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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156화 (156/164)

◈ 156화 Chapter 35: 개연성의 사도 (3)

과거.

복잡한 시간적 개념을 떠나서, 그것은 본디 ‘생략’이라는 단어와 그다지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존재하고, 또 그 과거는 그 사람을 이루는 일부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아니다.

진절머리 날만큼 뻔하고, 이제는 망가지고 뭉개져서 더 이상 ‘세계’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들도 이곳에서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과거를 아무것도 없었던 백지로 만드는 것일지라도.

「[전개 생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치직-.

치지직-!

그와 함께 베른의 주위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며 그의 주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지워 갔다.

“아아, 드디어…….”

“이 거짓된 삶의 종지부를 찍는구나.”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안개 속에 숨어 있는 실루엣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며 점차 공간 자체가 붕괴했다.

베른에 의해서 탄생한, 그리고 베른으로 인해서 존재한 하나의 세계가 붕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 그만둬!”

핏대를 가득 올린 채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비명이 가득 섞여 있었다.

내가 그의 비명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생각 없어요.”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일부 과거가 [생략]됩니다!」

“반!”

저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베른이 무엇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베른.”

“또 그럴듯한 말장난으로 나를 농락할 셈이냐! 듣고 싶지 않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당신의 말이라면 일단 의심하고 보는 ‘베른’의 행동을 매우 칭찬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란 놈의 신용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회의감이 들 정도였으나 어차피 개인의 아집은 상황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었다.

“진정해요.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과 그들의 몫이니까.”

“웃기지…….”

단호하게 반박하려던 베른은 말을 멈췄다.

내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나는…….”

그들은 사라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도 몇몇은 분명히 아직까지도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는 듯이.

그와 함께 베른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옆에서 여전히 서 있는 한 여자에게 옮겨졌다.

“……바네사?”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기묘했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흐릿한 그 형체는 마치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 큰 선택을 앞둔 것처럼.

그리고 그녀가 무슨 선택을 앞두었는지는 뻔했다.

“기억되지 않는 기억이라고 해서,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죠.”

베른이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모순이야.”

“그렇죠, 모순이죠. 하지만 그렇기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바네사의 몸이 거칠게 떨리며 흩어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이제 그녀의 운명은 내 손을 떠났다.

“베른, 나는…….”

남은 것은 순전히 그들의 몫이었다.

기억할 것인지 기억하지 않을 것인지.

또, 사라질 것인지 사라지지 않을 것인지.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바네사!”

“나는, 원래대로, 돌아가야…….”

베른이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충혈된 눈으로 핏대를 올렸다.

“멈춰! 멈추라고!”

악을 쓰는 그를 바라보며 바네사가 슬픈 기색으로 말했다.

“이만 놔 줘, 베른. 예전에 했던 것처럼.”

“웃기지 마!”

베른이 애써 감정을 누르듯이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안 보내.”

“……베른.”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해.”

베른이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바네사가 씁쓸함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아무런 소용 없어.”

“아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있어.”

확신에 찬 목소리.

아니, 확신에 찬 것처럼 보이는 목소리였다.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베른’이 은근슬쩍 흘린 떡밥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거짓을 진실로 바꿀 힘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이 ‘마왕 바네사’를 기억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에게 [비중]이 생성됩니다!」

「현재 비중: 0.2%」

“……어?”

바네사가 얼이 빠진 얼굴로 어느새 소멸을 멈추고 원래대로 되돌아온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여전히 얼이 빠진 그녀를 바라보며 베른은 그저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이제야 잡았어.”

그리고는 한 번 더 말했다.

“이제야 잡았다고.”

“베른, 나는…….”

베른의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더 이상 허깨비가 아니었으니까.

“시끄러워. 안 들을 거니까.”

“……애처럼 굴지 마.”

“애라……. 베로니카는 항상 나에게 애답게 굴라고 했었는데, 다 늙어서 이러는군. ……나쁘지 않아.”

베른은 그렇게 애써 웃었다.

무척이나 어색한 미소였다.

“진작 좀 이렇게 살 걸 그랬어. 애처럼 응석도 좀 부리고. 떼도 쓰고.”

그리고는 스스로 되뇌듯이 말했다.

“그럴 걸 그랬어.”

“베른.”

그녀가 조용히 베른을 마주 안았다.

「다수의 독자가 ‘베른’과 ‘바네사’의 감동적인 재회에 주목합니다!」

「야설 빌런이 다음 진도는 언제 나가냐며 콧김을 내뿜습니다!」

그리고 베른의 시선이 살며시 나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뭘, 우리 사이에.”

“아니, 정말로 고맙다.”

그렇게 말하는 베른의 표정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물론, 딱히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냥 속 편하게 생각하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인물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이번 [에피소드]가 이대로 평화롭게 끝날 리가 없다며 모종의 사건을 예견합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고인물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때였다.

「[강제 복원력]이 요동칩니다!」

「[강제 복원력]이 치명적인 오류를 포착합니다.」

「[강제 복원력]이 집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껏 왜 가만히 있나 했다.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의 [비중]이 하락합니다!」

「현재 비중: 0.1%」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이 다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에 실패한 사냥개가 대신 사냥꾼의 굶주림을 채워 주듯이.

“……베른?”

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그녀의 몸이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의 [비중]이 하락합니다!」

「현재 비중: 0.05%」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의 [비중]이 하락합니다!」

「현재 비중: 0.025%」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의 [비중]이 하락합니다!」

「현재 비중: 0.01%」

“바네사! 이, 이게 도대체 왜……!”

[강제 복원력]의 집행.

이것은 제아무리 베른이 그녀를 기억하고, 또 존재하기를 바라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죽음에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과정 자체가, [강제 복원력]으로 인해서 [개연성의 사도]로 다시 탄생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냐?”

있다.

그것도 이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킬 카드가.

“아자토스.”

내 부름과 함께 아자토스가 살며시 내 그림자를 타고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끼릿!]

지금 베른의 과거는 [전개 생략]에 의해서 ‘생략’이 된 상태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인 셈.

나는 지금부터 그 백지에 철저히 내 입맛대로 내용을 써넣을 것이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어요.”

아자토스의 능력은 ‘현실 조작’.

그리고 이제 그 힘은 못 미치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설사 그것이 ‘용사’의 과거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베른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악몽을 꾼 겁니다. 마왕이 된 바네사를 죽이는 악몽.”

“……악몽이라고?”

“예, 그건 꿈이었습니다. 바네사는 죽지 않았고, 지금도 당신 앞에 서 있으니까.”

「[강제 복원력]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어딜.

“아자토스!”

[끼잇!]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현실의 경계가 무뎌졌다.

베른이 겪었던 몇 가지 ‘과거’는 꿈이 되었고, 또 몇 가지는 진실이 되었다.

「[개연성 무시]의 효과로, 일부 [개연성]이 무시됩니다!」

그와 함께 바네사의 몸에서 점차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0.025%」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0.05%」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0.1%」

‘이제야 끝났나.’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온 바네사의 몸과 그것을 또다시 끌어안은 베른의 모습은 마치 데자뷰를 보는 것 같았다.

“……고마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감사를 표한 것이 바네사라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뭐, 그쪽 아저씨한테 감사하세요.”

내가 그렇게 툭 던지듯이 말한 순간이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거참, 이건 또 오랜만에 듣는구만.

이게 무슨 [클리셰]인지는 뻔했다.

그렇다면 나도 적극적으로 그에 응해 줄 수밖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바네사.”

“……내 도움?”

“예. 당신이 있다면,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어요.”

잘못된 것의 대부분의 원인이 다름 아닌 나 때문이라는 점은 참으로 우스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클리셰가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그와 함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이 된 적]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아군이 된 적] 클리셰 효과로 등장인물, ‘마왕 바네사’가 ‘용사 일행’에 합류합니다!」

쉽기는.

「다수의 독자가 아군이 된 ‘바네사’에게 주목합니다!」

「강태공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자연스럽게 호구를 낚아채는 당신의 낚시력에 감탄합니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또 불우한 희생자가 생겼다며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그리고 내가 바네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당신들 약점이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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