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150화 (150/164)

◈ 150화 Chapter 34: 경계 (1)

빛이 번뜩였다.

이에 대해서 굳이 [설정]을 덧붙이자면 ‘불지옥 반도’ 내에 숨겨져 있던 핵이라도 터진 거겠지만, 어차피 지금 와서 그런 사소한 사실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불지옥 반도’는 사라졌고, 그것이 [주인공]이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지역, ‘불지옥 반도’가 파괴됩니다!」

「‘불지옥 반도’가 사라짐에 따라, ‘불지옥 반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상실합니다!」

「[메인 시나리오]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68.8%」

「클리셰 붕괴율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경계]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클리셰 붕괴율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역전] 현상이 발생합니다!」

「클리셰 붕괴율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사도]에 대한 제약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치명적인 오류로 인해서 [강제 복원력] 발동이 일시적으로 보류됩니다.」

‘성공했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디오가 본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다 거짓이었다.

‘하인즈 반’이라는 인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반란군’ 역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디오가 마주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시도 그저 몇 가지 홀로그램으로 짜깁기해서 ‘연출’한 가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귀찮게 이런 과정을 거친 이유는 간단했다.

디오는, 이 세계의 [주인공]은 내가 만들어 낸 조잡한 ‘가짜’를 ‘진짜’라고 믿었으니까.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치밀한 연출에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보이는 대로였다.

내가 연출해 낸 ‘데우스’에 의해서, [개연성]은 디오가 바라는 대로 이 ‘불지옥 반도’를 끝장낼 무기를 손에 쥐여 줬다.

마치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 [주인공]들이 으레 그래왔듯이 말이다.

「한 개의 세계를 파괴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 달성으로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23.7%」

「현재 [비중]이 일정 수치를 초과하여,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등급이 [주연]에서 [서브 주인공]으로 상승합니다!」

「[서브 주인공] 버프가 적용됩니다.」

[서브 주인공]이라…….

이제야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정말로 얼마 안 남았다.’

[비중]은 어디까지나 내가 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늘리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클리셰 파괴]였고, 그에 대한 증표인 [클리셰 붕괴율]도 어느덧 7할에 가까워졌다.

이 소설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였다.

물론, 이 ‘끝’은 작가가 바라는 ‘결말’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또 그곳인가.’

오랜 생각이 끝난 후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한 흰 공간이 보였다. 처음에야 조금 당황했다지만, 이제 이곳에 올 거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했던 사안 중 하나였다.

경계.

존재해서는 안 될 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자,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될 장소.

궤변 같은 설명이었으나, 실제로 이 장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 이상의 적합한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의 풍경은 그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마냥 하얀 빛으로 둘러싸여 있던 공간이, 이제는 군데군데 균열이 일어나서 어디론가 빛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과연…….’

처음 왔을 때야 조금 당황했다지만, 다시 와 보니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더구나.]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보였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므인가.’

마왕 므.

일전에도 이 공간에서 만난 적이 있는 존재.

나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덕분에 앞으로 바빠질 것 같아. 뭐,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만은…….]

예상했다라…….

이 뻔한 세계에서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응당 그럴 수 있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존재.

그 모순적인 존재인 그녀는 다름 아닌 베른의 [설정]으로부터 탄생했으니까.

‘너희의 목적은 뭐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딱히 감추거나 돌릴 생각은 없었는지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역시.’

순순히 대답해 주는 게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어차피 나로서도 이미 예상했던 사안이었다.

개연성의 사도.

[강제 복원력]에 의해서 탄생한 그들의 목적은, 아마도 모든 것을 처음 그대로 되돌리고 싶어 할 것이다.

결국 [게임 속]이라는 [설정]이 사라지고, ‘불지옥 반도’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내려고 했듯이.

하지만 [강제 복원력]은 실패했다.

‘그것’은 이 세계와 ‘불지옥 반도’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을 제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불지옥 반도’를 없애고 싶어 했지만, 결국 ‘불지옥 반도’는 [주인공]이 직접 없애 버린 [세계]로서 남았다.

이미 사라졌지만, 사라졌기에 결국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되는 불멸성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저들이 직접 나설 것이다. 비록 [개연성]에 타격을 입을지언정, 결국 [주인공]을 이용한 [시나리오]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까.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걸 방해해야겠네?’

[그렇겠지.]

마치 내가 저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걸 이루게 되면 너희는 모두 사라질 텐데?’

말하자면, 지금 그녀를 비롯한 [개연성의 사도]들은 단체 자살을 희망하는 셈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죽음이 아닌,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소멸을.

내가 꼬집은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당연한 의무를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그녀가 정말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여겼다면, 애초에 내 앞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베른 역시도 포함될 테고 말이야.’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가 가진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는 충분한 단서였다.

‘됐어. 어차피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도 아니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침묵 역시도 좋은 대답이 된다.

[너…….]

「무속인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귀신 같은 눈치에 동업을 제의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모름지기 추리란 논리와 과학적인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무속인의 제안을 비난합니다!」

「무속인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싸가지를 보아하니 너는 내일 모래 뒈질 팔자라며 탐정을 저주합니다!」

「심판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콜로세움 개최를 선언합니다!」

……얘네는 또 왜 이래.

어쨌거나 독자들이 우리들의 대화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나도 이 틈을 이용해 줘야겠지.

‘그러면, 다음에 보자고.’

「[전개 생략]을 사용하였습니다!」

「[메인 시나리오]로 복귀하는 과정을 [생략]합니다!」

「[메인 시나리오]로 복귀합니다.」

* * *

눈이 부시다.

쓸데없는 빛무리가 지나간 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어느 까끌까끌한 턱수염이었다.

“일어났냐.”

아니나 다를까 베른이었다.

혹시나 또 엄한 데 떨어지면 어쩔까 했는데, 아무래도 ‘불지옥 반도’에 갔었던 일행들 모두가 이곳으로 이동한 듯했다.

“……여기는 어디죠?”

주변의 풍경은 황량했다. 숨겨져 있던 유적지라도 되는 건지, 마치 화산재에 가라앉은 고대 로마의 폼페이를 보는 것 같았다.

베른의 시선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제도.”

“네?”

그리고는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제국이 멸망했다. 반.”

* * *

제국의 멸망.

꽤 충격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멸망에 [개연성]이 있다면 말이다.

“우리가 떠난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지금의 세계 자체가 우리가 ‘불지옥 반도’로 떠난 후에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의 세계일 가능성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 베른의 턱수염도 무척이나 무성하게 자라지 않았는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냥 면도를 잊었던 모양이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빈약하기 짝이 없는 당신의 추리에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라며 얼굴을 가립니다!」

「무속인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신내림을 받자며 당신을 종용합니다!」

……시끄러워, 이놈들아.

어쨌거나,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인 시간 이동은 아닌 모양.

그렇다면 지금 제국에 폼페이 화산 폭발을 뛰어넘는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제국이 멸망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용케 지금까지 잘 버틴다 싶더니만.’

제국이 지금껏 위태위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온갖 간신들과 위정자들이 제 잇속만 챙기기 바빴고, 망자들의 범람으로 제국 내의 치안과 생활이 모두 불안정해졌다. 더군다나 국경은 서쪽으로는 마왕의 영토가, 동쪽으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디룽 칸’의 세력이, 사방에서 제국을 압박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제국이다. 내전이 일어나서 나라가 반으로 쪼개진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멸망했다니? 이 멸망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베른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다. 제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런 [개연성] 없는 멸망을 그냥 지켜봤다고?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둘 중 하나였다. 베른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거나, 아니면 그의 인식조차도 뛰어넘는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거나.

“하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반.”

“……사소한 문제라고요?”

“그래, 아주 사소한 문제지.”

그렇게 말한 베른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의문이야 항상 있었지. 너는 어떻게 항상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벌이는 건지, 또 최근 들어서 나에게 주어진 이 기묘한 힘은 무엇인지.”

그와 함께 베른의 손바닥에서 [개연성 무시]를 상징하는 스파크가 튀었다.

디오도 그랬지만, 베른 역시도 저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인식하고 사용하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스킬]로서 인식하고서 사용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베른은 [개연성 무시]를 자신이 사용하는 일개 스킬이 아닌, 그 본질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가끔, 아니 최근 들어서는 무척이나 자주 어떤 시선이 느껴지더군. 나를 보고 웃고, 울고, 흥미를 표하는 그런 시선들이.”

베른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예전에 마왕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은 그저 소설을 보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때는 정신이 나가 있어서 한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정신이 나갔었기에 지껄일 수 있는 말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리고 디오가 그저 용사라는 운명에 집어삼켜져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시련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용사니까, 그리고 마왕이니까.”

베른은 웃고 있었다.

사납고, 또 사나운 그런 미소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굳이 우리에게 그런 굴레를 씌울 만한 이유가 없더군. 그저 괴로워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 고작 그런 이유치고는 너무 번거롭지. 그렇다면 왜일까? 어째서 용사는 마왕을 죽여야 했고, 마왕은 용사에게 죽어야 했을까.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시련은 내가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그렇게 바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베른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묻겠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그가 자랑하던 ‘쟁기’가 들려 있었다. 마치 그를 상징이라도 하듯이.

“나는 용사인가? 아니면 농부인가?”

내가 침묵하자, 베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질문을 바꾸지.”

베른은 힘겹게 내뱉었다. 마치 그 사실을 내뱉는 것조차도 괴롭다는 듯이.

“나는, 그리고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죽였던 마왕 바네사는…… 모두 다 ‘가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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