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Chapter 35: 개연성의 사도 (5)
「[미리보기]가 종료됩니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네.’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으면 이런 심정일까.
혹시나 해서 디오 쪽을 살펴봤건만 아무래도 내 걱정은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이거지.’
용사 가람의 제자, 에단.
그는 베른의 과거 이야기에 의해 탄생했지만, 한편으로는 디오의 탄생과 엮인 유일한 인물이었다.
만약 여기서 [강제 복원력]의 의도대로 ‘에단’의 존재가 완전히 부정되었다면 디오 역시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 진짜 이유는 아마 겉으로 보인 제자에 대한 애정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사라져서는 안 될 존재였기에, 에단은 그렇게 행동했다.
그것이 자신의 자유의지라고 믿으며.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에단’의 제자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왜곡하는 당신의 삐딱한 시선을 지적합니다!」
「아싸를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삐딱한 시선에 익숙한 동질감을 느끼며 공감을 표합니다!」
……어쨌거나, 이번 일은 어떻게든 넘어갔다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우선 가능한 빨리 디오 일행에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서두르죠.”
내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서는 한창 깨가 쏟아지는 와중이었다.
“베른.”
“바네사.”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그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이름을 불러댔다.
「야설 빌런이 ‘전대 용사’와 ‘전대 마왕’ 커플을 지지합니다!」
꼴을 보아하니, 조금만 더 있으면 깨가 아니라 아예 심의 불가 판정이 내려질 판이였다.
“……방해꾼은 빠져 줄까요?”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한 말이었으나, 역시나 베른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럴래?”
“속도를 올리죠.”
「야설 빌런이 당신을 적대합니다!」
시끄러워, 인마.
“정 급하면 먼저 가도 상관없다만?”
“꼭 남 일처럼 얘기하시네요.”
“그렇게 들렸나? 그러면 그럴 수도 있겠군. 늘 그랬잖아?”
이 아저씨 봐라…….
베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분명했다.
그는 지금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화를 받아 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서두르죠.”
「일부 독자가 말을 돌리려는 당신의 뻔한 수작을 지적합니다!」
그 말처럼 뻔한 수작이었고, 베른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뻔한 세계에도,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러지.”
그렇기에 그는 내 뻔한 수작에 넘어가 주었다.
결착은 그때 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베른.”
바네사의 불길한 눈빛이 베른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베른이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모두 다 잘될 테니까.”
* * *
디오 일행을 따라잡는 것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개연성 무시]와 [전개 생략]을 통해서 그곳까지 가는 여정 자체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일부 독자가 미묘하게 반복되는 장면전환에 [작가]의 귀차니즘을 의심합니다!」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불신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영향력이 일부 감소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영향력이 하락함에 따라,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 ‘최하치’로 하락합니다!」
조금 빨리 가려고 한 것뿐인데, 본의 아니게 녀석에게 엿도 한번 먹이다니…….
약 오르지 이놈아?
「다수의 독자가 야비하기 짝이 없는 당신의 표정을 바라보며 명존쎄를 요구합니다!」
「관리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당신에게 [천벌]을 내립니다!」
‘천벌?’
그 순간, 서늘한 감각이 다가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린 정체 모를 무엇인가를 피했다.
철퍽-.
그와 함께 썩어 문드러진 베른의 표정.
그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새똥이었다.
“…….”
본래라면 이 상황에서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은 새똥 따위가 아니라 벼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조차도 내리치지 못할 정도로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이제는 고작해야 이런 장난질밖에 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이가 없군.”
바네사가 준 천으로 새똥을 닦아 낸 베른의 시선이 왜인지 모르게 나를 향했다.
“뭘 봐요?”
찔린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내가 한 일이 아닌 것도 팩트였다.
“새 한 마리 없는 황량한 하늘에서 새똥이라…….”
“그럴 수도 있죠.”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뭐, 정말로 내가 한 건 아니었으니까.
“반!”
그때, 가장 먼저 나를 반긴 하이디를 시작으로 디오 일행들이 우리를 마중했다.
“별일 없었지?”
“응.”
굳이 떠보려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대놓고 그렇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하는 하이디를 보니 어딘가 정체 모를 소름이 돋았다.
……디오에게 생긴 일이 별일 아니라는 건가?
순간적으로 하이디에게 [사이코패스] 성향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었으나,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는 디오의 눈을 바라보니 그런 생각은 접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하이디 나름대로 디오에게 생겼던 일을 감춰 주려 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라고 하면 이젠 너무 식상하고, 안녕했냐?”
“…….”
내 인사 아닌 인사에 디오는 대답 대신에 베른과 함께 온 바네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 말마따나 여전히 싸가지 없는 놈이었다.
“그쪽은?”
디오의 물음에 베른이 대신 대답했다.
“바네사.”
“……바네사라고? 전대 마왕 바네사?”
“그래.”
디오가 베른에게 다가가서 으르렁댔다.
“지금 무슨 생각이지? 저 여자는 적이다.”
“지금은 아니야.”
“단언할 수 있나?”
“그래.”
일말의 고민조차 없는 베른의 대답에 디오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걸 누가 증명하지?”
“내가 할게.”
디오의 시선이 살며시 목소리의 주인인 바네사를 향했다.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
“당사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일이라는 건데?”
“증명의 객관성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말은 잘해. 누구를 닮아서 이런 건지.”
그녀의 말에 디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디오는 대답할 말을 찾기라도 하듯이 애써 붉게 물든 눈동자를 굴렸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바네사가 말했다.
“증명됐어?”
“……이따위 말장난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라.”
“쳇, 안 통하네. 귀여운 맛이 없어.”
“나를 놀림감으로 아는군.”
“아닌 것 같아?”
그녀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디오는 입을 꾹 닫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무의미한 대화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 둘게. 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녀의 말에 디오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그건 너희의 몫이지. 적인지, 아군인지. 그리고 무엇이 될지.”
* * *
내가 바네사에게 [개연성의 사도]에 대한 약점을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약점?”
-“간단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거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
그러나 내가 굳이 그녀에게 직접 그 사실을 물은 것은, 그녀의 입을 통해서 [개연성의 사도]에 대한 약점이 직접 공인되는 것 자체가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디오와 나머지 일행들을 향해서 말했다.
“자, 자, 이쯤에서 그만하고 이만 가죠.”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데우스 교단.
이 세계의 ‘신’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숭배하는 종교집단.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이기도 한 그곳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안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고대 유적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무너져 내리는 석조건물과 곳곳에 낀 거미줄과 자라난 덩굴들이었다.
“……처참하군.”
베른의 말마따나 곧 모습을 드러낸 데우스 교단의 모습은 말 그대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벼락은커녕 새똥이나 내리는 게 고작인 신의 위세가 대단하다면 그것 또한 우스울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데우스 교단의 모습은 현재 ‘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에드윈이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처럼 제아무리 세가 쇠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 주신인 종교인데 외부인이 단체로 교단 내부를 제집처럼 누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신도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망한 거 아니야?”
“그럴지도.”
곳곳에 가득 내려앉은 먼지들은 이곳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임을 말해 주었다.
명색이 작가라는 놈의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으면 굳이 여기에 올 필요는 없는 것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루의 지적에 내가 대답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듯이 이쯤 말했으면 뭐라도 온다는 말이지.
그때였다.
“……뭐지? 무언가가…… 오는 것 같은데.”
하이디의 말과 함께 이제는 무척이나 익숙해진 울렁거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이것이 무엇의 징조인지는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치직.
치지직-!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그와 함께, 인위적으로 찢어진 공간 사이로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연성의 사도]가 등장합니다!」
개연성의 사도.
내가 비틀어 낸 베른의 [설정] 속에서 탄생한, 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두 명의 사도는 베른에게 있어서 바네사나 베로니카와는 다른 의미로 특별한 이들일 것이다.
한 명은 죽을 만큼 보고 싶었을 테고, 다른 한 명은 말 그대로 죽이고 싶었을 테니까.
스승과 원수.
저 둘의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이들은 베른에게 있어서 그런 존재였다.
「[강제 복원력]이 [개연성의 사도]의 등장을 주시합니다!」
「[강제 복원력]이 [개연성의 사도]에게 의무의 수행을 요구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른이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스승님.”
“베른이냐.”
“예.”
“멀리서 보긴 했지만, 너도 이제 그때의 내 나이가 되었구나.”
“조금 더 먹었죠.”
베른은 그렇게 말하며 용사 가람의 옆에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 역시도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마왕 므로군. 스승님에게 안겨 있었던.”
“맞아.”
베른은 그렇게 ‘죽이고 싶은 쪽’의 얼굴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군.”
“뜻대로 해. 우리도 그렇게 할 테니.”
마치 선전포고처럼 울려 퍼진 므의 말과 함께 베른을 비롯한 일행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며 전투태세에 들어섰다.
베른이 마왕 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해. 용사와 마왕 사이에 존재하는 지긋지긋한 운명을 끊어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지.”
그렇게 말한 베른이 낮게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실패하지 말았어야지.”
베른의 목에서 갈라진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실패했기 때문에, 나는 소중한 것을 눈앞에서 잃은 것도 모자라서 직접 이 두 손으로 없애기까지 했어.”
절규처럼 울리는 베른의 말에 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옆에 있는 가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
“나를 죽이던가, 아니면 그 누구도 죽이지 말았어야지. 당신은 그래야만 했어. 적어도 그랬다면, 나는 소중한 것을 하나 정도는 지켰을 거야. 그런데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지.”
베른이 뽑아 든 쟁기의 끝을 겨누었다.
“마왕 므.”
그리고는 선포하듯이 말했다.
마치 벼르고 별러 왔던 복수라도 하듯이.
“나는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바네사가 말했듯이, 개연성의 사도의 약점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무엇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바로 지금처럼.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이 ‘마왕 므’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개연성]이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존재가 부정됨에 따라, 등장인물, ‘마왕 므’의 [비중]이 삭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