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Chapter 34: 경계 (4)
그리고 나는 곧장 옛 제국의 영토를 돌았다. 그것은 내 확신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이 ‘과정’ 자체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저 멀리 뒤에서 하이디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 확신에 대한 근거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제도를 시작으로, ‘반’의 고향마을까지.
제법 넓은 영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보이는 건 온통 황량한 폐허와 말라비틀어진 들판뿐이었다.
비록 아직 제국 전역을 돌아본 것은 아니었으나, 아마 어디를 가더라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제법 일을 크게 벌여 놨는데.’
제국의 멸망.
직접 돌아다닌 덕에 더욱 확신한 것이지만, 분명히 이 사건에는 그 어떤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즉, 언젠가는 그게 누구이든 간에 들통이 난다는 이야기.
그 후에 일어날 일은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강제 복원력]이 들통날 것이 뻔한 이 사건을 왜 일으켰냐에 대한 것이었다.
바로 지금 그에 대한 정답이 눈앞에 있었다.
“알아낸 건 있나?”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베른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것참, 흥미롭군. 들어봐도 되나?”
유난히 딱딱해진 말투를 보니, 아무래도 저 상태가 풀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나중에요.”
나는 일단 대답을 미루었다.
결과적으로 그도 알아야 할 사실이긴 했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일어난 이 ‘멸망’ 자체가 베른의 존재와 무척이나 큰 밀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단코 이 쪼잔한 아저씨에게 빈정이 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로.
「오늘도 공짜로 얻은 커피 쿠폰으로 하루를 시작한 한 독자가 당신의 쪼잔함에 깊은 동질감을 표합니다!」
시끄러워, 인마.
“알았다.”
예상외로 베른이 쉽게 수긍하며 물러나자, 나는 곧장 모두를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에드윈을 찾으러 갈 겁니다.”
내 말에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하이디였고, 가장 무관심을 표한 것은 루였다.
“정말?”
“흥.”
그나저나…… 인간을 사랑하는 드래곤이라면서 유독 에드윈에게 엄격한 걸 보니 그녀가 말하는 ‘인간’의 기준이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평등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루’의 인종 차별적 언행에 깊은 거부감을 표합니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루’가 가진 생각은 인종 차별이 아니라 그저 개인의 기호일 뿐이라며, 평등주의자의 발언을 비난합니다!」
「평등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전쟁을 선포합니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를 받아들입니다!」
……가지가지 한다.
어쨌거나, 본의 아니게 일어난 키배 덕에 당분간 독자들의 시선은 저쪽으로 쏠릴 듯했다.
움직이기에는 바로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는 말이었다.
“가시죠.”
“에드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낸 거야?”
하이디의 물음에 내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사실, 그녀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가 사라진 과정 속에 [개연성]이 없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뜬금없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찾아낼 수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뜬금없는 방법을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전개 생략]을 사용하였습니다!」
「[10,000G]가 소요됩니다.」
「현재 적립된 정산금: 305,500G」
* * *
그렇게 길을 떠난 우리는 몇 분도 채 걷지 않아서 황량한 들판에서 홀로 멍하니 서 있는 에드윈을 만날 수 있었다.
“……어? 너희는…….”
「다수의 독자가 고작 한 페이지 만에 끝난 ‘에드윈’을 찾는 여정에 대해서 기묘함을 표합니다!」
「운명론자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운명 같은 재회에 기쁨을 표합니다!」
이미 짜인 각본이긴 했지만, 그 말마따나 참으로 운명 같은 재회가 아닐 수 없었다.
“에드윈!”
도대체 언제부터 친했다고 에드윈을 향해서 달려가 안기는 하이디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질 그 자체였다.
“어? 어? 얘는 나한테 왜 이래?”
당연히 하이디를 받아든 에드윈의 표정에서 저도 모르게 명백한 당황함이 드러났다.
하긴, 내가 에드윈이였어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저렇게까지 달려들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라도 뻗었을 것이다.
에드윈의 품에 안겨 든 하이디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다시는…… 다시는 아무도 혼자 두지 않아.”
「방구석 정신과 의사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의 PTSD 증세에 대해서 정밀 진단을 요구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새삼 당신의 쓰레기 짓을 다시금 떠올리며 ‘하이디’에게 사죄를 요구합니다!」
안 그래도 이미지가 쓰레기로 전락하고 있는데, 까라면 까는 수밖에.
“미안하다.”
“응?”
“늦게 찾아서.”
“……어? 어어? 어, 그래…….”
본의 아니게 사과를 대신 받은 에드윈의 표정에서 이번에는 당혹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딘가 만족한 듯한 하이디의 표정을 보자, 그제야 조금은 용서받았나 싶었다.
하이디가 에드윈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 질문에 에드윈이 기묘한 표정을 한번 짓고는 말했다.
“여기에.”
“응?”
“그때 ‘게이트’를 통해서 빨려들어 간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이곳이더라고.”
역시 그렇게 된 건가.
이미 예상했던 사안이기는 했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니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어쨌거나 더 이상 에드윈이 입을 열어서는 곤란했기에 내가 중간에 그들의 대화를 막아섰다.
“잠깐.”
“갑자기 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하자.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내가 정론을 내세우자, 고개를 끄덕인 하이디와는 다르게 에드윈의 표정이 기묘함으로 물들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훨씬 더 중요한 일?”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녀에게는 [메인 시나리오]의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즉, 그녀는 현재 ‘용사 일행’에 소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 그건…….”
“기다려.”
에드윈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하이디가 나서려 하자, 내가 그녀를 막아섰다. 아직 에드윈에게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알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거라면.”
“너는 지금까지 이곳에 있었던 게 확실하겠지?”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어? 맞아.”
“그러면 그동안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지?”
“뭘 하다니? 딱히 한 건 없는데?”
적어도, 자각은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미 그녀의 존재 자체가, [개연성]에 의해서 치밀하게 짜인 함정의 일부라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그 함정을 돌파해야만 했다.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뭐?”
“대답도 하지 마. 듣기만 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녀가 버럭 화를 내려고 하자, 어느새 그녀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있는 하이디의 시선이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사슴 눈망울 같은 그 눈동자를 보자, 에드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 알았어. 이제부터 아무런 대답도 안 할 테니까 마음대로 지껄여 봐.”
나이스 어시스트.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이디의 병리학적 증상이 크게 도움이 된 셈이었다.
“잘 들어.”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함정을 돌파하기 위한, 이야기를.
“제국이 멸망했다.”
* * *
에드윈의 표정이 대놓고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전에 말해 놓고 바로 말을 바꾸는 것도 우습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국은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근거는 간단했다.
제국의 멸망에는 조금의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게 된다.
아무런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잘도 이딴 생각을 해냈군.’
비록 적이지만, 그 잔머리에는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어설펐다면 바로 당해 버렸을 정도로 이 함정은 치밀했다.
멸망했으나, 멸망하지 않은 제국.
이 모순적인 관계가 바로 이 함정의 핵심이었다.
그 함정의 요지는 이러했다.
[개연성]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멸망하지도 않은 제국을 멸망시켰다.
아니, 그렇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메인 시나리오]를 통해서 디오를 비롯한 ‘용사 일행’들을 유인했다.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밝혀내라고.
그러나 이 함정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강제 복원력]을 위시한 [개연성]이 가장 큰 방해물이 될 내 행동까지도 예측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 사건의 배후가 ‘개연성의 사도’임을 밝혀낼 것이라고 믿었다.
적의 유능을 믿은 셈.
실제로 나는 그 믿음대로 마왕 므를 비롯한 베른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 사건이 ‘개연성의 사도’의 짓임을 확신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함정이었다.
‘베른은 계속해서 말했다. 제국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누차 말하지만, 제국이 멸망한 과정 속에는 그 어떤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배후가 뒤늦게 ‘개연성의 사도’로 밝혀진다면?
그리고 일어날 일은 간단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일으킨 ‘개연성의 사도’는 결국 그들이 가진 본질과 그 존재에 대한 [개연성]을 잃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제국의 멸망’과 함께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와 깊게 연관된 베른도 함께 말이다.
‘제국의 멸망을 미끼로, 개연성의 사도를 비롯한 베른을 완전히 없애 버릴 계획이었겠지.’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무서운 함정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함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로 에드윈의 존재였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입을 열었다면, 그녀의 입에서 폭탄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베른과는 조금 다르게 제국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한 이였다.
‘아마…… 내버려 두었다면 처음부터 ‘제국’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말했겠지.’
즉, 이 함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할 수 없는 온갖 트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함정에 당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에드윈을 향해서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 강대했던 제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 않아?”
에드윈의 표정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기묘함으로 물들었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서 그대로 이어서 말했다.
“생각해 봐. 그 강대했던 제국을 하루아침에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힌트에 자신의 추리력을 발산합니다!」
무죄를 입증하는 방법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범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제국을 멸망시킨 건, 바로 ‘신’이다.”
그것도 제일 만만한 놈을 골라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