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일언 중천금
“하하..하하하...”
남자는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게 됐군. 최진수 씨, 같이 갑시다. 저 깊고 푸른 한강물로 말이죠.”
그..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아니야...아...안 돼...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는 늦었다. 이성현은 도망치려는 나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물론, 내가 도망칠 마음만 있었다면 언제든지 이런 녀석 하나는 간단하게 완력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 최진수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해 도망치지 않았다. 왜냐? 그건 일종의 신뢰의 문제였던 것이다. 분명히 이성현은 나에게 비트코인 비밀번호를 풀어볼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면 비트코인의 절반을 주고 실패하면 같이 한강으로 뛰어들겠다는 제안을 하고 나는 어쨌든 묵시적 그것에 동의한 것이었다.
일종의 계약을 맺은 것이었고, 그걸 지키는 것은 신뢰의 문제였던 것이다. 비겁하게 나의 책임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약속은 약속이죠. 신뢰라는 것, 약속을 지킨다는 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남아 일언 중천금 아닙니까? 그래, 같이 갑시다.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겠군요.”
인생이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돈을 벌고, 아파트에 강남 건물주가 되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죽음이라, 갑자기 한강물 입수라니...약간 억울한 마음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남아 일언 중천금 아닌가?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시대, 돈이면 다 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그 지켜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신뢰인 것이다. 나는 신뢰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마포 대교에서 푸른 강물로 미련 없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비명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아악....”
한강물은 따듯..아니, 트리피오 아파트의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듯했다. 포근해서 낮잠이 찾아올 정도로 말이다.
꿈을 꾼 모양이다. 물론, 행운의 과자의 행운이 나를 배신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트코인 지갑의 비번은 맞았고, 이성현은 코인 지갑을 열어서 7천 개의 비트코인이 들어있다는 것도 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일단 자기가 비트코인을 처분해서 내 계좌로 보내주겠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이성현과의 일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현에게서는 감감무소식,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 외에는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왔다는 것 같은데, 설마 그 돈을 가지고 다시 미국으로 가버린 거 아닐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나라고 해도 그 2천억을 가지고 도망을 갈 것 같기도 했다. 일면식도 없던 어떤 남자에게 1천억을 그냥 나눠주기는 정말 아까운 일일 것이다.
화장실을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다르다고 한다. 살다 보면 아쉬울 때 도와달라고 해서 도움을 주고 나중에 오히려 비웃음을 당하는 일도 많고,
그래서 이성현에게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지만 나도 따로 연락을 해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녀석이 나에게 돈을 줄 마음이 있다면 줄 것이고. 이미 마음이 돌아섰다면, 내가 전화를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는데, 나의 꿈속에서는 비번이 틀렸고, 나는 도망치지 않고 한강물로 뛰어드는 꿈을 요새 자주 꾸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거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죽음을 선택했다, 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사실은 이성현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돈 입금하라고 이 자식아.. 이거 고소를 해야 돼? 고소하면 이길 수 있나?
어쨌든, 생활비는 바닥이 났고. 일단 수중에 현금이 없어서 커뮤니티 식당도 맘대로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포르쉐도 당분간은 운행 불가,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이 없으면, 특히 현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신용카드도 없었다. 체크카드만 쓰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체크카드를 이용했고, 나중에 돈이 생긴 후에도 현금을 바로 쓰면 되니까, 신용카드가 따로 필요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일시불로 결제를 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돈도 다 떨어지고, 할 수 없이 지도 검색으로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슈퍼를 발견하고 거기서 급한대로 라면과 계란을 사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비닐봉지에 든 것은 라면 5개짜리 두 팩과 계란 한 판...이걸로 당분간 식사를 대신할 생각이었다. 라면이야, 예전부터 자취하던 나에게는 익숙한 음식. 뭐, 강남 건물주가 된 후에도 컵라면도 많이 먹기는 했지만,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먹는 라면은 맛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돈이 있을 때 먹는 라면은 일종의 별미이고 마치, 아이들이 먹는 불량식품처럼,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돈 없어서 먹게 되는 라면은 뭔가 영양분도 부족하고 나트륨 과다로 영양실조에 걸릴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터덜터덜 기름값도 없어서 다시 뚜벅이로 돌아가, 멀리 슈퍼에서부터 트리피오로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멍한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트리피오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쯤..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눈에 뜨였다. 그리고 그 녀석과 다른 두 녀석, 아니, 한 명은 여자였다. 아무튼, 이쪽을 향해 기쁜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 저 녀석은, 멀리서 봐도 민영민, 가까이서 봐도 민영민이 확실했다. 하필, 돈도 없고 초라하게 라면 사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만나네. 입도 가벼운 녀석인데, 이제 나도 재벌 3세가 아니라 가난한 복학생이라는 것이 탄로가 나는 것인가?
아니지, 가난한 복학생은 아니잖아? 고급 아파트에 강남에 건물도 있고, 단지 현금이 없을 뿐이다. 통장 잔고는 이제 천 3백원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 삼백 원, 백원이 13개, 13이라는 뭔가 불길한 숫자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말았어.
민영민을 만나다니..
“선배님, 최진수 선배님.”
민영민은 진수를 향해 쓸데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냥 걸어도 되고, 굳이 안 움직여도 어차피 내가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말이다. 대체 징그럽게 왜 달려오는 거냐고? 무슨 여자 아이돌 그룹 멤버라면, 귀엽기라도 하지...
상상이 되었다. 귀여운 걸그룹 멤버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상상 말이다.
오빠, 최진수 오빠다. 돈 많은 재벌 오빠..최진수 오빠..오빠..오빠...
이러면서 말이야, 귀엽게 우르르 달려오면 얼마나 귀엽겠어..
하지만 현실은?
“선배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왜?”
“저기, 뒤에 이번에 새로 들어온 프레쉬한 새내기들입니다.”
“1학년이라는 거지?”
원래, 학교에서는 아웃사이더였고, 행운과자로 돈을 번 후에는 재벌이라는 오해도 받으면서 나 스스로도 신비주의 컨셉이랄까? 약간 학교 애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행운과자의 행운을 즐기느라 학교는 좀 시시해진 것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경영학과는 원체 학생 수도 많고 얼굴은 다 알기 힘들지.. 아무튼, 민영민은 1학년이라는 남녀 커플, 그러니까 남학생 하나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원래는 자기 사촌 동생인 민소희네 집 구경을 시켜주러 온 모양인데, 갑자기 스케줄이 생겨서 민소희는 부산으로 내려갔고, 민소희를 만나서 저녁까지 얻어 먹을 계획이었던 민영민은 졸지에 입장 곤란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트라피오에 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인데...
“전화도 안 받으시더라고요.”
“귀찮아서 꺼놨어.”
“와, 너희들도 들었지? 최진수 선배님이 이런 분이야, 귀찮으면 그냥 꺼 놓는 거지. 재벌들이 그렇잖아. 온리 마이 웨이, 내 뜻대로 사는 분이라는 거지.”
이 자식이, 돈도 없고 심란한데 무슨 또 재벌 타령이야.
“야, 뭐 하니, 인사드려.”
“20학번, 유하나입니다.”
음, 약간 귀여운 친구네, 합격..크큭..이런 내가 뭐라고 합격이야..아무튼 귀엽고 프레쉬한 여학생이었다.
“20학번, 박성준입니다.”
음, 나는 남자에게는 엄격하지, 남자는 좀 강하게 다뤄야 남자다워지잖아..이 친구는 운동 좀 해야겠어..
나의 엄격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일반적 시각으로는 키도 크고 핸섬한 친구였다. 도대체, 나는 주제파악도 못 하고, 누가 누굴 평가질을 하냐는 말이다...
“오, 그래, 반가워. 민소희를 만나러 왔다고?”
“예, 소희 걔가 후배들 데리고 오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성수동 구경도 시켜준다고 그래서 얘네들 데리고 온 거 아닙니까?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소희는 아이돌이라 돈이 많지만 저는 그냥 대학생이고 돈도 없고.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선배님이 지나가지 않으실까,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에 든 봉지는 뭔가요?”
“어, 이거...”
아, 이 자식은..꼭 이런 안 좋은 타이밍에 나타나서, 라면 10개랑 계란 한판..이런 거 사들고 다니는 걸 꼭 새내기들 앞에서 공개를 시키다니, 민영민이 만들어 준 최진수의 재벌 이미지도 이제 끝인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건 진실의 순간뿐..그래, 사실, 내가 재벌은 아니잖아. 그저 운이 좋아서 이런 좋은 아파트에 살게 된, 전직 편의점 편돌이, 현재는 하우스 푸어일 뿐이다.
봉지 안에 든 라면과 계란이 나의 진실이고 말이다. 하지만 부끄러울 것은 없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언제까지 거짓 이미지 속에 갇혀 살 수는 없잖아? 그게 아무리 달콤하다고 해도 말이다.
“야, 이건 내가 먹으려고 사온 라면하고 계란이야. 보이지?”
검은색 봉지 안을 열어서 보여주자, 민영민과 유하나와 박성준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치는 느낌이었다.
이제 녀석들도 내가 재벌 3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러면 전처럼 나를 떠받들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재벌 3세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유지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허상에 불과한 이미지는 나를 풍선처럼 과장된 허상과 거짓으로 부풀려 놓았지만,
이렇게 언제 어디서든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진실이라는 날카로운 송곳에 찔려 쉽게 터져 버릴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일 뿐인 것이다.
“얘들아, 특히 민영민, 잘 들어. 나는 보다시피 돈 많은 재벌이 아니야. 라면하고 계란을 사러 멀리 슈퍼까지 걸어갔다 오는 뭐랄까? 소시민에 불과한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야.”
“선배, 농담이시죠? 하하..하하하...”
할 수 없군. 잘 안 믿으니, 내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줄 수밖에...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귀찮아서 꺼두었던 스마트폰을 켰다. 나에게 남은 것은 13척의 아니, 백원짜리 13개 뿐이다. 나의 천 삼백 원이 들어 있는 통장 잔고를 녀석들에게 확인시켜 주기로 했다.
“농담이 아니야, 이거 내 통장 잔고야. 한 번 얼마가 있는지 확인해 봐. 나 완전 거지라고.”
선조에게 신에게는 13척의 배가 남았다고 했다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명량해전에는 12척이 출격했지만 사실 파손된 1척이 해남 우수영에 더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에게는 13척이 있었다.
13은 불길한 숫자인데, 다행히 한 척이 빠진 덕분이었을까? 명량 해전은 대승으로 끝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의 통장에는 불길한 천 삼백 원이 있을 뿐이었다.
“서..선배님..최진수 선배님..푸하하핫...하하...하하하...”
민영민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제 녀석도 나를 비웃는군. 재벌인척 하더니, 통장에 천 삼백 원뿐이라니, 이제는 내가 우습다는 건가?
“선배님, 와, 이게 바로 재벌가의 유머 코드군요.”
무슨 소리야, 이게 웃겨? 유머 코드? 그리고 아직도 재벌 타령인가? 내가 장난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머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배님 너무 하십니다. 통장에 천억이 들어있는 걸 이런 식으로 자랑하시나요?”
“뭐, 처..천억? 천 원이 아니고?”
어떻게 된 거야? 진짜야? 사실이야? 스마트폰의 계좌 잔액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일십백...억..십억? 백억? 처..천억? 오 마이 갓. 진짜 통장에 천억이 들어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