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Chapter 32: 복원 (5)
하이디가 어느새 물기로 촉촉이 젖은 눈을 깜빡였다.
“……어?”
「등장인물, ‘하이디’의 [설정]이 갱신됩니다!」
「등장인물, ‘하이디’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2.3%」
희미해졌던 하이디의 모습이 제 빛깔을 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아…….”
몸을 부르르 떤 하이디의 눈이 그대로 감겼다. 아무래도 충격으로 인해서 기절한 모양이었다.
“쉬어, 이만.”
쓰러지는 그녀의 몸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감금] 에피소드를 클리어하여,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45.8%」
쩌저적-.
쩌적-.
그와 함께 주변의 공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에피소드가 마침내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리는 커튼콜이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이 [메인 시나리오]로 복귀합니다!」
「등장인물, ‘하이디’가 [메인 시나리오]로 복귀합니다!」
이제, 돌아갈 때다.
* * *
페드로는 경악했다.
“이, 이 미친 작자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분명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계획대로 용사 일행은 아무런 의심조차 없이 그를 쫄래쫄래 따라서 ‘하인즈의 유산’에 도착하였고, 페드로는 그 유산의 위대함과 가치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며 그들의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유산을 가동시켜서, 저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수들을 ‘그곳’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저 미친 작자들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미친 짓거리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그만둬! 그만두라고 이 미친 자들아!”
그러나 페드로의 외침은 이내 들려온 폭음에 의해서 너무나도 쉽게 묻혔다.
쾅!
콰캉!
연신 들려오는 폭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보이는 그대로였다.
“……여기인가? 에잇!”
숲과 평화를 사랑한다는 엘프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인간이라는 종(種)이 낳은 최고의 유산 중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수고,
“꺄하하! 아,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확 풀리네.”
어느 학파인지도 모를, 근본 없는 사도(私道)의 마법사 계집은 미친년처럼 신난다는 듯이 양손에서 화염을 뿜어댔으며,
“……쯧.”
이 모든 일의 주동자일 터인 용사는 염치도 없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저 성검을 꼬나 잡은 채로 그저 거대 수정 앞에 서 있었다.
“아, 아아…….”
무너져 내린다.
인류의 보물이,
대마법사의 유산이,
‘그곳’과의 연결이.
그래,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 저들의 목적이 처음부터 ‘하인즈의 유산’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자신으로서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페드로로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용사도, 엘프도, 사도의 마법사도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도대체 저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읏차.”
페드로는 남자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페론 마탑의 부탑주씩이나 됐던 그조차도 저런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설사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터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광경은 진귀하고, 엽기적이었다.
‘……도대체 저게 뭐야?’
그와 함께 페드로의 시야에 그 ‘물건’이 지닌 특징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철로 이루어진 보습과 얼핏 보면 나무로 이루어진 몸체.
‘설마, 농기구?’
페드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저 무식한 크기는 황소 백 마리를 끌고 와도 끄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맞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곳은 농지 따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물건의 용도가 그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그 용도의 대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맙소사.”
그러나 그는 이내 그에 대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가,
그 흉악한 흉기가,
땅을 질질 끄며 서서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돌아왔다.
감상은 짧았고, 현실에 대한 적응 시간은 그보다 조금 더 짧았다.
이 지긋지긋한 세계는 나를 조금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
「[Chapter 32]의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인류의 배신자, ‘하인즈’가 남긴 유산을 파괴하여 ‘불지옥 반도’와의 연결을 끊으시오.」
……얼씨구야.
돌아오자마자 반기는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이 이딴 식이라니, 황송해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나리오의 내용이 왜 이딴 식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 잘나신 [개연성]께서, 이제는 내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 나선 것이다.
‘가야겠군.’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디인지도 모를 곳을 향해서 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막막하기는 했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내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도…….’
그것은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노예 소년’으로서 충실하도록 [설정]을 개조당하거나.
어떤 결말이든지 나에게 있어서 썩 달가운 결과는 아니었다.
……확실히, 어떤 멍청한 작가 놈보다는 백 배는 더 거슬리는구만.
적어도 녀석의 수작질에는 최소한의 인간미라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에게 있어서 불행이 있었다면, 그 ‘인간미’라는 것이 조금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던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강제 복원력]을 위시한 [개연성]은 달랐다.
말 그대로 이 소설 속 세계관 그 자체인 [개연성]은, 이미 내가 망칠 대로 망쳐 버린 클리셰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해서 탄생했다.
그렇기에 더 냉혹하고,
더 무자비하고,
더 거침없다.
결과적으로 나로 인해서 탄생했으니, 관점에 따라서 어찌 보면 내가 부모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부모된 입장으로서 자식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고 드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참으로 망할 놈의 자식새끼가 아닐 수 없었다.
‘……슬슬 승부수를 걸어야 할 때인가.’
짐작건대, 이번 [메인 시나리오]는 아마 고작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위기를 넘어간다고 쳐도, 대놓고 ‘아인즈 반 살해’ 같은 최악의 [메인 시나리오]로 띄울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疊疊山中).
그러나 이 길 역시도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다. 편하게 [주인공] 옆에서 기연이나 뺏어 먹다가 녀석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이 쓰레기 같은 소설 속에 처박은 이 망할 세계와 작가에게 복수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결과로, [클리셰 붕괴율]도 어느덧 절반 가까이 진행됐다.
즉, 이 세계를 부숴 버린다는 내 목표도 어느덧 절반 가까이는 이루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속도는 이제부터 가속화될 것이다.
깨진 유리창 주위에 거미줄이 생겨나고, 무법자들의 그래비티가 그려지는 것처럼.
그렇다면 문제는 그 ‘승부수’로 어떤 큼지막한 공을 던질 것인지였다.
“으음…….”
여전히 잠든 듯이 기절해 있는 하이디가 잠시 잠꼬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결말’에, 자신이 있느냐고.
그때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이제는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쯧.”
쓸데없는 감상이다. 이런 소모적인 감상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 태도는 조금 더 생산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보는 이’가 답답하지 않도록.
-‘누군가’의 유흥을 깨지 않도록.
‘좋아.’
그리고 떠올린 것은 내가 던질 ‘승부수’에 대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음흉한 미소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흉계를 멋지게 맞춰 보이겠다며, 암행어사(暗行御史) 직에 있었던 머나먼 조상의 명예를 겁니다!」
이제, 디오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러 갈 시간이었다.
* * *
페드로는 절망했다.
이제 다 끝났다.
오랜 시간을 고대했던 그의 복수도, 대마법사의 유지도.
‘저 재앙(災殃)은 도대체 무엇인가.’
페드로는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때 명석함을 자랑했던 자신의 두뇌를 필사적으로 사용했다.
저것은 무엇인가.
쟁기?
아니,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다. 이해할 수가 없다.
구우우우우웅-.
땅거죽이 힘없이 뒤집힌다. 그 어떤 마법사라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마법 공학의 정수가 흙더미에 형편없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 황당하고도 무자비한 폭거를 지켜보는 것뿐.
‘기억났다.’
페드로는 그 재앙(災殃)을 휘두른 이의 얼굴을 간신히 떠올렸다.
그때의 그 ‘미친놈’과 함께 도망쳤던 자다.
그리고 그의 신분을 떠올리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대 용사, 베른.’
도대체 어찌 된 것이, 용사라는 인간들은 다 저 모양이란 말인가?
지금 페드로의 눈에 비친 ‘쟁기’의 위력은 결코 전설 속의 성검에 뒤지지 않아 보였다.
아니, 그 목적과 용도에 따라서는 오히려 성검보다도 훨씬 더 흉악스럽게 보였다.
구우우우우웅-.
“머, 멈추시오! 제발 멈춰!”
페드로는 이제 자신의 목적조차도 까맣게 잊은 채로 애원했다. 이대로 이 위대한 유산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선대 마법사였던 자로서 씻을 수 없는 원죄(原罪)였다.
그러나 그 무자비한 폭도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 무지몽매한 것들은 마법사들의 유산을 무슨 철거 직전의 폐건물을 처분하듯이 다뤘다.
“아, 아아아……!”
페드로는 주저앉았다. 일 년 사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그를 절망 속에서 꺼낸 것은 의외의 목소리였다.
“……아인즈 반?”
그 목소리를 낸 이는 다름 아닌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서 있던 용사였다. 그리고 그 용사는 지금,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겨우 찾았네.”
그와 함께 페드로의 시야에 아인즈 반-씹어 삼켜도 모자란 원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나락에 처박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 그 누구보다도 증오하는 이.
그러나 페드로가 행한 것은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복수가 아닌, 애원이었다.
“도, 도와주십시오!”
“뭘?”
싸늘한 시선이 그에게 내려꽂혔다. 그러나 페드로는 애써 꿋꿋이 말했다.
“저자들…… 저자들을 막아 주십시오!”
* * *
나는 눈앞의 힘없는 노예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기로 했다. 갑자기 오지랖이나 호구력이 생겨서는 아니었다.
그저, 녀석의 부탁이 내 목표와 겹쳤다.
“그러지 뭐.”
“……예?”
“내가, 도와준다고.”
그리고는 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게이트’를 오픈해. 당신이라면 할 수 있지?”
그의 몸이 움찔했다. 내가 [비중]조차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그를 알아본 것은 순전히 어떤 오지랖 덕분이었다.
「스포충이 눈앞의 노예가 과거, 당신에 의해서 몰락한 ‘페드로’임을 밝힙니다!」
다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페드로에게는 관심도 없었는지, 디오가 내 앞에 섰다.
“……네놈. 갑자기 사라진 것도 모자라서, 이제야 그 뻔뻔한 낯짝을 비추는 거냐.”
“사정이 있었거든.”
내가 살며시 시선을 내려서 내 옆구리에서 아직도 긴 잠에 빠져 있는 하이디를 가리켰다.
그녀의 모습을 본 디오의 표정이 잠시 찡그려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잘됐군. 우리 목적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테지?”
“물론이지.”
당연히 알고말고.
내가 [후원금]을 쓰면서까지 다급하게 이곳으로 향한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좋아,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어서 이곳을 파괴…….”
디오가 말을 끊었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거대한 진동 때문이었다.
두구구구구-.
이미 반쯤 매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거대 수정에서, 더없이 찬란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열리는 징조였다.
“……어째서?”
디오의 시선이 이변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서 마법진을 조작하고 있는 페드로의 모습을 포착했다.
“역시 딴생각이 있었군.”
게이트는 완전히 열렸지만, 디오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성검을 쥐었다.
당장이라도 페드로를 베어 버릴 생각인 듯했다.
툭.
아주 작은 이변.
“……어?”
이를 지켜보던 키리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가,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디, 디오!”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은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조금 전, 내가 이곳으로 온 목적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이제, 디오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러 갈 시간이었다.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디오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문제는, 그 걷어차인 대상이 빨려 들어간 장소였지만.
“네, 네놈……!”
디오는 어떻게든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어차피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투둑-.
투두둑-.
이제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디오의 외침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녀석답지 않게 감정이 여실히 드러난 목소리였다.
“아인즈 바아안!”
“디오!”
“아, 망할!”
더 이상 디오를 두고 볼 수 없었는지 키리엘과 에드윈이 디오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제 게이트는 디오뿐만 아니라 키리엘과 에드윈까지도 집어삼키고 있었다.
“꺄아악!”
“씨발!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디오를 향해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말하자면, 아주 잠시 맞이할 이별에 대한 작별 인사였다.
“그러면, 잘 놀다 와.”
조금 늦었을, 여름 휴가를.
“아, 참고로 거기 좀 더우니까 알아두고.”
「사탄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사악함에 취업난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개자식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