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Chapter 36: 기계장치의 신 (2)
그리고 눈앞에 있는 문자들이 육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요동쳤다.
명백한 당혹이었다.
「말도 안 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곳은 내가 만든 세계다.」
“이제는 아니지.”
그와 함께 눈앞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얼핏 보면 평범한 인간의 실루엣을 띠고 있었지만, 그 몸을 이루는 것은 결코 뼈와 살 따위가 아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활자가 녀석의 전신을 가득 채운 채로 요동쳤다.
늘 ‘바깥’에서 관망만 하던 관음증 환자 녀석이 드디어 이곳까지 끌려 내려온 것이다.
「내, 내가 어째서 이곳에…….」
“어때? 새장 속에 갇힌 기분이.”
내가 이죽거리자, 녀석의 얼굴 부분을 이루고 있는 문자열들이 꿈틀거리며 몇 가지 단어들을 나타냈다.
「혼란」 「당혹」 「분노」
우스운 광경이었다.
녀석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이, 말 그대로 얼굴에 다 나타난 것이다.
“제법 당혹스러우면서도 혼란스럽지만, 일단은 화도 조금 났나 보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녀석의 얼굴에 쓰여 있는 단어들이 바뀌었을 뿐.
「놀람」
독심술을 쓸 수 있다면 흡사 이런 기분일까.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녀석의 속이 이렇게 쉽게 눈에 들여다보이니 참으로 기분이 기묘했다.
그와 함께 녀석의 입에서 하나둘씩 뻗어 나온 자음과 모음이 이내 허공에서 서로 만나서 하나의 문장을 완성했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인즈 반.」
그리고 그런 녀석의 상태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러했다.
“마침 딱 때리기 좋게 생겼네.”
그와 함께 녀석의 주변에 생겨난 문자들이 마치 제 주인을 지키려는 듯이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경계」 「보호」 「방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밌네.”
누가 작가 아니라고 할까 봐, 싸움까지도 키보드질로 하려는 모양.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양할 생각은 없다.
이곳은 더 이상 녀석의 홈그라운드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서브 주인공] 버프가 발동합니다!」
「[먼치킨] 버프가 발동합니다!」
「[거악] 버프가 발동합니다!」
그와 함께 전신에서 요동치는 힘.
이러면 정말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신살(神殺)]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신살(神殺)] 클리셰 효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불멸성이 소멸합니다!」
「[신살(神殺)] 클리셰 효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모든 약점을 노출합니다!」
「[신살(神殺)] 클리셰 효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한 모든 공격이 치명타로 적중합니다!」
내가 입가를 삐죽이며 웃었다.
“좀 맞자.”
그와 함께 전신에 팽팽하게 땅겨진 근육이 마치 활시위처럼 녀석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콰카카카카!
이곳은 여전히 시간이 멈춘 세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용에 대한 반작용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할 기세로 뻗어나간 내 일격과 함께 사방으로 흩날린 흙먼지가 무중력 상태 그대로 떠다니며 시야를 가렸다.
자욱한 흙먼지는 자연스럽게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이내 그 안에서 녀석은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경ㄱ」 「ㅂ호」 「ㅂㅇ」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박살이 난 녀석의 문자열들이 더 이상 제 주인을 지키지 못하고 허공에서 바스러졌다.
「[신살(神殺)] 클리셰가 발동 중입니다!」
「강력한 일격으로 인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방어체계가 무력화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흙먼지를 헤치고 드러난 녀석의 얼굴에는 지금 녀석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그대로 쓰여 있었다.
「고통」 「격노」 「혼란」
그제야 녀석은 손바닥으로 훤히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요원한 일이었다.
콰드득!
내가 조금 전에 그 손을 박살 내 버렸으니까.
그와 함께 녀석의 박살 난 손가락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문자열들이 바스러졌다.
「검지 손가락」 「중지 손가락」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비명.
「그, 그만!」
녀석이 애원하며 무너진 손가락 사이로 녀석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통」 「공포」 「비참」
고작 몇 가지 단어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전의 상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창조주’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지금의 녀석은 내가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처럼 크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막상 제대로 붙어 보면 더 할 수 있을 텐데도 지레 겁먹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봐준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왜?”
「…….」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 얼굴에 무엇을 느끼는지 다 쓰여 있었을 뿐.
「당황」
짜식, 귀엽기는.
물론, 나한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마냥 그렇게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딱히 이유는 없었나 보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단지, 얼굴에 다 나타났을 뿐.
「당혹」
“그러면 계속할까?”
내가 그렇게 말하며 최대한 사악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나쁜 놈이 웃으면 더 무서워 보이는 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와 함께 내 발이 사정없이 녀석의 얼굴을 짓밟으려던 순간.
「자, 잠깐!」
딱히 음성지원이 된 것도 아니지만, 쉼표와 느낌표에서 녀석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다급」 「고민」 「심각」
물론 얼굴에 쓰여 있는 것들은 덤이었고.
“왜?”
내가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말하자, 녀석의 이마에서 작은 단어 하나가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땀방울」
짧지만 참 많은 것을 말해 주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
「그, 그게 그러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삐질.
「땀방울」
……이것도 보다 보니까 조금 웃기네.
하마터면 잔뜩 무게를 잡고 있던 것도 잊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예전이었다면 녀석이 저런 꼴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모든 상황은 이미 내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할 말 없으면 계속하고.”
내가 다시 한번 발을 올리자, 녀석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기, 기다리라고!!」
이번에는 느낌표가 두 개나 되는 걸 보니, 더 이상 뜸을 들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얼굴이 어느새 비장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타 다른 비장함처럼 관상학적인 표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단」 「비장」 「고백」
……어째 마지막 단어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마침내 말할 생각이 든 모양.
그와 함께 녀석의 입에서 자음과 모음들이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좋아. 잘 들어라.」
듣는다는 표현이 조금 마음에 안 들지만, 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만 알아들으면 되는 거니까.
“보고 있어.”
「네가 하는 모든 일. 그리고 지금의 이 일까지. 전부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멈춰라.」
얼씨구야.
조금 풀어줬다고 턱밑까지 기어오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요 몇 초 사이에 감을 잃은 모양이다.
“저기요. 님이 그렇게 대놓고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면 제가 님의 남은 삶을 대놓고 부정적으로 만들어 드리지 않을까요?”
그와 함께 눈앞에서 떨어져 내리는 「땀방울」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나름대로 뻥카라도 쳐 보았을 텐데, 눈앞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을 테니 녀석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터였다.
뭐, 반대로 말하자면 나에게는 잘된 상황이라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 그게 아니라…….」
“그러면 뭐? 아, 말을 곱게 해서 그런가? 말로 하지 말까? 예를 들면 당장 네 남은 손가락 마디마디를 꺾는다던가.”
만약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면 내 잔학성에 치를 떨었을 장면이었으나, 어차피 보는 눈을 닫은 것은 눈앞에 있는 녀석이 저지른 업보였다.
말하자면,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달까.
「그,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그리고 녀석의 이마에서 흐르는 단어가 바뀌었다.
작은 개념에서, 조금 더 큰 개념으로.
「땀 줄기」
저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진심을 담은 설득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
그와 함께 마침내 녀석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흘러나온 것은 무척이나 거슬리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이었다.
「……이미 늦었다. 결말은 이미 정해졌어.」
“결말?”
뉘앙스로 보아서 그것이 어떤 [결말]일지는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상상이 됐다.
철저한 새드엔딩.
유감스럽게도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 디오도, 너도. 네가 만들어 낸 가짜들도. 모조리 다 죽을 것이다.」
그와 함께 녀석의 얼굴에 나타난 한 가지 단어.
「진심」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라는 소리.
그렇다면 그 원인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누구에게?”
상황이 이 정도까지 막장으로 치달은 상태에서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여길 수도 있으나, 사실 이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당장 조금 전에 작가 녀석이 나와 베른을 죽이려고 했었다지만, 그에 대한 역풍을 맞아서 지금 저 꼴이 되었다.
즉, [주인공]의 새드엔딩에는 그에 합당하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과정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녀석의 입에서 예상했던 뻔한 이름들 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디룽 칸.」
그러면 그렇지.
마침내 맞닥뜨린 [최종보스]에게 결국 패배하는 [주인공]이라면, 흔하디흔한 클리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결국, 때가 된 건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이미 정해져 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이 세계의 [설정]을 마음껏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소설이 [연재] 도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 작가의 말로써 확실해졌다.
이 소설은, 이미 [완결]이 났다.
이것이 아직 써지지 않은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이미 써지고 난 이후라면 다르다.
이 세계는 이미 [닫힌 세계]가 되었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결말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거 알아?”
「당신의 발언에 [궤변] 클리셰가 반응합니다!」
그와 함께 녀석의 얼굴에 「호기심」과 「경계」가 나타났다.
「……또 무슨 말을 지껄이려는 거냐.」
이제 내게 남은 수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리고 그 수를 던지기 위해서, 나는 한 가지 [벽]을 넘어서야 했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디오가 아니야.”
결국, 나도 마주해야 할 때가 오고야 만 것이다.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인지.
「[제4의 벽]이 당신의 발언을 주목합니다!」
「당신의 [서사]가 요동칩니다!」
녀석의 얼굴에서 「당혹」을 비롯한 「당황」과 「혼란」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무슨 말이긴.
“아직도 모르겠어? 지금 네 꼴을 보면 짐작이 갈 텐데?”
「그러니까 그게 무슨…….」
“명색이 작가라는 놈이 자기가 쓴 소설 속에 갇혀서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제4의 벽]이 당신을 강하게 주시합니다!」
「당신의 [서사]가 폭발할 듯이 요동칩니다!」
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바로, 이 망할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말이지.”
「[제4의 벽]이 마침내 모든 것을 돌파한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당신의 [서사]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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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즈 반의 서사]
[1] 노예 소년, 반. [완료]
[2] 불지옥 반도의 왕자. [완료]
[3] 침략자. [완료]
[4] 클리셰 파괴자. [완료]
[5] 주인공. [현재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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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든 것을 끝내러 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