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푸른 밤
신사동 영진 빌딩 펜트하우스
“아, 마사지를 받고 왔더니 몸이 개운한데.”
성원 소프트의 모바일 게임 라스트 마피아의 성공으로 진수가 투자한 30억의 가치는 수백억서 장기적으로는 천억에 가까이 상승할 거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아직 성원 소프트는 정식으로 상장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라스트 마피아의 인기가 계속 유지된다면 주식 상장이나 매각을 통해서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은 지분을 보유하고 좀 더 가치가 상승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요즘 들어 진수는 영진 빌딩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트리피오 아파트도 최고급 아파트로 생활하기에 불편할 것은 전혀 없는 곳이었지만, 강남에 위치한 진수의 빌딩의 펜트하우스가 여러모로 더 편했던 것이다.
공간 자체도 110평 규모로 더 넓기도 하고, 펜트하우스의 루프탑 특유의 탁 트인 느낌이 좋기도 했다. 계절은 바야흐로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야외의 루프탑이 있는 펜트하우스가 더 좋아지는 계절이었다.
거기에 아래층의 마사지샵에서 편하게 마사지를 받을 수도 있고 말이다. 오늘도 마사지샵에서 스웨디시 아로마 마사지를 받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강남 건물주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온전히 내 소유의 건물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족감이 컸다.
하지만 영진 빌딩에서 바라보는 강남의 전경 속에서 진수의 빌딩은 작고 초라해보이는 것도 있었다.
지상 7층 규모에 연면적 880평 규모의 영진 빌딩은 소형빌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대충 연면적이 1200평은 넘어야 중형급 빌딩이라고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물론 그것보다 더 큰 빌딩들도 수도 없이 많지만 말이다.
그래, 기왕에 강남 건물주가 된 거, 다음에는 더 큰 빌딩을 사야 하지 않겠어?
이성현에게 받은 천억 중에 성원 소프트와 여기저기 개인적으로 쓴 돈을 제외해도 아직 9백억 이상의 돈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중형급의 빌딩을 하나 더 사서 부동산에 투자를 해 볼 생각이었다.
어디 좋은 빌딩이 없을까?
그래, 행운과자를 하나 먹어보자고...
진수는 행운과자 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과자를 입안에 넣자, 고소한 과자가 바삭거리며 부서졌다.
그리고 입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지며 종이쪽지 하나가 나왔다.
이번에도 숫자, 그런데 어디서 낯이 익은 숫자였다.
025158445
여기는 지난번에 영진빌딩을 샀었던 골드 부동산인데, 같은 번호가 두 번이라?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아니지, 행운 과자의 행운이 아직까지 실패한 적은 없었는데, 뭐 부동산이라면 마침 잘 된 거지, 그렇지 않아도 중형급 빌딩을 하나 사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빌딩을 사게 될 운인가?
일단,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최진수 사장님이시죠? 무슨 일이세요.”
지난번에 영진빌딩의 매매를 도와준 오유정 과장이었다.
“저, 여유 자금이 생겨서 중형급 이상의 빌딩에 투자를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은 빌딩이 없을까요?”
“어머, 그러세요. 중형급이라? 지금 괜찮은 매물이 있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
***
신사역 부근, 아이케이 빌딩
“와, 굉장한데요.”
오유정은 짧은 초미니 스커트 차림이었다. 초여름의 날씨와 잘 어울리는 화사한 하늘색의 미니스커트는 오유정의 늘씬한 다리와도 잘 어울렸다.
“꽤 큰 빌딩이죠. 지상 15층에 지하 5층, 대지가 400평이고요. 연면적은 3470평이니까. 상당한 규모죠.”
한눈에 보기에도 영진빌딩과는 차원이 다른 빌딩이었다. 영진빌딩을 이 아이케이 빌딩 옆에 세워 놓으면 꼬마 같은 느낌이 날 것 같은 큰 중형급 빌딩이었다.
강남 건물주라고 하면 이 정도 빌딩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위치도 신사역 근처로 대로변에 있어서 이면 도로에 있는 영진 빌딩과는 확실히 느낌도 다르고 말이다.
“이런 빌딩은 어느 정도 가격인가요?”
“원래는 8백억은 훨씬 넘는 수준이지만, 지금 720억이면 매수 가능하시거든요.”
720억? 물론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빌딩의 규모나 위치가 영진 빌딩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오유정의 안내로 빌딩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각 층마다 치과나 피부과 병원, 그리고 벤처 기업 사무실 들이 입주해 있어서 뭔가 대단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확실히 입주한 업체들도 그렇고, 뭔가 영진 빌딩하고는 차원이 다른 빌딩이네요.”
“후후, 아무래도, 중대형 빌딩이라고 할 수 있죠. 빌딩은 중형급 이상에 대로변이라 임대수익도 높은 곳이고요. 장기적으로 봐도 투자가치가 있는 빌딩이에요. 지금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매수하실 수 있는 기회고요.”
준공 년도가 2011년이라는데 내부는 굉장히 깔끔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쓰는 곳을 둘러보니, 층고가 높아서 시원시원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고층빌딩이라 전망도 좋아서 신사역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시티뷰도 마음에 들었다.
“어떠세요, 이 정도 가격에 이만한 빌딩은 구하기 어렵죠. 가격이 부담이 되시면..”
“아닙니다. 720억 정도를 지불할 능력은 있습니다.”
“정말요?”
오유정은 빌딩을 구매할 수 있다는 진수의 말에, 순간적으로 눈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정확한 비율은 모르겠지만, 이 거래가 성사되면 오유정에게 떨어지는 수수료도 상당할 테니 말이다.
“하하, 그만한 돈도 없이 이런 빌딩을 보러 다닐 필요는 없겠죠.”
“이번 거래가 성사되면 제주도에 한 번 가실 생각은 없으세요?”
“제주도요?”
“예, 제가 제주도 출신이거든요. 어릴 적에 잠시 살았었죠. 우리 회사에서 VIP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별장이 있거든요. 시간 되시면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는 것도 좋잖아요?”
뭐지? 이건, 거래가 성사되면 제주도에 한 번 놀러 가자는 건가? 하하, 그렇다고 내가 그런 말에 혹해서 이 빌딩을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하..하하하..
***
제주도 애월읍
초여름의 제주도는 서울보다 좀 더 더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서 어딘지 청량한 느낌도 있었다. 제주도 구경도 할 겸, 평화로를 타고 달리다가, 도착한 주자장에서 내리자, 저 멀리 오름의 모습이 보였다. 오름이라는 건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이라고 한다.
“저기가 새별 오름인가 보죠?”
“예, 좀 올라가기 힘들어 보이죠?”
“하하, 전 상관없습니다만, 유정 씨가 힘들면, 제가 업고 올라가가겠습니다.”
물론 그냥 해본 소리다, 아무리 여자라도, 업고 산을 올라갈 체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후후, 그런 걱정 할 거 없어요. 웬만한 남자들보다는 제가 더 잘 올라가니까.”
오유정은 오름을 오르는 일이 익숙하다는 듯이 말했다.
부동산 회사의 별장은 제주공항에서 가까운 애월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멋진 바다 풍경과 뒤로는 조용한 숲이 자리 잡아, 조용히 쉬기에는 좋은 위치였다. 마을에서도 꽤 떨어져 있어, 단둘이 좋은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었다.
어제 하루는 별장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제주 관광을 시작하는 길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새별 오름이었다.
오름은 일종의 화산활동으로 생긴 지형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학교 다닐 때,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오름이라는 게, 그러니까, 한라산의 기생 화산이라는 거죠?”
“예, 잘 아시네요. 한라산의 화산활동의 영향을 받은 거죠. 전설에서는 제주도 신화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이 흘린 돌맹이들이 떨어져서 오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설문대할망이라면, 제주도 전설에 나오는 거인 할머니를 말하는 아닌가요?”
“어머, 최 사장님이 설문대할망을 어떻게 아세요? 서울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
“하하, 원래, 옛날 이야기나 그런 걸 좋아합니다. 전설이나, 풍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들..그런 거 말이죠.”
오유정은 제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주 출신의 아버지와 서울에서 내려온 어머니가 결혼해서 오유정을 낳았고 여기서 학교를 다니고 성장한 케이스..
“어릴 적에 아빠랑 자주 오던 곳이에요. 여기가 봄이면 들불축제를 하는 유명한 곳이라는 거 아세요?”
“아, 그 억새를 태우는 걸 말하는 거죠?”
“예, 하지만, 우리 아빠는 여기 새별 오름은 여름에 와야 제맛이라고 하셨어요.”
평화로에서 차를 타고 바라보던 모습과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자, 오름은 제법 웅장한 모습이었다. 서울이나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오름이라는 지형은 독특했다. 한국이 아닌 것 같은 이국적인 모습, 완만한 능선을 따라, 푸른 억새가 줄지어 바람에 흔들리는 여름 풍경은 어딘지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렇기는 하겠네요. 뭔가 되게 분위기 있어요.”
오름 주위의 풍광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웅장하고 신비로웠다. 거기에는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과 그에 따라 흔들리는 억새들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오름을 오르자, 비로소, 여기를 왜 새별 오름이라고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와, 여기서 보니까, 이거 오름이 하나가 아니네요. 마치.. 여기가 가장 높은 곳이죠? 여길 중심으로 하나..둘...다섯 개의 봉우리가 마치 별모양을 이루고 있어요.”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보통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여기가 정상이다, 이러고 마는데..”
“하하, 칭찬인가요?”
“한 가지 더 말해 드릴까요? 이곳의 이름인 새별 오름은, 샛별이라는 의미예요.”
“오, 무슨 뜻이죠?”
“밤하늘에 가장 먼저 뜨는 별이 샛별, 금성이잖아요. 혼자 뜨는 별이라, 홀로 외로운 별이라는 의미죠. 이 주위에는 다른 오름도 없고, 혼자 외떨어진 오름이라는 의미예요.”
“하하, 그러고 보니, 주변에 아무것도 없네요.”
새별 오름 주위는 광활한 초원지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이 주위에서 말을 키우기도 했죠. 공민왕 때, 목호의 난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고요?”
“목호의 난요?”
“이곳에서 말을 키우던 목호들이, 몽고에게 말을 공출하는 걸 거부해서, 공민왕이 토벌굴은 보내 일이에요.”
“오, 그런가요?”
말 목장이 있던, 이곳 새별 오름 주위의 목호들을 토벌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2만 5천을 군사를 이끌고 새별 오름을 공격한 사건이 바로 목호의 난이다.
수백 년 전, 이 아름다운 오름 주위가 피로 물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억새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저 아름다운 오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와 전설이 있네요.”
정상에서 한동안 머물다 오유정과 천천히 오름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기슭 아니, 오름 기슭을 내려오다 보니,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이거 뭐죠?”
중장비로 비탈면을 파낸 곳이 세 군데나 보였다.
“아, 저거요, 말하자면, 한심해요.”
“뭐가요?”
“보물 사냥꾼들이죠.”
“보물 사냥꾼?”
“그래도 허가받고 하는 일이라, 저렇게 파놓고, 나중에 복구해 놓을 거라고 하니까.”
오유정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뭔가를 찾으려고 저렇게 오름 아래를 팠다는 겁니까?”
왠지 보물이라는 말에, 솔깃해지는 기분이었다. 지난번에 충청도 영동에서 금괴를 발견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음, 최 사장님은 전설을 좋아하신다니 이야기해드릴까요?”
오유정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물이라니, 어떤 걸 말하는 겁죠. 진짜 이런 곳에 보물이 있나요?”
“엄청난 황금 이야기죠.”
“황금, 엄청난 황금요?”
“예, 예전에 이곳 제주도에 일본 관동군이 주둔했다는 거 아세요?”
“관동군요? 관동군이라면, 중국을 침략했던 악명 높은 일본군대를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원래는 중국 쪽에 있던 부대인데, 전쟁 말기에 관동군이 대거 이 제주도로 들어왔다는 거죠.”
“제주도는 왜요?”
“저도 역사는 잘 모르지만, 얼핏 듣기로는 이곳 제주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최후의 항전요?”
“오키나와라고 아시죠?”
“일본의 섬, 오키나와 말입니까?”
“맞아요,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잖아요. 나중에는 오키나와 민간인들을 일본군이 학살하기도 하고, 정말 끔찍하지 않아요?”
“그럼, 이곳 제주에서도 그런, 전투가 벌어질 예정이었다는 겁니까?”
“하마터면, 제주도 전체가 아니, 제주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뻔했던 거죠. 다행히 원폭이 투하돼서, 그 뭐라더라? 결7호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결7호 작전?”
“그거 아세요? 오키나와서 민간인이 12만 명이 죽었다는 거, 일본군이 민간인을 12만이나 죽였다고요. 미군에게 협력할까 봐 그런 거였죠.”
“옥쇄작전 말이군요?”
“그래요, 이곳 제주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계획이었다는 거죠. 관동군 7만 명이 들어와서 그런 작전을 실제로 준비 중이었다고요. 그 당시에 제주 인구가 20만이었는데, 원폭 투하가 안 됐다면, 20만 도민이 모두 학살당했을 거예요.”
“천인공노할 놈들이군요, 일본놈들은 여전히 반성을 모르죠.”
“그러게요, 원폭의 피해자처럼 말하는 거 보면 정말 가증스러워요. 원폭이 아니었다면, 일본 본토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여기서 제주도 사람들을 모두 죽일 계획을 꾸몄으면서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 황금이라는 건, 일본 관동군의 황금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관동군이 중국에서 약탈한 엄청난 금괴가 제주도에 묻혀 있다는 그런 소문인 거죠. 그리고 그걸 찾기 위해서 저렇게 오름을 파헤치는 사람들도 있고요.”
오유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유정 씨는 부동산 중개인이 보물 이야기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음, 그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들었어요?”
“선생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