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Chapter 35: 개연성의 사도 (6)
그와 함께 마왕 므의 몸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앞에 다가온 자신의 소멸에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베른을 마주 보았다.
“그래, 네 말이 옳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이만 가라.”
베른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마치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올곧음이 모두를 납득시키지는 못해.”
그러나 그런 베른의 기대와는 달리, 므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위태롭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모두를 납득시킬 필요는 없어. 손바닥으로 가리는 건 하늘이 아니니까.”
누구한테 배웠는지 말도 참 잘한다.
물론, 그 상대도 마냥 만만한 건 아니었지만.
“그 손바닥으로 가리고 싶은 게 나인 모양이지?”
“아닌 것 같나?”
“아니, 나는 이해해. 네 복수심도, 지난날의 내 과오도. 과연 네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할 만해.”
“얌전히 사라져 주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베른의 말에 므가 반대편이 비쳐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말이란다. 그 누구보다도 내 존재를 바라고 있는 게 바로 너니까. 베른.”
「소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마왕 므’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므의 모습은 이제 사라지기 직전이었으나,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베른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미소 같았다.
“……뭐?”
“그저 네 증오를 담을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잖아?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져 봐.”
“네 멋대로 나를 판단하지 마라.”
“굳이 내가 할 필요도 없지. 보여지기 위한 존재란, 응당 그런 것이니까.”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마왕 므’의 [설정] 파괴성 발언에 주목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왕 므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베른의 눈동자 안에는 여전히 그녀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강제 복원력]이 [개연성의 사도]의 [개연성] 오류를 보조합니다!」
「등장인물, ‘마왕 므’의 [비중] 삭제가 보류됩니다!」
치직.
치지직-!
그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던 므의 몸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비디오를 역재생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명색이 [개연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나 다름없는 존재가 이렇게 시시하게 끝날 리가 없긴 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제 모습을 되찾은 므가 베른을 바라보았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약 올리는듯한 말투였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정말로 내가 했다고 믿어?”
그러나 그런 신용도 없는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말은 틀렸다고 볼 수 없었다.
‘이것 봐라…….’
베른의 수는 나름대로 훌륭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어설펐어.’
증오보다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얼핏 보면 개소리 같은 이 말은, 사실 이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진리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렇기에 베른이 정말로 므를 없애기를 원했다면 그녀의 앞에서 그녀에게 증오를 쏟아낼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녀를 무시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므는 사라지지 않고 다시 그의 앞에 섰다.
‘슬슬 나서야겠군.’
베른이 예상보다 잘해 준 것은 사실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잠깐.”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자, 가장 먼저 베른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불신의 기색이 만연한 상태로.
“……애송이.”
“그렇게 부르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무엇인가 변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것 또한 클리셰일 테니까.
“여기부터는 저한테 맡겨요.”
* * *
디오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몇 가지 전후 상황에 상관없이 디오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신…… 용사로군.”
“맞다. 네가 에단의 제자구나.”
평소였다면 함부로 스승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을 디오였으나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용사 가람.
에단과 베른의 스승.
디오에게 있어서는 까마득히 먼 존재였다.
“……맞습니다.”
“예의도 있고.”
“제 스승은 항상 제가 싸가지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유머 감각도 있고.”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입니다만.”
“겸손하기도 하군.”
용사, 가람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우리가 싸울 이유는 없으니, 저기로 가서 대화나 나누겠느냐? 아무래도 이곳은 분위기가 영 험악해서.”
가람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 있는 므와 베른의 대치는 이제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든 분쟁과 싸움에 항상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이유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다니, 너무 슬프지 않느냐?”
디오는 가람의 말에 이해할 수 있었다.
용사였기에 겪었던 괴로움과,
용사였기에 행했던 의무들.
“……그렇죠. 슬프죠.”
“우리는 꽤 통하는 구석이 있구나.”
“곧 서로 검을 겨눠야 할 테지만 말이죠.”
“에단이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그 여린 녀석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참 슬퍼했을 텐데.”
디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여린 녀석?”
제아무리 스승의 모든 시간을 지켜본 것은 아니라지만, 디오가 알기에 그 표현은 결코 스승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었다.
그런 디오를 이해한다는 듯이 가람은 그저 웃었다.
“하하, 아무래도 네 기억 속의 스승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구나.”
“……적어도 그런 표현이 어울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죠.”
가람이 쓸쓸하게 웃었다.
“마냥 여린 채로 보내기에는 모진 세월이었겠지. 변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야.”
“스승님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자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니, 꽤 성공한 스승이었구나.”
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그랬을 겁니다.”
“아부도 할 줄 알고. 에단 녀석이 제자를 정말 잘 키웠어.”
“아부의 유무가 잘 키운 제자의 척도가 되는 겁니까?”
“전혀 안 그런 녀석도 있거든.”
가람은 그렇게 말하며 베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베른과는 더 나눌 대화가 없으신 겁니까?”
“그래.”
“왜죠? 그 역시도 당신의 제자일 텐데. 저보다는 그쪽과 할 이야기가 더 많지 않겠습니까?”
“옛날부터 그랬거든. 항상 내가 뭘 가르치기 전에, 먼저 알아내곤 했지. 그 때문인지 우리 사이에는 원래부터 대화가 그리 많지 않았어.”
가람은 마치 회상에 잠긴 듯이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면 애답게 응석도 좀 부려도 될 텐데 말이야.”
“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아직도 그런단 말이야? 허어……. 그건 조금 걱정되는데.”
가람은 그렇게 농담처럼 말하고는 여전히 씁쓸한 미소로 디오를 바라보고는 다시 그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괜찮을 거다.”
그리고는 그 시선 속에 있는 옛 제자를 바라보았다.
“베른은 누구보다도, 물러날 때를 아는 녀석이니까.”
* * *
“여기부터는 저한테 맡겨요.”
베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서는 나를 막아서지 않았을 뿐.
그 나름대로 동의한 셈이다.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온 한 독자가 드디어 나서는 당신의 모습을 주목합니다!」
그렇게 베른이 비켜서자 므의 앞에 선 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왕 특유의 검은 머릿결과 눈동자.
이제는 몇 번이나 보았던 익숙한 모습이었다.
“오랜만…… 이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겠지?”
“그럴지도.”
“이번에는 제대로 목소리로 내고 있네?”
그녀가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꺄르르 웃었다.
“예쁜 성대지?”
내가 슬쩍 뒤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디오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칭얼대기 좋아하는 어느 정신연령 미성숙아보다는 훨씬.”
“비교 대상이 조금 그렇지만, 어쨌거나 칭찬이구나.”
“아니, 훨씬 더 듣기 싫다는 소리였는데.”
그녀가 다시 한번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너는 재밌어.”
“그 부분은 내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웃기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뜻이야.”
“글쎄? 듣는 사람이 재미있으면 그만 아닐까? 주어진 문제에서 꼭 출제자의 의도를 읽을 필요는 없듯이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방식이잖아?”
「대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마왕 므’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얼씨구야.
어째 이놈의 등장인물들은 날이 갈수록 하나 같이 혓바닥만 길어진다.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자연선택설을 지지하는 한 독자가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탐정을 자처하는 한 독자가 당신을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시끄러워, 이놈들아.
어쨌거나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원조의 품격을 보여 줄 수밖에.
“그랬었지.”
“지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들렸어? 그렇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꺄하하!”
므는 마치 미친 것처럼 한참을 웃었다.
어딘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웃음을 멈춘 그녀가 어느새 싸늘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장난은 여기까지 할 거지?”
“그거 유감이네. 이력서 특기란에 적을 수 있는 유일한 장기였는데.”
“내가 못 알아듣는 척을 해 줘야 할까? 뭣하면 내가 좋은 곳에 낙하산으로 꽂아 줄 수도 있는데?”
「다수의 독자가 ‘므’의 [설정] 파괴성 발언에 주목합니다!」
얼씨구야.
이제는 대놓고 선을 넘어 대시는구만.
“됐어. 보나 마나 가‘족’ 같은 기업이겠지.”
“그래? 아쉽네. 나중에 필요하면 말해.”
「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마왕 므’의 [설정] 오류를 지적합니다!」
「[강제 복원력]이 독자들의 항의를 묵살합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나저나 대놓고 이딴 짓을 해대면 그만큼 제 살을 깎아 먹는 일이 될 텐데도 저런 식이라니……. 어지간히도 다급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 다급함이 찾으려야 찾을 수 없던 빈틈을 만들어 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므가 웃었다.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거니?”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말해 봐. 왠지 너라면 질문도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므의 얼굴은 어느새 악동 같은 미소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기대한다면, 기대에 부응해 줄 수밖에.
“너희는 사라지기를 원하면서, 왜 정작 행동은 정반대지?”
“재미있는 말이네.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무슨 말이긴.
네가 나한테 낚였다는 소리지.
“그거 알아?”
클리셰.
상투어. 진부한 표현. 틀에 박힌 표현. 스테레오 타입.
그것을 가리키는 말들은 많지만, 그것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내가 해 왔던 것처럼 그것들을 부술 수도, 또 반대로 그에 충실하게 따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클리셰는 살아 있다.
그렇기에 어떤 클리셰들은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해서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반복된 행위로 [궤변] 클리셰가 생성됩니다!」
「[궤변]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궤변] 클리셰 효과로, 당신의 발언에 대한 설득력이 [500%] 증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