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여인
속초 명량 해변
대풍횟집이라? 명량 해변이라는 곳도 속초도 진수에게는 처음으로 와 보는 곳이었다. 하지만 기차와 택시를 갈아타며 도착한 명량 해변은 바다가 멋진 그림 같은 해변이었다.
“진짜, 횟집 간판이 잘 보이네.”
여름의 동해안 바닷가는 피서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해운대급의 유명한 해변은 아니었지만, 나름 인기가 있는 곳인지 여기저기 젊은 대학생 같은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보이고 말이다.
정확하게는 해수욕장보다는 포구 주위에 모래밭이라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작은 모래 해변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모래 해변이었지만 진수의 눈을 사로잡은 건 형형색색의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미녀들이었다. 한국의 동해안에서 저런 과감한 비키니를 입은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과감한 모습을 한 한 무리의 여대생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약간 어리바리하게 해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런 진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해변 앞쪽의 횟집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 것이다.
“저건 은채잖아?”
정은채, 논산 훈련소에서 첫날 밤을 보낸 진수의 꿈에 나타나기도 했던 정은채였다. 사실, 말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은채가 논산에서 첫날 밤 꿈에 왜 나타났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었다.
아마도, 군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지난 대학 시절의 아쉬움 같은 것이 무의식으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은채는 무슨 횟집 이름이 적혀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혹시 이 횟집이 은채내 부모님이 하시는 곳인가?”
은채는 뭐랄까? 가만있어도 주위에서 후광이 비치는 그런 여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횟집에서 일을 하고 있어도 알바생 같은 느낌보다는 주인집 딸이 어쩌다 한 번 도와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횟집이 제법 크고 안에 손님도 많아서 제법 장사가 잘되는 것 같은데, 그 집 주인의 딸이라면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을 휴학할 리는 없을 테니까. 아마도 이곳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았다.
어쩌지? 슬쩍 다가가서 말을 걸어? 하지만 은채가 못 알아보면? 그리고 은채 입장에서 대학 동기를 지금 만나는 게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 수도 있고 말이다.
사춘기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직 나이 어린 여자아이다. 집이 어려워져서 이런 시골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대학 동기랑 마주친다면 창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앞으로 전진...
가장 안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결과는 모르겠고, 나도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은채에게 다가가 보자. 그리고..
“저기..”
“예?”
은채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여기가, 대풍 횟집이죠?”
“아, 예. 맞아요. 여긴 간판에 크게 쓰여있잖아요?”
간판이 상당히 커서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걸 바보같이 물어보다니.
“여기가, 맛있다고 해서...”
“예, 안으로 들어가보세요.”
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성과라면 은채가 날 못 알아본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셈이었다. 은채를 지나쳐 횟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손님들로 북적이는 횟집 창가에 자리를 잡고 신선한 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술도 안 받는지 소주가 쓴 것 같아. 회나 먹고 있는데, 옆에서 30대 정도로 보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여기 알바생 정말 몸매 죽이지 않냐?”
“그 은채인가 하는 애? 하긴, 나도 걔 보러 여기 온다니까.”
“하하, 야, 나는 여친 있으니까 어쩔 수 없고, 동호 너는 어떻게 한 번 꼬셔봐라.”
“그럴까?”
아니, 이 인간들이, 회를 먹으러 왔으면 조용히 쳐드실 일이지, 어디서 성희롱이야?
진수가 은근히 걱정하던 상황이었다. 학교에서도 젊고 꽃다운 여대생들 사이에서 한눈에 띄는 그런 미모인데, 이런 횟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으면 더 눈에 띄겠지? 그리고 나이 어린 알바생이라고 쉽게 보는 것도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쓴 쏘주가 땡겼다. 다시 한 잔 쏘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젠장, 행운의 과자가 은채의 위치를 알려준 건 좋은 일인데, 와봐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네. 은채는 날 알아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혼자 쏘주나 마시고 있고 말이다.
이게 무슨 행운이라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일어나서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갔는데, 은채와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어떻게 안 될까요?”
“가불도 한 두 번이지? 어떻게 매번 가불을 해달라는 거야?”
“그게 아버지 병원비가 좀 급해서.”
“지난달도 가불해 갔잖아. 그러면 이달은 채우고 또 가불을 해달라는 게 정상 아냐?”
“죄송합니다.”
“나도 자선사업 하는 사람 아니야? 일단, 이번 달은 일을 해서 가불해 간 거 채우고 다시 얘기해 보자고.”
횟집 주인은 장사는 잘하지만 별로 인정은 없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은채가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가불을?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아, 예, 손님. 넌 좀 이리 나와, 저기 테이블이나 좀 치우고.”
은채에게 막 대하는 태도에 진수는 마음 한구석이 날카로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심술궂어 보이는 아줌마에게 뭐라고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괜히 여기서 일하는 은채만 곤란해질 수도 있고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계산을 하고 횟집 밖으로 나왔다. 소주도 한 잔 하고 날도 덥고 그래도 바닷가로 가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변가에 그늘진 곳에 앉아 있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때는...헉..
“너, 최진수지?”
“어, 은채야.”
횟집에서 마신 소주 때문에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잠에서 깨고 나니, 눈앞에는 은채가 진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수의 이름도 부르고 말이다.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까, 식당 앞에서 봤을 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혹시, 초등학교 동창인가 했는데, 나중에 생각이 나더라고, 문화 대학교 경영학과 최진수 말이야.”
어떻게 나를 기억하는 거지? 물론, 정은채라면 워낙 유명하니까, 남자들이라면 친분이 없어도 얼굴과 이름은 다 알고 있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를 어떻게 알아?”
“그러는 너는 나를 어떻게 아는데?”
“그거야, 몸매 종결..아니, 같은 과 동기니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아까는 왜 아는 척 안 했어?”
“그건, 난 은채 너를 기억하지만, 은채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래?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이 났어. 최진수, 너, 신입생 오티 때 나와서 기타치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어?”
뭐야? 그걸 기억하나? 하지만 은채의 기억은 완벽한 기억은 아니었다. 기타는 좀 칠 줄 알아서 오리엔테이션 때, 나와서 기타를 치기는 했었는데, 노래 실력은 영 꽝이라 노래는 부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불완전한 기억이나마 은채가 나를 기억해 주고 있었다니, 내 이름도 알고 있고 말이다.
“아, 뭐, 그러기는 했었지. 노래는 안 했고, 아마 기타만 좀 쳤을 거야. 난 노래는 잘못하거든.”
“그래, 아무튼, 그때, 기타를 잘 쳐서 난 꽤 멋진 남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그럴 리가? 나의 허접한 기타 실력을 보고 나를 멋지다고 했을 리가 없잖아? 이건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아니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랬구나. 여기서 알바를 하는 거였어? 고향이 속초였었나?”
“그래, 집에 좀 일이 있어서, 너도 아까 들었지? 이렇게 된 거 뭘 숨기겠어. 사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셔.”
“정말? 어쩌시다가?”
“원래, 지병이 있으셨는데, 좀 악화되신 거야. 간 쪽에 문제가 있으신데, 뭐 그렇게 심하신 건 아니고, 치료만 꾸준히 받으시면 문제는 없을 거라는데, 병원비가 만만치가 않더라고. 참 불공평해. 의학이 발달해서 다 고칠 수 있는 병인데, 돈 없는 사람은 치료를 안 해준다니 말이야.”
“치료비가 얼마나 드는데?”
은채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괜한 걸 물어봤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일 년에 5천만 원 정도는 나오는 것 같아. 그렇게 3년 정도 치료를 받으셨으니까. 결국,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지. 아버지는 당연히 일을 못 하시고, 집에 따로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 그랬구나.”
지금 통장에 한 1억 정도는 남아 있었다. 거기에 아파트도 있고, 내가 은채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채가 그걸 받을까?
학교 동기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학교에서 한두 번 얼굴을 본 사이인데, 내가 돈을 준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돈이 급하니까, 고마워, 라고 말하면서 받을까? 아니면 너 지금 날 동정하는 거니? 라며 화를 낼까?
오만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난 지금 일하러 가봐야 해.”
“저기, 은채야. 일 다 끝나고 여기로 와.”
“왜?”
“어? 그게..”
내가 필요하면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라고 말해야 하나?
“저기, 오랜만에 봤는데, 밥이라도 살게. 아니면 커피라도.”
“음,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런데 나 일 끝나려면 오래 걸리는데.”
“언제 끝나는데?”
“오늘은 오후까지만 하면 되는데. 아무튼, 앞으로 2시간은 더 있어야 하거든. 너 바쁘지 않아? 다른 일행은 없는 거야?”
“아니 바쁘지도 않고, 일행도..아니, 아무튼 괜찮아. 마침, 오늘은 좀 시간이 있네. 같이 놀러 오기로 한 애들이 갑자기 못 온다고 해서 말이야..하하..좀 시간이 나서, 아무튼 주변 한 번 둘러보고 있을게. 천천히 나와..”
“그러던지, 그러면 두 시간 후에 여기서 보자.”
한잠 자고 났더니, 몸은 좀 개운한 것 같은데, 머리는 멍해진 기분이었다. 근처에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를 사서 마시면서 해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은채가 다시 나오면 뭐라고 말할까? 상상을 하면서 해변을 걷다 보니, 피서객들의 떠들썩한 소음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역시,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볼까?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외진 해변에 진수 혼자뿐이었다. 원래 주변의 모래사장이 그렇게 넓은 편도 아니어서 끝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다. 그리고 모래가 끝나는 곳은 동해 바다와 연결되는 포구
모래사장 아래로 동해안의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누런, 짙은 누런 색의...
“이게 대체 뭐야?”
진수는 바다를 둥둥 떠내려오다, 찰랑이는 파도에 밀려 진수의 발아래로 곧바로 직진하는 정체불명을 어떤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바위인가?”
하지만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바위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생긴 건 뭔가 묵직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가볍게 파도 위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뭔가 기름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들고 말이다.
대체 이게 뭘까? 진수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그 정체불명의 누런 덩어리 위에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우웩..아, 이건 무슨 냄새야?”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악취 그 자체였다. 뭔가 지옥이라는 게 있다면 지옥의 향기가 아닐까 싶은 그런 역겨운 냄새...
진수는 악취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찰랑거리는 파도는 마치 그 덩어리를 진수에게 갖다 바치는 것처럼 점점 더 진수의 발아래 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젠장, 오지 마. 이 역겨운 녀석아, 저리 가라고.”
계속 진수에게 다가오던 그 악취 덩어리는 결국 모래사장 위까지 밀려오더니 멈추어 섰다.
“젠장, 별 재수 없는 일이 다 생기네. 이 아름다운 바다에서 하필 저런 이상한 쓰레기를 만나다니..”
진수는 걸어온 길을 되돌아 다시 넓은 해변으로 향했다. 다시 피서객들과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