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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45화 (145/164)

◈ 145화 Chapter 33: 지옥에 대하여 (3)

하이디가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녀의 머리맡에서 마치 엄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루의 모습이었다.

“……루.”

하이디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미안해.”

하이디는 루의 품에서 조용히 흐느꼈다. 그의 등을 토닥이는 루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예상했던 상투적인 위로가 아니었다.

“도대체가…… 이건 또 어떻게 맞힌 건지. 아무튼, 귀신 같다니까.”

“……응?”

하이디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러나 그녀의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깨어나면 괜히 울면서 신파극 하면 곤란하니까 적당히 달래 주라던데?”

“……누가?”

“누구겠어?”

당연하다는 듯한 루의 말에 하이디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그녀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야?”

“너희 집.”

“……뭐?”

하이디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하고도 황량한 풍경.

그녀는 이 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은 바로 그녀가 ‘불지옥 반도’에서 살고 있던 오피스텔이었다.

“여, 여기는 도대체 어떻게?”

하이디는 당황했다. 마치 무엇인가에 의해서 잠겨져 있던 그녀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다시금 떠오르며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경적을 울렸다.

하이디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나름대로 신속한 몸놀림으로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단숨에 치우고, 감췄다.

아마추어가 급조로 행한 증거인멸치고는 제법이었으나,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앞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목격자가 있었다는 점.

“……뭐해?”

어이없다는 듯한 루의 시선에 그제야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하이디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런 하이디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디가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으나, 이미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반에게 모두 다 들은 상태였다. 새삼 이제 와서 또다시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에휴…….”

하이디의 앞에 선 루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딱밤을 튕겼다.

따악-!

“아얏!”

순간적으로 루에게 딱밤을 얻어맞은 하이디가 울상을 지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대놓고 항의는 하지 못했지만, 얼굴에서 억울함이 한껏 묻어 나왔다.

“멍청해 가지고.”

그러나 루는 그녀가 울상을 짓든 말든 개의치 않고 쏘아붙였다.

“이제 와서 숨기려고?”

“그, 그게 그러니까…….”

“됐어, 이 화상아.”

“아얏!”

루는 하이디의 딱밤을 한 대 더 때리고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반이 그러더라.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무 일도 안 하고 탱자탱자 놀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뭐, 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네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다 그 썩어 빠진 정신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

딱!

참다못한 하이디가 항변했다.

“왜 자꾸 때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길래, 혹시 맞는 걸 좋아하나 했지.”

“누가 맞는 걸 좋아해! 그리고 누가 꿀 먹은 벙어리야!”

“어, 아니야?”

“아니야!”

한껏 빼액 소리를 지른 하이디는 어느새 자신을 애완동물처럼 바라보는 루의 시선에 자신이 놀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망치게?”

마치 예상했다는 듯한 루의 말에 하이디는 아직 채 떼지 못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다시 내려놓았다.

“…….”

“그래야지, 그래야 착한 아이지.”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목소리에 하이디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해야 몇천 살밖에 안 많은 주제에 어른인 척하기는…….”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따악!

“다 들었어. 요 계집애야.”

“……씨잉.”

하이디가 억울함이 한껏 묻은 눈으로 루를 노려보았으나, 곧 루의 시선이 하이디에게 옮겨지자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루는 그런 하이디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예상대로인지.’

정확히는, ‘그’의 예상대로였지만 말이다.

루는 가볍게 쓴웃음을 짓고는 하이디에게 말했다.

“따라와.”

“……응?”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일이라니?”

루의 손이 움직이자 또다시 딱밤을 맞는 건가 싶어서 하이디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온 것은 딱밤이 아닌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너한테는 조금 괴로운 일이 될지도 몰라.”

“……괴로운 일?”

하이디는 그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감히 물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짜낸 용기였다.

“……아까 말했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그래.”

“할게. 뭔지는 몰라도…… 할게.”

“괜찮겠어?”

루의 표정이 걱정과 함께 기묘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이것도…… 예상대로네.

그와 함께 반이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하이디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루는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토록 예상대로라니, 마치 모든 것이 이미 짜인 단상 위의 마리오네트 같지 않은가?

“응.”

루의 귓가에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제 역할을.”

“이게 내 역할이라면…….”

-“기꺼이.”

“기꺼이, 받아들일게.”

루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이 다 이렇게 흘러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그리고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었다.

마리오네트처럼 놀아나는 그 단상 위에 오른 것은, 하이디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 * *

“왕자님.”

박 실장의 목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이 떠졌다. 차를 안 쓰다 써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방향제의 페퍼민트 향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곧 레드 하우스(Red House)입니다.”

“그래.”

레드 하우스(Red House).

은근슬쩍 색깔만 바꾼 그곳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더욱더.

“확인 끝났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지이이잉.

간단한 확인 절차가 끝나자, 마침내 레드 하우스 정문이 열리며 그 웅장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선 길과 그 옆을 따라서 이어진 상록수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드넓은 잔디밭까지.

「일부 독자가 어딘가 익숙한 묘사에 작은 흥미를 표합니다!」

과연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살고 있는 장소다웠다.

그나저나…… 명색이 ‘왕’이라는 작자가 궁전도 아니고 ‘레드 하우스’라니. 빈곤한 상상력과 설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뻔했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이곳을 그런 곳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나인데.

“그분께서는 현재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분’을 가리키는 경호원들과 비서들의 태도는 극진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호칭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분’이었다.

“안내해.”

‘레드 하우스’ 내의 복도는 생각 외로 평범했다. 아니, 황량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맥거핀’ 같은 장소였으니 말이다.

「다수의 독자가 아무런 묘사조차 존재하지 않는 ‘레드 하우스’의 내부 풍경에 황량함을 표합니다!」

「프로불편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아무리 그래도 최고 권력자가 사는 장소가 이렇게 황량한 것이 말이 되느냐며 [설정] 오류를 지적합니다!」

“쯧.”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복도는 길었다. 그리고 그 긴 복도 내내 그 흔한 그림 한 점 없다는 게 어찌 보면 유머였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불지옥 반도’에서는 예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애초에 없는 거라면 그림 한 점 없다고 해서 특이할 건 없었으니까.

똑똑.

“왕자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 앞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두드린 후, 나에게 눈짓했다.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안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릴 것 같은데도 용케 신호를 알아차렸다 싶었다.

정말로 텔레파시라도 보내는 걸 수도.

[설정]이 설정이다 보니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하 직원을 부리는 상사라니. 끔찍한 일이다.

철컥.

나무인지 철인지 모를 두꺼운 문이 열리고, 열리는 문틈 사이로 집무실의 풍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으레 집무실 하면 떠오르는 그 흔한 책장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풍경.

그 풍경을 보니 아까 했던 생각이 이어서 들었다. 어쩌면, 이곳은 정말로 문학이나 예술 따위가 없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황량한 세계였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완전히 열리자, 소위 말하는 회장님 의자에 앉은 ‘그분’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분명히 낯섦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얼굴.

도대체 어디서 보았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얼굴은 우습게도 나와 조금 닮아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위엄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동네 아저씨 목소리 같기도 했다.

“예.”

그나저나 오랜만이라…… 재미있는 말이다. 정작 내가 할 말은 “처음 뵙겠습니다.”인데.

“가출은 끝난 거냐?”

처음 보는 부모가 부모 노릇을 하려고 하니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올뻔했다.

불지옥 반도의 왕.

[설정]상 내 부모인 존재.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내가 만들어 낸 존재.

참으로 모순적인 관계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사실 이 문제는 닭이 언제부터 닭이고, 달걀이 언제부터 달걀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즉, 관점과 정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이야기.

눈앞에 있는 ‘왕’의 얼굴이 나와 비슷한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이라니? 무슨 말?”

“받고 싶은 게 있어서요.”

“원하는 게 있었다면 늘 하던 대로 막무가내로 얻으면 될 일 아니냐? 새삼스럽게 나에게 부탁할 것이 아니라.”

뼈가 있는 말이었다.

내가 만들어 낸 [설정] 속 ‘아인즈 반’이 얼마나 개차반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긴, 가출을 밥 먹듯이 하던 왕자가 올바르게 자랐다면 그게 더 [개연성] 없는 일일 터였다.

「[돌아온 망나니]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돌아온 망나니] 클리셰 효과로, 당신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평가가 [최하급]으로 조정됩니다.」

「[돌아온 망나니] 클리셰 효과로, 이후 당신의 행동에 따른 평가 조정이 [300%] 상향 조정됩니다.」

「다수의 독자가 개과천선한 [망나니]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얼씨구야.

원래 별생각 없었으나, 저렇게까지 열렬히 기대한다면 아무리 나라도 그 기대에 부응해 주고 싶은 법이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여기로 온 겁니다만.”

그와 함께 나에게 향하는 멸시의 시선.

자식이 아니라 무슨 원수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 시선과 함께 불로소득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온 망나니]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54.2%」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어쭙잖은 점수나 따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이지.

“그래, 그게 뭐냐?”

“당신 목숨.”

“……무어라?”

나는 살며시 웃었다.

상대는 나보다 훨씬 더 강한 마족이자, 사실상 [세계관 최강자]에 가까운 존재.

정면은커녕 불의의 기습을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다.

하지만 그 상대가 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 누구도, 그 [주인공]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을 나라면 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전개 생략]을 사용하였습니다!」

「[10,000G]가 소요됩니다.」

스르륵.

그와 함께 ‘왕’의 강건했던 육체가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왕’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생략시킨 [전개]란, 다름 아닌 내가 ‘불지옥 반도의 왕’이 되기까지의 [전개]였다.

그 무자비한 [생략]에 의해서 눈앞에 있는 ‘전대 왕’의 존재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직 ‘불지옥 반도’의 왕자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사용법이었다.

“아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긴.

보면 몰라?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패륜아]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패륜아] 클리셰 효과로, ‘불지옥 반도’의 모든 권력에 대해서 양도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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