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Chapter 37: 결말 (1)
동쪽.
눈 깜짝할 새 다시금 그 먼 이국땅에 발을 디딘 디오는 감정 하나 그려지지 않은 무심한 눈으로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디룽 칸.”
디오는 조용히 그 이름을 되뇌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그가 도착한 곳은 황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궁이었다.
디룽 칸은 바로 이곳에 있을 것이다.
디오는 스스로가 어째서 그 사실을 확신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에 대한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귓가에 드리운 것은 애초에 본인의 선택이 아닌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동쪽의 지배자, ‘디룽 칸’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시오.」
“……죽인다.”
그렇기에 디오는 스스로 자신의 의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일을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황궁의 문이 열리고 디오가 그 안에 들어섰다. 곳곳에 누구의 악취미인지 모를 괴상한 조각상과 장식들이 보였으나 그는 그런 사소한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침내 황궁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 도달한 디오는 그곳에서 여타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멈춰 있는 디룽 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디오가 조소를 머금었다.
“역시…… 네놈도 별수 없었나 보군.”
디오는 지금까지 겪었던 이 현상이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현상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기회로 삼아서 디룽 칸의 목숨을 끊어 내려고 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디오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만 끝내자.”
디오는 이미 수많은 경험으로 괜히 이 시점에서 괜한 감정을 드러내며 시간을 끄는 것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모든 변수는 작은 망설임에서 시작하는 법이었고, 그에게 있어서 변수란 이번 기회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성검을 뽑아 들고는 일말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디룽 칸의 목을 찔렀다.
아니, 찔렀다고 생각했다.
「[강제 복원력]이 요동칩니다!」
「[강제 복원력]에 의해서, [메인 시나리오]가 강제로 진행됩니다!」
“뭣……!”
그와 함께 디오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눈을 부라렸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습이라……. 조잡한 선택이지만 훌륭하다.”
디오는 어느새 자신의 성검을 붙들고 있는, 마치 파충류의 그것과 같은 붉은 비늘이 번뜩이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디룽 칸.
그의 노란빛 눈동자가 지금 디오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래도 세계가 아직 짐의 죽음을 허하지 않을 모양이다.”
그와 함께 디룽 칸의 비릿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디오를 훑었다.
마치 온몸에 뱀이 기어 다니는 듯한 섬뜩함이 디오의 전신에 감돌았다.
“그렇다면 세계가 바라는 죽음은 과연 누구의 것이겠느냐?”
디오는 그 비릿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은 악을 응징하는 용사로서 살아온 그가 이 세계에 와서 몇 차례 겪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공포.
그것이 이제는 알 수 없어져 버린 미지의 대상에 대한 막연함 때문인지, 아니면 순전히 상위 포식자에 대한 피식자의 본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지금 디오가 처음으로 죽음을 직감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디오는 애써 그 두려움을 밀어내며 마치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두렵다.
미치도록 두렵다.
그러나 디오는 이제 더 이상 그 흔한 뒷걸음질조차도 치지 못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굳건한 의지는, 그저 알량한 오만이자 무언가의 속삭임에 의해서 놀아난 우스운 광대 짓이었음을.
「당신의 [서사]를 이행하십시오!」
「동쪽의 지배자, ‘디룽 칸’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시오.」
디오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여전히 디룽 칸의 손에서 요지부동인 성검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놔.”
“부탁치고는 무척이나 말이 짧구나.”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
그 명백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디오는 어느새 정말로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떼를 쓰듯이 억지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놓으라고 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정 원한다면 직접 가져가 보지 그러느냐?”
그와 함께 디룽 칸이 붙잡고 있던 성검의 날을 가볍게 잡아당기자 그것을 붙들고 있던 디오의 몸이 너무나도 쉽게 앞으로 나자빠졌다.
“……큭!”
디룽 칸의 시선이 발아래에 추하게 나자빠진 디오를 내리깔았다.
“아니면 그렇게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도 괜찮고.”
그와 함께 흙먼지를 잔뜩 머금고 있던 디오의 입가가 사납게 비쭉였다.
우습다.
너무나도 우습다.
디오는 지금 자신의 꼴이 너무나도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디오는 억지로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러지.”
디오의 손이 조용히 허공을 향했다.
그는 자신의 안일함을 인정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했다.
「[개연성 무시]를 사용하였습니다!」
치직-.
치지직-!
그와 함께 디룽 칸이 붙들고 있던 성검이 말 그대로 사라졌다.
“호오.”
디룽 칸이 짧게 감탄함과 동시에 사라졌던 성검이 이내 디오의 손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바라본 디룽 칸이 유쾌한 듯이 껄껄 웃었다.
“그래. 한낱 미천한 짐승도 싸움을 하려면 이빨이 있어야겠지.”
그와 함께 재빨리 자세를 다시 잡은 디오가 마치 짐승처럼 디룽 칸을 노려보며 으르렁댔으나 디룽 칸은 위협은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뭘 하느냐? 어서 네 이빨을 드러내 보아라.”
노골적인 도발이었으나, 디오는 함부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단지 몇 걸음에 불과한 그 거리에 죽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디룽 칸의 전신에서 일어난 흉악한 기세와 함께 붉은 기운이 디오를 향해서 쇄도했다.
용사와 마왕.
그 두 가지 힘을 모두 지닌 디오조차도 감히 감당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
마치 힘의 차이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디오는 그 기운에 대항다운 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쾅!
콰캉!
도대체 몇 번을 구르고, 부딪쳤을까.
멈춘 시간 속에서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사이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디오의 입에서 토혈이 뿜어져 나왔다.
“쿨럭……!”
단 한 번의 공격.
고작 한 번에 불과한 그 공격은 어설프게 방어에 나선 디오의 왼팔과 왼쪽 다리의 자유를 가져갔다.
찰나의 순간에 사실상 반신을 잃은 것이다.
“시시하구나. 더 보여 줄 것은 없느냐?”
그렇게 말하는 디룽 칸의 모습은 여전히 건재했다. 아니, 애초에 디오로서는 그럴듯한 공격 한번 해 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디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있지. 아주 많이.”
디오는 성검을 지팡이 삼아서 간신히 일어나고는 그대로 온몸을 던져서 그것을 뻗었다.
「용사 전용 스킬, [마왕 살해]가 발동합니다!」
「용사 고유 스킬, [성검 방출]이 발동합니다!」
스킬.
이 세계가 아직 [게임]이었던 적에 얻었던 능력.
비록 이 세계의 본질은 이제 [게임] 따위와는 아주 멀어졌으나, 그 능력은 아직도 디오 안에 간직되어 있었다.
“하하! 좋다. 더 해 보아라.”
“……얼마든지.”
「타락 용사 전용 스킬, [신념을 잃은 정의]가 발동합니다!」
「타락 용사 고유 스킬, [집행]이 발동합니다!」
「타락 용사 고유 스킬, [악몽 베기]가 발동합니다!」
한 번, 두 번.
비록 반절 고장 난 신체였으나, 그가 사용한 스킬은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착실하게 디룽 칸을 향해서 쇄도했다.
슈아앙!
사방에서 공기가 터지고, 땅이 갈라지며 울음을 토했다. 그러나 그런 광경 속에서도 디룽 칸의 비늘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어설픈 흉내만 내고 있구나. ‘진짜’는 언제 보여 줄 생각이냐?”
디룽 칸이 그렇게 비웃으며 손을 내젓자 디오가 사용한 스킬들이 모조리 다 허공에서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디오가 죽음조차도 불사하고서 사용한 스킬들의 마지막치고는 무척이나 허무했다.
“……진짜라.”
그 광경을 지켜본 디오는 피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디룽 칸과의 전력 차이가 생각 이상으로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수는 이제 몇 가지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들을 이제 더 이상 아끼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가짜 주제에 진짜를 찾는군.”
꿈틀-.
“호오.”
디오의 말과 함께 디룽 칸의 눈이 흥미로 가득 물들었다.
“흥미롭구나.”
“고작 흥미 따위로 끝날 일이 아닐 텐데?”
“그 오만한 태도도 마음에 들고.”
그 순간.
디오의 감각에 이질적이지만 익숙한 그것이 느껴졌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징조였다.
「[개연성]이 꿈틀거립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디오는 식도를 역류하는 피 때문에 목이 콱 막혀 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피를 토해내며 말했다.
“잘 들어라. 너는 거짓된…….”
“그래,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디룽 칸의 비릿한 시선이 디오를 훑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이 가짜라고 한들, 무엇이 바뀌겠느냐? 그때도, 지금도 지배자는 온전히 짐뿐이거늘.”
디오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너, 설마…….”
“알고 있었느냐고? 글쎄, 그건 내가 대답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지 않느냐?”
「[개연성]이 잠잠해집니다!」
“…….”
디오는 그제야 자신이 한 가지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일했다.
아니, 오만했다.
“……그렇군.”
디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디룽 칸의 말대로라면, 이번 수뿐만이 아니라 그가 생각했던 다른 수들 역시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디오는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그 끝의 방식이 네 의도와 같다고 여기느냐?”
디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저, 끝을 위한 새로운 발걸음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어.”
설령 그것이 내 죽음일지라도.
“좋다.”
디오는 이제 마지막 일전을 준비했다.
강철처럼 굳건했던 육체는 이제 종잇장처럼 나약했고, 세상의 악을 멸했던 용사의 힘은 디룽 칸의 순수하고 거대한 악을 이겨내지 못했다.
“오너라!”
디룽 칸의 호령과 함께 디오는 무너져 가는 육체를 억지로 끌고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빛은 너무나도 미력했고, 또 초라했다.
콰카카카캉!
동쪽의 지배자를 상징하던 웅장한 황궁은 이제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의지 하나로 굳건히 선 디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훌륭했다. 서쪽의 구원자.”
디룽 칸의 가슴에 길게 그어진 가느다란 혈선 하나. 흉터는 되지만 결코 목숨은 끊어 내지 못할 상처. 그것이 디오가 모든 것을 걸고서 만들어 낸 결과였다.
디오는 이제 최후를 직감했다.
이제…… 끝이구나.
그는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제4의 벽]에 의해서 작품이 강제적으로 공개 처리됩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이곳이 적진 한복판인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희망이 더 없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디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치고 이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영원을 함께할 어둠이 그를 마중 나왔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이로써 이 지긋지긋한 삶도 끝이 난 거다.
그거면 충분하다.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제4의 벽]에 의해서 작품이 일시적으로 비공개 처리됩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하던 시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기적]을 행합니다!」
어느새 자신의 곁에서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 녀석을.
“혹시 내가 방해했어?”
“아인즈…… 반.”
< 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