려 달라고 빌어 봤자 소용없다. 불경하게도 나를 찾아낸 순간부터, 너희에게 미래는 없었으니.]
나도 모르게 반쯤 사라진 입가가 씰룩였다.
우습다. 너무나도 우습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것이었다.
“아까 나보고 데이터 쪼가리라고 했었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슈뢰딩거 역시도 느꼈는지, 그가 웃으며 흩어져 가는 내 몸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녀석은 아직 모르고 있다. 이곳이 어떤 곳이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제, 그걸 알려줄 차례였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한낱 문자 쪼가리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뭐긴.”
당연히 돈지랄이지.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500G]가 소요됩니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짜릿한 돈맛.
그와 함께 흩어져 가던 내 몸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무슨 짓을…….]
“역시 사람은 쓰면서 살아야 한다니까. 아끼다 똥 된다는 말도 있잖아?”
순식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온 내 모습에 슈뢰딩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돼!]
“돼.”
「일부 독자가 당신의 단호함에 박장대소합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개연성]을 대놓고 위반하는 [개연성 무시]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 복원력]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개연성 무시]가 [강제 복원력]보다 더 강력하거나, 아니면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길 바라는 [강제 복원력]이 일부러 이를 묵인했거나.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상황에는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만 꺼져.”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필요로 하는 [개연성 무시] 등급이 부족하여, [4,500G]가 추가로 소요됩니다!」
「[5,000G]가 소요됩니다.」
그와 함께, 슈뢰딩거의 몸이 서서히 떠오른 문자들에 파먹히기 시작했다.
「사라진다. 사라져라. 죽는다. 죽어 간다. 없어진다. 없어지고 있다. 없어져 간다.」
‘소멸’을 의미하는 수많은 문장이, 슈뢰딩거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곳은 소설 속.
그곳에서 제아무리 잘난 감투를 쓰고 있어 봤자, 결국 일개 [등장인물]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슈뢰딩거가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된다. 내가 만든 세계다. 내가 만든 게임이다. 이딴 일이 일어날 리가…….]
“네가 만든 게 아닌가 보지.”
[……뭐?]
“너도 친절하게 답해 줬으니, 나도 친절하게 답해 준 것뿐이야. 이만 가라.”
[아, 안 돼……!]
여전히 의문 가득한 슈뢰딩거의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시간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소멸했다.」
파스스-.
현실과 공상의 악마, 슈뢰딩거는 그렇게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름대로 거창한 [설정]을 가지고 있던 놈치고는 허무한 최후였으나, 이 세계에서 [비중]이 없는 존재란 애초에 그런 존재였다.
누군가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존재를 부정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리고 그런 존재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그렇게 불합리한 세계였다.
* * *
현실과 공상의 악마, 슈뢰딩거가 소멸한 후 슈뢰딩거가 유지하고 있던 심연은 그대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런 공간이 존재할 이유도, 개연성도 없는 탓이었다.
「[Chapter 31]의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그 흔한 보상 하나 없는 담백한 메시지.
그러나 아쉬운 것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나저나, 이놈들은 어디에 있는 거야?”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심연이 붕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사 파티’의 일행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찾으러 가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뜻밖의 메시지가 나를 찾아왔다.
「유료 정산이 시작됩니다!」
「현재 [비중]에 따라, [정산금]이 지급됩니다!」
「현재 비중: 16.9%」
「정산된 금액: 34,300G」
「현재 적립된 정산금: 338,300G」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던가?
어쨌거나 [후원금]을 제외한 수입이 있다는 사실이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정산금을 받았다.
그때였다.
「적립된 누적 정산금이 일정 금액을 넘어서, [자본주의] 버프 등급이 상승합니다!」
「현재 [자본주의] 버프 등급: [3단계] → [4단계]」
「[자본주의] 버프 등급이 증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권한 개수와 등급이 증가합니다.」
「현재 적립된 금액 중 일정 금액을 소요하여 다음과 같은 효과를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결제] [1단계] - 「100G」
[개연성 무시] [5단계] - 「500G」
[행운 매수] [0단계] - 「3,000G」
[전개 생략] [0단계] - 「10,000G」
+
[미리보기 결제] [1단계]
미리보기 분량을 결제합니다.
현재 등급에 따라서 결제할 수 있는 편수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개연성 무시] [5단계]
일부 개연성을 무시합니다.
현재 등급에 따라서 무시할 수 있는 개연성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행운 매수] [0단계]
행운을 매수합니다.
현재 등급에 따라서 매수할 수 있는 행운의 효과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전개 생략] [0단계]
일어났던 전개, 혹은 일어날 전개를 생략합니다.
현재 등급에 따라서 생략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
예상은커녕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자본주의] 버프의 등급 상승.
[회장님]의 등장으로 인해서 너무 한꺼번에 많은 등급이 올라간 탓에, 그 중간 과정 동안 성장이 부진했던 것이다.
[전개 생략]이라…….
자세한 내용은 결국 직접 사용해 봐야 알겠지만, 내 짐작대로라면 [전개 생략]은 [개연성 무시]만큼이나 요긴한 버프라고 볼 수 있었다.
‘잘됐군.’
비록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보상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차고도 남았다.
이제 남은 일은 ‘용사 파티’ 일행을 찾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과, 디오의 옆에 찰싹 붙어서 앞으로 녀석이 행할 [메인 시나리오]에 끝없는 훼방을 놓는 일이었다.
그 건방진 녀석을 괴롭힐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
어?
들려온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언젠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 그러나 이렇게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오랜만이야. 반.”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사라져 가는 심연 속에서 얼굴을 비춘 것은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얼굴이었다.
“……하이디.”
어렵게 그 이름을 내뱉었으나, 나는 왜인지 모르게 예전처럼 그녀에게 평범하게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 정체 모를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다지 반갑지 않나 보네?”
그녀의 말에 잠시 나가 있던 내 정신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 나간 말은 너무나도 머저리 같은 말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말하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울고 있었다.
기뻐 보였지만, 화가 나 보였다.
“그렇진 않지.”
하이디가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반가워?”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다. 그러나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어.”
하이디가 웃었다. 그러나 예전에 보았던 환한 미소는 아니었다.
“그러면 왜 버렸어?”
지금 그녀가 품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을 버린 나에 대한 증오? 아니면…….
“버리지 않았어.”
비겁하게 변명했다. 적어도 나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감정이 곧 얼굴에 드러나는 솔직했던 그녀가, 이제는 나조차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감춰지고 복잡해졌다.
“재밌네.”
그녀는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환한 미소는 아니었다.
“반.”
그리고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네가 하려는 일을 알아.”
……뭐?
“그래서 묻고 싶어. 반, 네가 원하는 ‘끝’에는…… 내가 있어?”
이제 그녀의 표정은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말하는 내 ‘목적’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냥 떠보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나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나답지 않았다.
“아니.”
내 목적대로 이 세계가 끝장나면, 본래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었던 그녀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내가 하려는 일이었고, 가려는 길이였다.
“그래.”
그녀는 더 이상 울먹이지 않았다.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았을 뿐.
“반.”
짧게 울려 퍼진 목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뜨끈한 감각이 가슴팍에서 느껴졌다.
……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방심한 건가?
아니면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건가?
그 수많은 의구심 속에서도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우습게도 한 가지였다.
그녀가 왜?
누군가는 그 감정을 배신감이라고도 말하며, 또 누군가는 호구의 특징이라고도 말한다.
단언컨대, 나는 스스로 내가 그 암 걸리는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깟 알량한 감정 따위에 그르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더없이 답답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바로 그 호구 암 덩어리가 되었다.
“걱정하지 마.”
그렇게 속삭인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보여 주었다. 제 생명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펄쩍거리며 뛰고 있는 그것은 심장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것이었던 심장.
그러나 이제 그 심장은 다른 이의 소유가 되었다. 당장이라도 쥐어 터트릴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우리는 함께 있을 거야.”
그녀가 내 심장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영원히.”
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