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효과
“오, 이게 바로 아멕스 블랙카드군, 007 제임스 본드의 카드 말이야.”
007 제임스 본드야말로, 남자들의 로망이 아닐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쳐부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말이다. 그렇게 간 전 세계의 아름다운 명소들에는 카지노, 호화 요트, 멋진 저택과 호텔들, 최고급의 레스토랑...아니, 이거 관광 다니는 건가?
거기에 아름답고 섹시한 본드걸과 악당들 쪽에서도 관능적인 미녀들은 있게 마련이고 거기에 아름다운 풍광의 관광지들을 배경으로 멋진 스포츠카, 그리고 아마도 영국 정보국에서 무한대로 쓰라고 준 것이 분명할 것 같은 본드의 화수분 카드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카드가 있는 것이다.
보통은 007을 살인면허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현질면허라고 할 수 있다. 행운의 럭키 세븐을 가진 제임스 본드는 전 세계를 돌면서 고급차와 미녀들, 화려하고 럭셔리한 인생을 살지만 돈 걱정이나 파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가 쓰고 다니는 모든 비용은 국가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 나도 제임스 본드처럼 아멕스 카드와 행운의 럭키 세븐이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집으로 도착한 아멕스 블랙카드는 일단, 박스부터 뭔가 달랐다. 검은색의 카드 케이스는 샤넬 아멕스 센츄리온 카드 케이스, 카드 케이스가 샤넬이다.
거기에 일반 플라스틱 카드와 달리 이건 금속 재질, 무슨 티타늄이라고 한다. 헐, 제임스 본드라면 급할 때 무기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튼,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마법의 카드, 아멕스 블랙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이걸로 그러면 뭘 사볼까? 카드 신청을 할 때 은행 직원에게 듣기로는 회원 자격을 유지하려면 연간 3억 이상을 결제해야 한다니까, 일단 뭐라도 사기는 해야 했다.
그러면, 역시 민소희가 환장한다는 람보르기니인가?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타고 멋지게 도산대로를 달려볼까?
아니지, 인간은 학습의 동물 아닌가? 지난번에도 생각 없이 포르쉐 파나메라를 샀는데, 급하게 집에 내려가니까, 시골에서 고생하시며 트럭을 타고 다니시는 부모님 때문에 죄송스러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 학습효과가 있어야지 사람이라면 말이야. 뭐 돈이야 충분하니까, 람보르기니를 사기는 할 거지만 일단,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에게 뭐라도 먼저 해드리고 사자고...
일단 백화점에 가서, 어머니 옷이랑 화장품도 하나 고르고, 러시아 아바이스크산이라는 무슨 녹용 세트도 하나 샀다. 아버지가 은근히 건강식품 그런 걸 좋아하셔서 말이다.
결제를 할 때는 아멕스 카드를 한 번 써볼까? 했지만, 이 정도 결제에 블랙카드를 꺼내는 건 좀 그렇고 말이다. 뭔가 소총 하나면 될 일에 미사일을 날리는 느낌이라 아멕스 블랙은 살짝 꺼냈다가 다시 넣어두고, 전에 쓰던 체크카드로 결제를 했다.
그렇게 부모님 선물을 챙겨서 다시 고향을 찾았다.
***
무진시, 진수의 고향집.
“집을 새로 짓겠다고?”
“예, 집이 오래됐잖아요. 그리고 영수네도 새로 집 지었고요.”
고영수라고 옆집에 사는 친구네 집인데, 우리 아버지와도 친구 사이다. 나이는 아버지가 한 살 더 많지만, 그냥 친구처럼 지내시는 사이셨다. 집도 가깝고 말이다. 예전에는 둘 다 오래된 시골집이었는데,
영수네 아버지가 딸기 농사가 잘돼서 돈을 좀 버셨는지, 몇 년 전에 집을 새로 신축을 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우리 집은 좀 초라해진 느낌도 있고, 그게 아니어도 지은 지 30년은 된 집을 중간에 한 번 리모델링을 한 집이라, 이제는 새로 신축할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여보, 아들이 집 지어 준다잖아요.”
어머니는 옷과 화장품을 열어 보실 때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원래 교회를 열심히 잘 다니시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느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믿으시는 분이라, 서울에 사는 아들이 돈이 많아진 것도 어머니 본인이 기도 열심히 하신 덕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집이 오래되기는 했는데, 진수 너 그렇게 돈이 많은 거냐?”
아버지 앞에서 아멕스 카드를 보여드릴 수도 없고, 하긴, 보여드려도 뭔지 잘 모르시겠지만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돈 잘 벌어요.”
“뭘 해서 그렇게 돈이 많은 거야? 로또 당첨된 건 알고 있다만. 그걸로 아파트 사고 남은 돈이 아직도 있는 거냐?”
“아, 그게 말이죠. 그때 당첨금 받은 돈으로 투자를 한 거죠. 계속 돈이 늘어나는 거예요.”
“돈이 늘어나? 저절로? 무슨 화수분 단지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니?”
어떻게 설명을 하지? 행운과자에 대해서 말해드릴 수도 없고 말이야.
“그게, 주식 투자 그런 걸 했는데, 제가 운이 좋아서 그런지 주식을 사면 막 가격이 오르고 그러더라고요.”
대충 아버지에게는 주식 투자로 대박이 터진 것처럼 설명을 했는데, 아버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는 표정이셨다.
“원래, 자본주의라는 게 그래요. 일하는 사람이 돈 버는 게 아니라, 돈이 돈을 버는 거죠. 그냥 돈을 굴려서 점점 더 커졌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뭐, 그래, 아버지도 농사만 짓고 살았지만, 서울에서 주식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거 잘못하면 폐가망신한다는 이야기도 있더라. 도박 비슷한 거라면서?”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적당히 요령껏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약간 거짓말을 섞어서 적당히 설명을 하고 나니 아버지도 결국 집을 새로 짓는데 동의를 하셨다.
“그래, 뭐, 아들이 돈 잘 벌어서 집을 새로 지어 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그럼, 일단 땅이 있어야 하는데..”
시골이라 사실 땅은 충분히 공간이 있었다. 집터와 앞에 텃밭 그리고 집 뒤쪽에도 빈 땅이 더 있고 주택 신축 부지는 충분했던 것이다.
일단, 부모님은 시내에 전셋집을 얻어서 이사를 하고, 지금의 집을 허물고 신축을 하기로 했다.
***
도경수 건축 사무소.
“전원주택을 신축하시려고요?”
“전원주택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농가 주택을 허물고 부모님에게 새로 집을 지어드릴 생각입니다.”
“오, 그래요? 나이가 젊어 보이시는데? 능력자시네요.”
“하하, 뭐, 좀 투자한 자금이 많이 불어나서...”
“투자요? 주식이나 부동산 그런 거 말인가요?”
“뭐, 비슷합니다. 비트코인 그런 쪽이죠.”
“오, 말로만 듣던 비트코인 투자자를 직접 만나게 되네요. 정말 비트코인으로 큰 돈을 버신 겁니까?”
주택부지는 원래 고향 집터에 지으면 되기 때문에 그다음으로 설계를 상담하기 위해 건축사의 사무실을 찾았는데, 건축사는 주택 상담보다는 비트코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하, 뭐, 나름 성공했습니다. 뭐, 대충 이 정도랄까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지갑에서 아멕스 카드를 꺼내고 있었다. 블랙카드를 수령한 후에 사람들 앞에서 직접 꺼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자본주의 시대의 최강 아이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카드 말이다. 이걸, 과연 이 건축사가 알아볼까?
“어, 이건?”
“뭔지 아시겠습니까?”
“와, 아멕스 블랙카드군요? 정말 비트코인으로 대박이 나신 모양이네요.”
“예, 그래서 그동안 못한 효도 좀 하려고요. 항상 낡은 집이 좀 신경이 쓰였었죠. 어릴 때는 우리 집은 집이 왜 저렇게 초라한 걸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고요. 몇 년만 해도 나이도 어리고 돈도 없어서, 아버지가 새집을 짓기만을 바랐던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가 집을 지으면 되는 거였어요.”
“음, 굉장하네요. 역시, 기존의 자본주의 질서에도 뭔가 균열이 생기는 것 같네요. 비트코인 같은 블록체인 화폐의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록체인요?”
맞아, 비트코인이 암호화 화폐니 블록체인이니 그런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그게 무슨 말인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비트코인 덕에 내가 부자가 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아멕스 블랙카드로 생기고 말이다.
아멕스 블랙카드로 직접 결제를 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카드를 꺼내 보인 것만으로도 도경수라는 건축사무소 사장님의 반응은 크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어린 나의 외모를 보고, 약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면, 내가 아멕스 카드를 꺼내 보여주자, 나를 마치 연예인처럼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비트코인 투자에도 대해서도 자꾸 물어보고 말이다.
“비트코인은 지금은 일단 투자는 유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지금은 역시 가격이 너무 올랐죠?”
“예, 제도 다 코인을 처분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좀 위험할 것 같네요. ”
“하긴, 그런 투자도 아무도 하는 건 아니겠죠. 아무튼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비트코인으로 아멕스 블랙 카드까지 소유하게 되시고 말입니다.”
“하하, 뭐, 그냥 하나 만들어 둔 겁니다.”
카드는 다시 지갑에 넣어 두었다. 아직은 이걸로 결제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블랙카드의 힘인지, 전원주택에 대한 상담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럼,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한, 100평 이상이면 좋을 것 같은데요.”
“두 분이 사실 거라면서요? 부모님 두 분만 사시는 거죠?”
“그렇죠. 그래도 집이 크면 폼도 나고 좋은 거 아닌가요?”
도경수 건축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집을 크게 지으시면 좋을 것 같지만. 가정부를 따로 두고 사시는 게 아니라면, 큰 집은 관리하는 게 힘드시죠. 특히 어머님이 일이 많아지실 겁니다. 청소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뭐야? 집이 크면 어머니가 일이 많아진다고? 하긴, 그렇기는 하네, 집이라는 게 청소도 해주고 그래야 하니까. 그렇다고 가정부를 두고 사시라고 하시면 오히려 불편해하실 것 같고 말이다.
“음, 그러면 건축사님 의견으로는 어느 정도 규모의 집이 적당하고 생각하시나요?”
“시골에 부모님 두 분이 사시는 집이고, 주말에 아드님이 가끔 찾아가시는 정도라면 42평 정도에 집 앞에 데크를 11평 정도 시공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42평요?”
42평이면 지금 살고 있는 트리피오 아파트나 신사동 펜트하우스와 비교하면 굉장히 작게 느껴졌다.
“그 정도면 좁지 않나요? 제가 서울에 혼자 사는 아파트가 56평인데. 뭐, 혼자 살기에는 엄청 크지만 말입니다.”
“아파트와 시골 단독 주택은 또 다르니까요. 앞에 데크도 만들 거고요. 아파트와 달리 시골의 전원주택이라면 마당도 있고 해서 추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요. 장독대 같은 것도 있고 빨래도 마당에서 건조하거나, 평상도 만들 수 있고요. 테이블이나 의자를 가져다 놓으면 집 바깥도 휴식 공간이 되니까요.”
“그렇기는 하겠네요.”
생각해보니, 42평이면 지금의 오래된 시골집보다 훨씬 넓은 면적일 것이다. 그리고 단독 주택은 마당도 일종의 생활 공간으로 봐야 하니까, 아파트와 단순 비교는 어려울 것이고 말이다.
“아무래도 부모님들이 사실 곳이니까, 1층에서 주로 생활하시는 걸로 하고, 시골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주방과 거실은 분리가 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국이나 찌개 요리가 많으신 걸 생각해서 환기가 잘 되는 보조 주방도 만들고요. 그리고 2층에는 아드님이 가끔 오셔서 묵을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고 나머지는 고추나 멸치를 말리는 옥상 공간으로 쓰시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잘은 모르겠지만, 전원주택 쪽은 경험이 많다고 하니, 구옥의 철거부터 설계 시공까지, 도경수 건축사무소에 맡겨 보기로 했다.
그렇게 설계 계약을 하고 나오는데, 뿔이 난 큰 수소를 실은 트럭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황소라?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황소를 잡으러 가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