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Chapter 32: 복원 (2)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어디선가 백만 번은 더 보았을 법한 클리셰였으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현실은 바로 그 뻔한 클리셰였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방.
그곳에서 내 몸은 어느 의자에 묶여 있고, 가슴은 무엇인가 빠져나갔는지 텅 비어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내려서 들여다보면 반대편 벽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그곳에 응당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음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쯧.”
이 꼴이 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나조차도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있었다.
하이디, 그녀가 나를 이렇게 만들고 이곳에 가뒀다.
「저세상 칼럼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거의 처음으로 찾아온 고구마 전개에 흥미를 표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곤경에 크게 기뻐합니다!」
……아무튼, 변태 같은 놈들 같으니.
위기를 혐오하는 우리 사이다패스 독자님들은 도대체 어디 가고, 언제부터 저런 변태 같은 놈들만 남았단 말인가.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당신의 죽음을 강렬하게 바랍니다!」
「[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사이다 전개]를 기대합니다!」
……방금 한 말 취소.
건강을 위해서라도 가끔은 고구마도 먹어 줘야 하는 법이다. 맛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정말이다.
어쨌거나 슬슬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 여기에 있었다가는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지금의 나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꼬락서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슬슬 자리를 벗어나 보려고 몸을 꿈틀거렸으나, 여간 꽉 묶은 것이 아닌지 발버둥 치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뭐 이딴…….”
도대체 뭘 어떻게 묶은 건지, 나를 옭아맨 밧줄은 내 힘으로도 전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세상 칼럼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하이디’의 뛰어난 포박 기술에 감탄합니다!」
……어째 다른 의미로 감탄한 것 같은데.
어쨌거나 아무래도 힘으로 푸는 건 불가능한 듯하니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라던가.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파지직-!
나를 옭아매고 있는 밧줄들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개연성]이 당신을 강하게 주시 중입니다.」
「[강제 복원력]이 발동합니다!」
프스스-.
그와 함께 순식간에 잠잠해진 스파크.
혹시나 했건만, 역시는 역시였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나를 이곳에 가둔 장본인을 만난다던가.
“일어났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두고 볼 것도 없었다.
“하이디.”
그녀가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출입했다면 자연스럽게 들려야 할 소리도, 문 같은 것이 열리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 하얀 방 자체가 마법이나 모종의 방법으로 격리된 별도의 공간인 듯했다.
즉, 어설픈 탈출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많이 불편했지? 미안해.”
얼핏 들으면 정말로 진심처럼 들려오는 사과였으나, 그녀의 말에는 어딘가 영혼이 없었다. 텅 빈 껍데기가 나를 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텅 비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진하게 칠한 화장이 마치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일단 이것 좀 풀어 줄래?”
내가 농담처럼 나를 묶고 있는 밧줄을 흔들어 보였다. 현재 납치범의 신분인 하이디가 당연히 풀어 줄 리가 없다고 한 이야기였으나, 하이디의 대답은 담백했다.
“응.”
……응?
그리고는 정말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를 묶고 있던 밧줄들을 풀어 주었다. 도대체 왜 묶어 놨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당황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친절하기 짝이 없는 납치범의 행동에 그 속내를 의심합니다!」
하이디의 행동에 의심스러운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말했다. 이번에는 더욱 뻔뻔한 요구였다.
“이만 가 봐도 될까? 할 일이 있어서.”
“안 돼.”
아니나 다를까, 들려온 것은 단호한 대답이었다. 역시 여기까지는 안 되는 건가 싶었는데 그 이유가 어딘가 이상했다.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줘.”
그 어떤 강압도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가 정말로 내 가슴에 구멍을 내고서 심장을 쓰다듬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기괴했다.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에게서 [사이코패스] 성향을 의심합니다!」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라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도 여전히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표정이 그려진 가면을 새로 바꿔 쓴 것 같았다.
“좋아, 그러면 같이 나가는 건 어때? 그건 괜찮지?”
그저 말장난처럼 타협에 나선 것이었지만, 들려온 것은 일말의 고민조차도 없는 대답이었다.
“좋아.”
그 거침 없는 대답에, 나는 두 번째로 당황했다.
* * *
이미 예상했던 대로 ‘하얀 방’에서 나가는 물리적인 ‘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은 하이디가 내 손을 잡고서 어떤 주문을 외우자 그대로 주변의 풍경이 바뀌는 것을 보고 난 후였다.
“저것 봐! 무지개야!”
하이디는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풍을 나온 소녀처럼 깨방정을 떨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려고 눈동자를 굴렸다.
여기는 어디지?
꽃이 핀 것을 보니 적어도 북쪽의 설원이나 동쪽의 척박한 사막은 아닌 듯했다.
즉, 아예 답도 없는 오지는 아니라는 이야기.
그렇다면 기회를 엿봐서 도망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반!”
하이디가 환하게 웃으며 꽃다발 뭉치를 나에게 건넸다. 나도 모르게 영혼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꽃향기가 유독 지독하게 느껴졌다.
“어, 그래.”
꽃향기 너머로 보인 화사하게 지은 그녀의 미소가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서 꽃향기를 맡는 그 화사한 미소와 내 심장을 움켜쥐고서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래,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미소는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의 것과 같았다. 순수악이라고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의 그러한 동심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이디.”
“응.”
“우리 숨바꼭질할까?”
“숨바꼭질?”
하이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흥미를 표하자,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숨을 테니까, 속으로 백까지 센 후에 나를 찾으면 네가 이기는 거야. 간단하지?”
“좋아.”
역시라고 해야 할지, 의외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순순히 승낙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센다?”
“실눈 뜨지 말고.”
“헤헤.”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그녀의 미소를 뒤로한 채로 나는 달렸다. 그러나 숨은 금세 턱까지 차올랐다. 구멍 난 가슴이 유난히 횡 했다. 그리고 그제야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망할.
내 심장.
지금쯤 응당 힘차게 뛰고 있어야 할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없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멀쩡해서 잠시 망각했었는데, 이제야 그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심장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나는 얼마 달리지 않아서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의문을 가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내 가슴에 난 구멍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며, 전신에 감돌던 마족 왕자의 힘은 어디로 간 건지. 그리고 하이디는 도대체 무엇이 되어 버린 건지.
그리고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결코 도망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결국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쳐서가 아니었다. 현실에 순응하고 도주 의사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럽게 느껴진 한기가 내 발걸음을 옭아맸을 뿐이었다.
“찾았다.”
들려온 목소리는 무척이나 기쁜 듯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와는 별개로 내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내가 숨을 차례네?”
그녀의 손이 내 팔짱을 잡아 이끌었다. 놀이의 속행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아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팔을 붙들린 것이 아니었다.
훨씬 더 소중하고, 귀중한 것.
나는 그것을 저당 잡혔다.
“반, 그거 알아?”
“뭘?”
“지금 이 순간은 내가 꿈에서조차도 보지 못했던 순간이야.”
하이디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손 너머에서 괴리감과 함께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만든 걸까.
나는 이 세계에서 잊혀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저 머릿속으로 막연히 추측하고, 또 추론할 뿐.
나는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비중]이 없는 다른 이들은 그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사라지거나 그대로 잊힐 테지만, 그녀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하루하루 거울 속에서 사라져 가는 자신을 마주하였을 테지. 그리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 내가 야속했을 것이다. 그리워하고, 또 원망도 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하이디였다.
“우리는 함께할 거야. 앞으로도 쭉.”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서 나에게 닥쳐온 시련의 정체가 다가왔다.
「[감금] 에피소드가 진행 중입니다.」
「심장을 저당 잡혔습니다. [감금자]의 동의 없이 별도의 [자율행동]이 제한됩니다.」
「힘의 근원이 소실된 상태입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신체 능력]이 제한됩니다.」
「[감금]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감금자] 혹은 [감금 장소]에서 해당 힌트를 얻으십시오.」
뭐 이딴…….
이제야 납득이 갔다. 도대체 왜 내가 나를 묶고 있던 허술한 밧줄 하나 못 끊고 빌빌대고 있었는지.
그리고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녀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자, 숨는다?”
어느새 있던 장소로 되돌아온 하이디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백을 세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술래였다.
“하나, 둘…….”
“앗! 치사하게!”
점차 멀어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열…….”
술래라…….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역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그녀의 소원대로, 이제 내가 그녀를 찾으러 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