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인생
장태식이 제안한 30억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최기현 교수도 그걸 원했고 말이다. 최기현 교수도 단순히 진수를 위해서 장태식 회장과의 면담을 주선한 것은 아니었다.
장태식은 휴대폰을 생산하는 대성 그룹의 회장으로 한국의 근대 우편 연구회를 지원하는 후원자였다.
최기현도 그 연구회 소속으로 대성 그룹으로부터 오래전부터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었고 말이다.
거기에 대성 전자 30주년 같은 내부 사정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발견한 진품 문위 우표를 장태식에게 소개해서 자신도 거기에 편승해 상당한 실익을 챙긴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진수 입장에서도 소인이 찍힌 문위 우표를 장태식에게 30억을 받고 판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우표가 그 정도 가격에 거래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표를 장태식에게 판매하면서 동시에 30주년 기념 행사에도 초대를 받게 되었다.
“저, 그런데, 최기현 교수님, 그 편지 내용은 뭐였나요?”
우표를 장태식에게 넘기고 나니까, 갑자기 최기현 교수를 처음 찾아갔던 이유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 물론, 행운 과자의 행운은 고가의 문위 우표를 발견하는 행운일 테고 그래서 장태식 회장에서 30억을 받고 우표를 팔게 되는 행운으로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호기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대체, 그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일까? 하는 것 말이다.
“아, 편지 말이군요. 하하, 저도 우표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편지 내용은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어디 봅시다. 뭐라고 적혀 있나?”
최기현 교수는 대성 그룹 회장실을 나와서 다시 편지를 꺼내서 내용을 읽어 보기 시작했다.
“뭐, 내용은 특별한 것은 없네요.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정일영이라는 사람이 동생인 정우영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동생이 몸이 안 좋은지 건강 걱정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전에 맡겨둔 물건은 잘 보관하고 있는지? 그런 것도 물어보고요. 병문안도 할 겸, 인천에 가서 동생을 만나러 가겠다. 이런 내용입니다.”
“음, 그래요? 뭐,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일영은 누굽니까?”
“글쎄요. 정일영이라? 그 당시에 우정국 개국일에 편지를 보낼 정도면 그냥 일반인은 아닐 것 같은데, 그 당시 우정국 관리일 수도 있고요. 음,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에 내관 중에 정일영이라는 사람도 있었죠.”
“내관요?”
“예, 우리나라에 내관이 없어진 건 갑오개혁 때니까요. 갑신정변으로 개화파가 숙청되었지만, 홍영식 같이 죽음을 택한 개화파들도 있었고, 일본으로 도망친 개화파들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위세를 타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갑오개혁을 주도했죠.”
“갑오개혁은 언제쯤인가요?”
“갑신정변이 1884년이고 갑오개혁은 1894년이니까. 10년의 텀이 있는 거죠. 그리고 그사이에 국제정세도 변하고, 개화파들은 많이들 일본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서 결국은 갑오개혁의 친일내각을 주도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식민 사관이 시작되는 시점이죠. 일본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받은 친인파들이 갑오개혁을 이끌었고 그것이 조선 근대의 시초로 보거든요. 그리고 그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근대적 우편 기관인 우체사가 1895년에 등장하는 겁니다.”
듣고 보니, 갑오개혁도 대한제국의 역사기는 하지만 고종과 개화파의 자주성이 강했던 갑신정변 무렵의 근대화와는 좀 결이 다른 느낌이 있었다. 국제정세는 이미 청이 일본에 패해 한반도가 일본의 영향력으로 들어가는 시점,
청군에 쫓겨 일본으로 도망쳤던, 개화파가 친일화 되어 돌아와 주도한 것이 갑오개혁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최초의 우편의 역사가 1884년의 고종이 주도한 우정국이냐? 아니면, 일본의 영향력이 강했던 갑오개혁 시기의 1895년의 우체사인가? 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최진수 씨가 궁금해하는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아마도 내관, 정일영 같군요. 내관은 보통 내시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죠. 여기 봉투에 보면 내수사 전환 정일영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관직인가요?”
“내수사는 내탕금을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전환은 그 하급 관직이고요”
내탕금은 또 뭐지? 갈수록 어려워지네. 진수가 당황한 얼굴이 되자? 최기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탕금은 조선 왕실의 개인 재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원래는 태조 이성계의 재산을 말하는 거였죠.”
“이성계요?”
“아시다시피, 이성계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를 호령하던 세력가였죠. 고려 말기의 호족 말입니다. 일설에는 이성계 일가가 함경도 일대의 농지의 3분의 1을 소유했었다고 하니까요. 엄청난 자산가였던 겁니다. 그런 힘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거고요.”
진수가 알던 이성계는 무장의 이미지가 강한데, 의외로 돈도 많았던 부자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내탕금 때문에 정도전이 죽었다고 할 수 있죠.”
“정도전요?”
“예, 조선 건국 후에 정도전은 이성계 일가의 재산이 대단하다는 걸 알고, 그 재산을 나라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거든요. 그 당시에 이방원이나 다른 왕자들의 사병이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성계 일가의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니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도 있었죠.”
“그럼, 내탕금 문제로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인 건가요?”
“하하,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일설에는 이방원이 금릉에서 명나라 주원장을 만나서 주원장에게 자신이 세운 주씨의 나라를 호씨가 간섭하니 나는 호씨를 멸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도전을 죽이라는 말로 해석했다는 설도 있고요. 아무튼, 정도전의 죽음과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면서 내탕금이라는 조선 왕실 재산은 더 탄탄해진 거죠.”
그리고 최기현 교수의 말로는 내탕금은 조선 대대로 왕실의 재산으로 왕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내관들이 내탕금을 관리하는 내수사의 관직을 겸하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내수사의 하위직인 종 9품의 전환, 정일영이 인천에 사는 동생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하하,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학교에 강의가 있어서 말이죠.”
***
어쨌든, 30억의 현금을 받고 문위 우표는 대성 전자의 장태식 회장에게, 정확히는 대성 전자 법인이 우표를 구매한 것이었다.
진수 입장에서야 누구에게 돈을 받는가 하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30억이라? 거기에 통장에 로또 당첨금과 용연향을 팔아서 번 돈도 제법 있어서, 40억 이상의 통장 잔고가 있었다.
진수는 스마트폰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통장에 42억이 있다는 건가? 내 인생도 괜찮은데, 거기에 번듯한 아파트도 있고, 2억이 넘는 포르쉐 파나메라까지 나쁘지 않은 인생이군.”
그리고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 정은채라는 완벽한 얼굴에 몸매 종결자인 최고의 미녀까지 진수와 상당히 가깝게 지내고 있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애인 사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한마디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인생인 것이다.
음, 그러면, 이렇게 통장에 있는 돈으로 평생 놀고 먹으면서 살까? 아니지...
행운의 과자에는 아직 많은 행운이 있었다. 물론 지금 정도의 성공도 만족스럽기는 하지만, 진수의 인생에 아직 더 많은 행운과 성공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진수는 다시 행운의 과자의 뚜껑을 열었다.
하루에 두 개를 먹으면 죽는다는 행운의 과자, 진수는 조심스럽게 두 개의 손가락으로 과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안에 과자를 넣고 씹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과자의 고소한 맛이 왠지 몇 개 더 먹고 싶어지는 느낌이었지만, 참기로 했다. 그리고 입안에서 이물감과 함께 종잇조각이 나왔다.
그리고 이런 숫자가, 025548585
“전화번호인가? 여긴 어디야?”
전화번호를 검색해 보니, 강남구에 있는 노블레스 부동산이라는 곳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부동산을 사라는 건가?”
생각해 보니, 지금 살고 있는 경희궁 아파트를 급매로 잘 산 것은 분명했다. 12억 5천에 산 아파트가, 지금은 17억 가까이 올랐으니 말이다. 살 때도 시가보다 훨씬 싸게 사기도 했고, 부동산이 계속 오르는 통에 가만히 앉아서 몇 달 사이에 4억 5천을 번 것이었다.
일을 해서 4억 5천을 어떻게 벌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정말 기가 막힌 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대한민국이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수는 행운 덕분에 천국행 티켓을 얻은 셈이었다.
***
강남구, 노블레스 부동산.
“부동산 매물을 찾고 계시는군요? 적당한 투자처를 말이죠?”
이현정 과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부동산 회사 직원은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키가 큰 모델 같은 여자였다. 170은 될 것 같은 늘씬한 몸매는 약간 마른 듯하기는 했지만,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마저 있는 강남 스타일의 미녀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무릎 위로 꽤 올라오는 밝은 베이지 컬러의 미니스커트가 꽤나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예, 운 좋게 좀 현금이 생겨서 말이죠.”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정도 액수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42억입니다. 요새 금리도 별로 없고 해서 그냥 통장에 넣어두기에는 아까운 생각도 들고요.”
“와, 현금 부자시네요. 나이는 좀 어려 보이시는데.”
“대학 2학년입니다. 아, 병장으로 만기전역을 하고 복학을 했죠.”
“그러세요? 아버님이 돈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군대를 막 전역한 아들에게 그 정도 현금을 물려주시고 말이죠.”
군대를 막 전역하고 복학한 대학 2학년 생이라는 말에, 당연히 돈 많은 금수저 집안의 아들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42억의 출처는 당연히 돈 많은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말이다. 진수도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
대충 그런 척을 하고 이현정 과장과 상담을 시작했다.
“음, 이건 영업상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진수 고객님은 정말 운이 좋은 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하,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듣는 편입니다. 뭔가 좋은 매물이 있나요?”
“예, 성수동 쪽에 괜찮은 아파트가 있는데 보시겠어요”
“성수동요? 음, 거긴 강북 아닌가요?”
42억의 현금이 있는데 기왕이면 아파트를 사도 강남에 사고 싶었던 진수였다. 그런데 강북이라니? 강북이라고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한국인들에게 특히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강남에 아파트든 빌딩이든 내 소유의 부동산을 가져보는 게 꿈이라면 꿈 아닐까?
강남 건물주야말로, 현대 한국인의 보편적인 코리안 드림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강남의 아파트를 사고 싶습니다만.”
진수의 말에 이현정 과장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보통 고급 아파트는 강남에 좋은 곳들이 많기는 해요. 하지만 제가 소개시켜드릴 곳은 강남에 살던 분들도 많이 이사를 가시는 신축 고급 아파트니까요. 거기에 지금 엄청 좋은 가격의 급매물이 나왔는데, 정말, 이 아파트 사시면 큰 횡재를 하시는 거예요. 절대 후회 안 할 좋은 매물이라는 거죠.”
물론, 강남 아파트를 고수할까도 생각했지만 급매물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경희궁 아파트도 급매물을 주워서 단기간에 5억 가까이 수익을 냈는데 그 재미가 정말 쏠쏠했던 것이다.
“거기가 어디인가요?”
“성수동에 트리피오라고 신축이고 강남 이상으로 최고급 아파트예요. 연예인들도 많이 사는 곳이고요. 한 번 임장을 가보시겠어요?”
임장이라? 뭐, 급매물이라는 것도 그렇고, 이현정 같은 미모의 여성과 데이트 삼아 한 번 신축 아파트를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예, 그럼 한 번 보러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