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Chapter 35: 개연성의 사도 (2)
베른이 사라졌다.
그 사실이 ‘인지’되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독자들이었다.
「일부 독자가 새로운 떡밥을 찾아서 시선을 돌립니다!」
「[진주인공]을 지지하는 일부 독자가 ‘베른’을 찾아서 시선을 돌립니다!」
아무튼, 영악하기는.
아마도 그쪽이 더 재미있어 보이니까 냅다 나른 거겠지.
하지만 그 사실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인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까.
‘현재 베른의 위치를, 독자들은 알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베른은 막대한 [비중]을 가진 등장인물이었고,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상황에서 독자들은 그를 지켜볼 수 있다.
바로 지금 상황처럼.
그렇다면 거리낄 것은 없었다. 남은 일은 늘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잠깐 갔다 올게.”
“……혼자서?”
하이디의 눈동자가 유난히 떨렸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분명했기에 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방 따라갈게.”
내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디오에게 시선을 옮기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디오가 나머지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서쪽으로 가 있지.”
“그래.”
비록 미덥지 못한 놈이긴 했으나, 명색이 [주인공]이니만큼 하이디나 다른 일행을 이전과 같은 위기에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슬슬 가 볼까.’
그것이 본의든, 타의든지 간에 어차피 베른이 사라진 이유는 분명했다.
개연성의 사도.
그들이 나섰고,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그들에게 보여 줄 차례였다.
내 목적이 무엇인지.
「내비게이션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안내를 시작합니다!」
* * *
걷고, 또 걸었다.
그 과정에서 베른은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선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있었지?
의문은 길었지만, 그는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네사.”
베른의 부름에 그와 나란히 걷고 있던 여자의 시선이 살며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본 베른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치 인형 같은 움직임이었다.
“……바네사?”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인형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네사의 모습에 베른은 어울리지 않는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
그제야 베른은 정신을 차리고서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자신은 일행과 함께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밝히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기억이 거기서 끝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거지?’
마치 술이라도 취했던 것처럼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계기와 과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정말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한 현상.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베른의 눈이 살며시 가늘어졌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안 좋군.’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뿌옇게 물든 안개와 그 너머로 희끗하게 보이는 정체 모를 실루엣들이 전부였다.
“여기는 어디지?”
“…….”
베른이 바네사를 바라보며 물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베른은 사납게 웃으며 살며시 허공으로 손을 뻗고는 어느새 그곳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쟁기를 쥐었다.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뒤집어엎기라도 할 것처럼 그 흉악한 물건을 치켜들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고.”
베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콰카카캉!
그와 함께 안개처럼 뿌옇게 물들어 있는 공간이 통째로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기묘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
“나는 누구야, 나는 누구야.”
“죽여 줘. 죽여 줘. 죽여 줘.”
베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대강이나마 짐작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여기는 어디지?”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베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망설임 없이 쟁기를 휘둘렀다.
더욱더 강하고, 흉악하게.
콰카카캉!
그리고 이번에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귀가 떨어질 정도로 울렸다.
“꺄아아아악!”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마치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목소리.
“……역시.”
그제야 베른은 조금씩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지?”
베른이 시선을 옮겨서 여전히 인형처럼 서 있는 바네사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정말로 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베른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지.”
그와 함께 그가 치켜든 쟁기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이 세계의 규칙을 파괴하는 힘.
그 힘이 지금 베른의 손에서 일어났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흩어져 사라졌다.
츠르륵-.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막아섰다.
“그만둬.”
바네사였다.
그제야 입을 연 바네사의 모습에 베른이 이죽거렸다.
“여전히 제멋대로군.”
“네가 저들에게 이럴 권리는 없어.”
그렇게 말하는 바네사의 얼굴에는 어느새 연민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권리? ‘저것들’이 도대체 뭔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어.”
“권리라……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람을 납치한 너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그렇다면 내가 묻지. 너에게 나를 이 정체 모를 곳으로 납치할 권리가 있었나?”
베른의 쏘아붙임에 바네사의 표정이 약간 슬프게 물들었다.
“있어.”
“있다고?”
“네가 나를 죽였잖아. 사사로운 개인의 복수 정도는 허용해 줘야지.”
“너…….”
애써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했던 사실이 본인의 입에서 다시금 나오자 베른의 눈동자에 훤히 동요가 드러났다.
제아무리 온갖 기상천외한 일을 겪어왔던 전대 용사라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였던 사람이자, 사랑했던 여자.
베른은 이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급히 말을 돌렸다.
“……이곳은 어디지?”
“경계.”
“무엇과 무엇의?”
베른의 질문에 바네사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알고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면서 묻는 거야?”
그녀의 말에 베른이 착잡한 기색을 표하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저들은 뭐지?”
베른이 가리킨 것은 안개 너머에서 보이는 크고 작은 실루엣들이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자들.”
“요컨대, 망자라는 건가?”
베른의 말에 바네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뭐지?”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확인하는 그 고약한 성미는 그대로네. 좋아, 말해 줄게. 저들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존재하지도 사라지지도 못한 자들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어느새 물기로 촉촉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어디든지 존재할 수 있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처럼.”
“……뭐?”
그녀의 말과 함께 베른의 눈동자에서 동요의 물결이 일어났다.
머리로 짐작하는 것과 그 사실을 직접 입으로 전해 듣는 것은 다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베른이었기에, 그는 거칠게 몰아치는 동요를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마치 다시는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기회라도 된다는 듯이.
“부탁이야.”
베른의 눈동자가 어느새 공허하게 물들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구차하게 삶을 연명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 거짓을 이어 갔는가.
“우리의 ‘이야기’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거짓을, 이만 끝내 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었다.
“나는…….”
베른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그 알량한 욕심으로 이들의 삶을 농락해도 되는 걸까?
그들의 의지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데도?
“베른.”
그녀의 부름에 베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기로.
“결정한 거야?”
“그래.”
베른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쟁기를 바라보았다.
친우였던 대장장이 한스가 주었던 농기구.
그러나 그 친우는, 사실 처음부터 없었다.
“우습군.”
베른은 그렇게 스스로를 비웃으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옛 친우에게, 그리고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광대보다 못해진 자기 자신에게.
“나는…….”
한 마디.
두 마디.
그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그는 스스로를 부정했다. 거짓된 삶을 지워 갔다.
“……그래, 사실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철저한 허구지.”
「[강제 복원력]이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을 주시합니다!」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베른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서서히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또 그로 인해서 사라질 것들.
「[강제 복원력]이 ‘거짓된 존재’에 대한 집행을 준비합니다!」
“드디어…….”
그의 앞에 선 바네사가 조용히 눈을 감자, 베른도 조용히 그녀를 마주 보며 함께 눈을 감았다.
이제 몇 마디만 더 내뱉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누구 마음대로.”
삐딱하고, 또 삐딱한 목소리.
“다 큰 어른이 납치나 당하고…… 한심해서 원.”
베른은 그제야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납기 짝이 없는 눈매와 세상사 모든 불만을 짊어진 것만 같은 비틀어진 입술.
그는 그 비틀어진 얼굴을 가진 주인을 알고 있었다.
“……반?”
“너무 반갑죠? 그런데 저는 마냥 그렇지만은 않네요.”
“네가 대체 어떻게 여기를…….”
“지금 궁금해야 할 것도 그게 아니고요.”
아인즈 반이 말했다.
“언제까지 과거에 연연할 셈이죠?”
“……이미 끝난 결정이다.”
“아직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하죠.”
“뭐?”
그와 함께 흩어져 가던 베른의 몸이 천천히 다시 수복되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짓을……!”
“제가 예전에 말했죠?”
「일부 [개연성]이 수복되기 시작합니다!」
「[강제 복원력]이 등장인물, ‘아인즈 반’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도, 자기 눈에 하늘이 보이지 않게는 만들 수 있다고.”
베른은 그제야 아인즈 반이 무엇인가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자신의 결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
“지금부터, 당신의 과거를 ‘생략’할 겁니다.”
「[전개 생략]이 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