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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인생 (15/200)

가짜 인생

민소희 가창력을 눈앞에서 듣게 되다니, 무대는 환상 그 자체였다. tv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현장감, 거기에 TV나 유튜브로 보던 블링 걸즈는 그저 노래를 잘한다는 정도였는데, 직접 라이브 하는 걸 바로 앞에서 보다 보니, 성량이나 음색의 매력 그리고 특히 민소희의 가창력의 박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청순한 소녀의 모습 이면에 이런 섹시하면서도 파워풀한 노래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블링 걸즈의 축하 무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대성 전자 30주년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진수는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행사장에는 어디서 한 두 번씩 본듯한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참석해 있었다.

대성 그룹 같은 재벌 그룹의 행사니 당연한 일, 국회의원들도 많이 보이고, 서울시장도 참석했다. 거기에 다른 재벌 그룹의 사장단도 많이 참석했다고 하는 것 같았다.

연예인들도 제법 보였는데, 꽤 유명한 중년의 남자 배우는 무슨 영화협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는 것 같았다. 대성 그룹 산하의 스포츠팀 감독과 유명 스포츠 스타들의 모습들도 보이고 그 외에 대성 계열의 출판사가 있는지 유명 작가들을 비롯한 예술계 인사들도 참석한 것 같았다.

그리고 메인 이벤트인 문위 우표에 대한 연구 발표가 시작됐다. 연구를 한 것은 최기현 교수였지만, 진수가 발견해서 대성 그룹에 판매한 진품 문위 우표와 함께 무대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 건 장태식 회장이었다.

“이 문위 우표의 존재로 한국의 근대 우편의 시작이 고종 황제의 지시로 세워진 우정국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정국에서 시작된 근대 우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바로 대성 전자의 휴대폰인 것입니다. 백 년 전의 문위 우표의 꿈은 이제 대성의 IT 기술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장태식 회장의 권위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30주년 행사는 진품 문위 우표를 공개하는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더해져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메인 행사가 끝난 후에 만찬이 더 이어졌지만, 진수는 최기현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빠져 나왔다.

***

성수동 트리피오, 커뮤니티 헬스장.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진수였지만, 편의점을 그만둔 후에는 활동량이 줄고 먹는 건 잘 먹어서 그런지 점점 뱃살이 붙는 느낌이었다.

그래, 운동을 해야겠어. 외모가 이 이상으로 무너지는 건 곤란하지. 그래서 새로 이사 온 아파트의 남는 방에 운동기구를 놓고 홈트레이닝을 시작했지만, 간단한 운동은 몰라도 뭔가 에너지 소모가 많은 유산소 운동을 하기는 좀 어려웠다.

그래서 집에서는 간단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 정도로 하기로 하고 유산소 운동을 하기 위해 커뮤니티를 찾은 것이었다.

입주민 전용 헬스클럽에는 런닝머신 같은 유산소 운동 기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진수도 오랜만에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헉헉거리고 있는 진수 옆으로 누가 다가왔다. 핑크색 레깅스 스타일의 운동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 몸매가 좋은 여자..

헉, 민소희잖아?

“안녕하세요. 최진수 오빠라고 하셨죠?”

민소희도 운동을 하러 왔는지, 런닝머신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민소희가 내 이름을 알고 있네? 거기에 오빠라고?

민소희는 아주 생얼도 아니고 적당히 내추럴한 메이크업을 했는지 피부가 아주 좋아보였다. 생얼보다는 좀 정돈된 단아한 느낌이라 더 미모가 빛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레깅스와 스포츠 브라 차림이라 몸매도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몸매도 균형이 잘 잡히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몸매였다. 몸매 종결자라는 은채 못지않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은채가 레깅스를 입은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음,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라는 느낌적인 느낌. 은채가 좀 조용한 타입에 먼저 묻지 않으면 말이 없는 단아한 고전 미인 스타일이라면, 민소희는 전형적인 아이돌 스타일로 웃는 모습도 발랄하고 연예인의 특징인지 붙임성이 좋고 진수처럼 말이 없는 남자랑도 재밌게 이야기할 수 있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음 이상형 월드컵인가? 월드컵 결승 수준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승부이군? 푸하하, 아니 내가 뭐라고, 둘을 놓고 이상형 월드컵이야?

정신 차리고 주제 파악 좀 하라고 최진수. 네가 진짜 재벌이면 몰라도, 둘 다 그림의 떡이라고.

아무튼, 한 번 만났다고 오빠라고? 아니지, 한 번이 아니구나, 대성 전자 30주년 행사..거기서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민소희도 나를 알아봤을까?

“운동을 열심히 하나 봐요? 몸매도 섹..아니 날씬한 것 같고요.”

“예, 물론이죠. 연예인이잖아요. 자기 관리를 안 하면 도태되는 곳이니까. 몸매 관리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겠네요. 아무튼, 열심히 운동도 하고 보기 좋네요..운동 하는 모습이요.”

“말 놓으세요. 진수 오빠.”

뭐, 진수 오빠? 말을 놓으라고? 그럼, 소희야 이렇게 부르라는 건가?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두 번을 만났을 뿐인데, 그것도 한 번은 나를 기억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지금까지 살면서 예쁜 여자에게 이렇게 오빠 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은채랑 친하게 지내지만, 내가 오빠는 아니니까 말이다.

남자들이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네. 민소희처럼 귀엽고 섹시하기까지 한 여자아이가 오빠오빠 불러주니까, 왠지 설래잖아?

그런데 정말, 말 놔도 되나?

“아, 그래도 한 번 본 것뿐인데, 말 놔도 되나요?”

“한번요? 두 번 만난 거 아닌가요? 오늘이 세 번째죠.”

역시 대성 그룹 행사장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이 확실했다. 민소희도 그때 나를 보고 웃은 거였군.

“아, 백제 호텔에서 말이죠?”

“예, 지난번에 백제 호텔에서 봤었잖아요. 장태식 회장님과 친하신가 봐요?”

민소희는 런닝머신 속도를 높이며 말했다.

진수는 반대로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뭐, 일이 있어서 잠깐 같은 테이블에 앉은 것뿐이죠.”

“와, 정말요? 일이라면? 비즈니스? 장태식 회장님이라면 우리나라 3대 재벌 회장님이신데. 뭐 하시는 분인데 장태식 회장님과 비즈니스를 하세요? 그것도 같은 테이블에서 말이에요.”

민소희는 런닝머신에서 뛰면서도 그다지 숨이 차거나 하지는 않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올해 나이가 스무 살이라는 것 같으니까, 한창 좋은 나이였다.

체력도 좋은 것 같고, 몸도 가벼운지 가볍게 폴짝폴짝 뛰는 폼이 여간 여유롭지가 않았다. 확실히 아이돌이라 런닝머신에서 운동하는 모습도 무슨 뮤직비디오를 보는 느낌이고 말이다.

진수가 감탄을 하며 바라보자, 민소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라? 왜 웃는 거지?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흠, 뭐 대단한 건 아니고요. 제가 장태식 회장님을 좀 도와드렸죠.”

“와, 정말요? 영민 오빠가 진수 오빠가 재벌이라고 하더니 정말이었어요?”

재..재벌? 물론, 그런 건 절대로 아니었다. 내가 재벌일 수가 있겠어? 하지만 학교에서도 그렇지만 민소희도 내가 재벌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걸까?

그래서 그다지 친분도 없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고, 오빠라고 친근하게 불러주고, 약간 나이 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을 놓으라고 말해주고 말이다.

그 모든 게 다른 이유가 있을 리는 없었다. 거기다 민소희는 연예인, 유명 여자 아이돌 멤버였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그래도 연예계가 어떤 곳인가? 그런 험난한 연예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현역 아이돌인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물론 본인의 착각이기는 하지만 진수가 대성 그룹 장태식 회장과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진수도 역시 그런 재벌가와 관련된 거물이라고 믿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민소희 정도 되는 스타가, 잘 알지도 모르는 진수에게 먼저 나긋나긋 오빠오빠 하면서 다가오는 것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쁘지는 않았다. 다 거짓이기는 하지만 그런 재벌이나 뭔가 거물급의 인물이 되어 보는 것도 말이다. 단지 환상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

아무튼, 민소희에게 들은 민영민이 이야기를 한 건지 학교에서도 진수에 대한 소문, 대성 그룹 장태식 회장과 친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최진수 선배, 재벌이라는 소문이 진짜였나?”

“정말?”

“그래, 나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성 그룹 장태식 회장하고 찍은 사진이 있더라고.”

“사진?”

“그래, 뉴스 기사에도 나왔어. 이거 봐.”

사진이 있다고? 뉴스에?

진수도 궁금한 마음에 검색을 해보니, 대성 그룹 행사장에서 장태식 회장 바로 뒤에서 마치 가까운 사이처럼 찍힌 사진들이 있었다.

실제로는 큰 의미는 없는 것들이었지만, 진수를 아는 학교 선후배들이나 동기들은 그 사진 하나로 진수의 재벌설을 더 신봉하게 된 것 같았다.

하긴, 평범한 대학 2학년 복학생이 어떤 이유든, 대성 그룹 장태식 회장과 이렇게 가까이서 사진이 찍힐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 말이다.

거기에, 정식 초대를 받고 간 거라, 진수도 정장 수트 차림이었다. 그래서인지 우연이 찍혔다기보다는 장태식과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사진이었던 것이다.

재벌설이 점점 더 신빙성을 가지게 돼서일까? 학과 내에서 진수를 대하는 태도들이 전보다도 더 친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진수를 약간 어려워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마치, 진짜 재벌 3세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러는 그런 진수를 부담스러워하거나, 아니면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소수고 대다수는 재벌 3세라는 소문의 진수에게 다들 호의를 보이며 어딘지 부러움 내지는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것을 진수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특별해진 느낌, 그것이 단지 사람들의 착각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선망의 시선이 주는 자신감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 나라고 재벌이 못 되란 법 있겠어? 이렇게 된 거 돈을 더 벌어서 재벌 행세를 제대로 해볼까?

그러려면 돈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풍족한 서민으로 살 정도의 돈이라면 충분했지만, 재벌3세 코스프레를 하기에는 돈이 부족했으니까 말이다.

진수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건 없으니까, 이번에도 행운의 과자가 들어있는 병을 열고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과자를 입안에 넣고 씹자, 바삭거리는 과자의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온 것은...

‘0437428845’

역시 전화번호군? 043이 지역 번호인 것 같은데, 여기가 대체 어디야?

검색을 해보니, 충청도의 영동군이라는 곳이 검색이 되었다.

영동이라? 강원도가 아니라 충청도의 영동이라는 거지? 그리고 역시나 전화번호는 영동에 있는 부동산 중개소 전화번호였다.

역시 한국에서 돈을 벌려면 땅뿐이라는 건가? 하긴 돈을 쉽게 버는데 부동산만한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12억 5천에 샀던 경희궁 아파트가 지금 시가가 18억이 되었고, 35억에 계약한 트리피오 58평형 아파트도 지금 살고 있기는 하지만 주변에서 거래되는 가격은 40억 이상이니 말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었을 뿐인데 몇 달 사이에 수십억의 시세 차액이 발생한 것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되는 확률을 생각하면 부동산처럼 쉽게 돈 버는 일도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동산 중개소 위치가, 충청도라? 아무래도 수익률이 높은 고가의 부동산은 서울, 그리고 강남 쪽일 텐데? 충청도에 투자할 만한 부동산이 있다는 건가?

약간,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진수는 일단 행운의 과자를 믿어보기로 했다. 아직까지 행운의 과자의 행운이 진수를 실망시킨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043-742-8845

“여보세요. 뉴욕 부동산입니다.”

“예, 뉴욕요? 거기 충청도 아닌가요?”

“맞습니다. 충청도 영동에 있는 뉴욕 부동산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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