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Chapter 34: 경계 (2)
베른의 시선이 나를 보았다.
꼬장꼬장하지만 늘 생기 넘치던 그 눈빛은 어느새 썩은 동태눈깔처럼 문드러져 있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제4의 벽] 돌파성 발언에 주목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대답에 주목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개연성]이 이 상황을 주시합니다!」
‘올 것이 왔군.’
사실, 이 순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하듯이, 이 세계가 ‘소설 속’인 이상 ‘등장인물’들은 언젠가 그 끝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것이 ‘결말’이 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지금이 바로 그 순간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뭐…… 남 말할 처지는 아닐지도.’
그 아이러니함에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할 때였다.
지금 내가 여기서 뭐라고 대답하는지에 따라서 베른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베른.”
베른의 눈동자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절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토록 괴로워했고, 또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운명이 고작 누군가의 말장난에 의해 탄생했다는 사실이.
“교묘한 거짓은, 가끔 진실을 뛰어넘고는 하죠.”
“……그게 무슨 뜻이지?”
“어쩌면, 그것이 설령 가짜든 아니든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죠. 진실조차 속이는 거짓말은, 때로 진실 그 자체가 되기도 하니까.”
베른의 손에 쥐어진 쟁기가 부르르 떨렸다. 마치 그의 포효를 대신 부르짖듯이.
“그러니까…… 지금 이 모든 것들이 가짜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런 것들은 그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베른.”
“……사소하다고?”
베른이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고, 위협적인 웃음이었다.
“말해 봐. 이 모든 것들이 사소하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중요하다는 거지? 내 질문에 깊게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베른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보이는 것.”
“……보이는 것?”
“어떻게 보일지, 또 어떻게 보이게 할지. 또 어떻게 볼지.”
그와 함께 베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영민한 그는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게는 할 수 있죠.”
“너…….”
“베른.”
내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인지가 아니에요. 무엇이 되고 싶은지이지.”
이제 내가 그에게 물을 차례였다.
“베른, 당신은 뭐죠?”
그가 무엇인지, 또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제 그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진실을 마주하여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거짓과 함께 사라질지, 아니면 이대로 그 거짓으로 점철된 끈질긴 운명을 이어 갈지.
「대다수의 독자가 ‘베른’의 대답에 주목합니다!」
「진실은 언제가 밝혀진다고 믿는 일부 독자가 ‘베른’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즐겜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아무래도 좋으니 어서 선택하라며 팝콘을 뜯어 먹습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베른’의 대답을 예측합니다!」
「[개연성]이 현재 상황에 크게 주목합니다!」
우습다.
이제는 저 ‘독자’들도, 베른이 어떤 존재인지 대강이나마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특한 몇 명은 베른이 그저 급조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면에서 베른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저들에게 있어서는 그것 또한 하나의 [설정]에 불과할 테니까.
“나는…….”
그리고 베른은 지금 그 [설정]을 스스로 바꿀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베른’이라는 인물은 앞으로 내 계획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고, 나는 그가 머저리처럼 자살하는 걸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말하세요.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겪었던 모든 일이, 모든 인연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그와 함께 베른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너……!”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선택지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지금 그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그가 만들어 낸 모든 인연은 다 거짓이 된다.
베로니카도, 바네사도, 용사 가람도, 에단도.
그의 대답에 따라서, 그가 만났던 모든 이들의 존재 역시도 함께 부정되는 것이다.
베른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준 것에 불과했다.
베른은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많은 것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이 끝났는지,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베른은 애써 연기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어느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내가 무언가 착각한 모양이다.”
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기였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착각이요?”
“그래, 착각. 말이 안 되지. 이 모든 게 가짜라니…… 안 그래?”
「대다수의 독자가 베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즐겜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생각보다 시시한 대답에 먹고 있던 팝콘을 쓰레기통에 던집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미 예상했던 대답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개연성]이 조용히 물러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굳게 다문 베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으음…… 무슨 일이야?”
그제야 긴 잠에서 깨어난 하이디의 목소리에 내가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렇죠?”
내가 그렇게 말하며 베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애써 내뱉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다.”
베른의 말이 끝난 후, 그제야 쓰러져 있던 ‘용사 일행’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 여기는 어디야?”
“돌아온 건가?”
“뭐, 뭐야? 디오! 빨리 일어나 봐!”
가장 먼저 일어난 루와 키리엘 덕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이나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어난 디오가 눈을 부릅뜨고는 키리엘의 몸을 붙잡았다.
“……키리엘?”
갑작스러운 디오의 반응에 키리엘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왜, 왜 그래?”
“돌아왔구나.”
그렇게 말한 디오의 목소리는 마냥 반가운 눈치는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착잡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야 뻔했다.
‘정 많은 놈 같으니라고.’
비록 ‘불지옥 반도’ 때는 상황 자체가 특수했기 때문에 키리엘 안에 있던 마왕이 나타난 것일 테지만, 아마 앞으로 그녀가 나타날 일은 없을 터였다.
‘뭐, 주인공이 진심으로 바란다면 모르겠지만.’
어차피 키리엘이 있는 이상 그럴 확률은 희박했으니, 굳이 그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돌아…… 온 건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디오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 너……!”
디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마치 외나무다리에서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일부 독자가 당신의 양심에 감탄합니다!」
아님 말고.
“야, 야, 잠깐 기다려 봐.”
“아인즈 반!”
디오의 성검이 불을 토했다. 물론 디오가 각 잡고 덤벼 봤자 나한테는 안 될 테지만, 지금 상황이 힘으로 해결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맞아 줄까.’
그렇게 해서 저 머저리 같은 주인공의 화를 풀 수 있다면 크게 밑지는 장사도 아닐 터였다. 내가 비록 [서브 주인공]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 [주인공]의 존재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죽여주지.”
디오가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이것 봐라.’
조금은 맞아 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망할 주인공께서는 조금만 때리고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도 적당히 상대해 줄 수밖에.
“내가 잘못한 것도 조금 있기는 하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그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낯짝을 당장 뭉개 주지.”
「[주인공] 버프가 발동합니다!」
「[서브 주인공] 버프가 발동합니다!」
「[서브 주인공] 버프 효과가 [주인공] 버프에 의해서 상쇄됩니다!」
그렇게 디오가 나를 향해서 달려들던 순간이었다.
[끼륵!]
갑작스럽게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아자토스였다.
나조차도 잠시 잊고 있었던 호문쿨루스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뿜어내며 단숨에 디오의 힘을 막아냈다.
“끼어들지 마라!”
디오가 그렇게 외치며 재차 성검을 휘둘렀으나 돌아온 것은 순식간에 사그라진 성검의 불이었다.
“……뭐?”
디오의 눈이 당황함으로 물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 이 상황에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매우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아자토스?’
[끼잇!]
이 상황에 대한 인과는 확실했다. 아자토스가 디오를 막아섰고, 디오의 힘마저도 말 그대로 ‘없애’ 버렸다.
예전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일.
그 말은 즉, 아자토스의 힘이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용사와 마왕의 힘을 가진 디오를 힘으로 찍어 누를 정도로.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그랬었다.
‘불지옥 반도’에 처음 갔다 왔을 때, 아자토스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알겠군.’
아자토스는 감정을 먹고 자라는 호문쿨루스다. 그리고 ‘불지옥 반도’는 온갖 부의 감정들이 모여 있는 끔찍한 지옥을 재현시킨 곳이다.
그리고 이제 그 지옥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 부서진 파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답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아자토스의 덩치는 예전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예전엔 드래곤조차도 귀엽게 보일 정도의 덩치였다면, 지금은 인간보다 약간 큰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그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너……!”
디오는 애써 힘을 끌어내려고 했으나, 어느새 그의 전신에는 무력감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가진 힘을 한낱 꿈으로 ‘부정’당한 것이었다.
‘과연…….’
‘불지옥 반도’를 제물로 아자토스는 상식을 뛰어넘는 괴물이 되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한낱 꿈으로 만드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은 내가 원하는 ‘끝’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생각지도 못했던 소득이었다.
“이제 그만해.”
내가 아자토스에게 말하자, 디오의 힘을 ‘부정’하고 있던 아자토스의 힘이 사라지며 디오에게서 다시금 용사와 마왕의 힘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미 전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이제는 ‘죽여라’라는 뻔한 말도 안 하는 걸 보니, 여전히 내가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강제 복원력]이 발동합니다!」
「치명적인 오류가 수정되어, [메인 시나리오] 진행도가 일부 조정됩니다.」
「[Chapter 34]의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됩니다.」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알아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