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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농부 (35/200)

황금 농부

지슬인지 뭔지, 일단 감자밭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격납고가 있던 곳이라는 말이죠? 지금은 완전히 흔적도 없네요?”

“그렇죠, 격납고가 무너진 게 벌써 한 70년도 전이니까, 콘크리트 덩어리를 치우고 이 밭을 만들어 놓은 거죠.”

격납고가 있던 자리는 대충 감자밭의 왼쪽 끝부분이라고 했다.

“이쯤 말이군요?”

“예, 거기요. 밭 끝에 보면 아직도 콘크리트가 좀 남아있어요.”

“아, 정말이네요.”

농부의 말대로, 감자밭 한쪽 끝으로 콘크리트 벽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까 봤던 다른 격납고와 비슷한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었다.

“그럼, 대충 이쯤이었겠군요?”

진수는 손을 뻗어 가리키며 격납고가 있던 곳을 어림짐작해 보았다.

이곳이라는 건가? 정말, 고성진 교수의 예상대로, 이곳의 격납고 터 아래에, 관동군의 황금이? 그거야 파보면 알게 될 일이다. 하지만 남의 감자밭을 함부로 팔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이 밭을 돈을 주고 사야 할 것 같았다.

“이 밭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아, 여기요, 제 친구 녀석이죠. 뭐, 요새는 몸이 안 좋아서..”

“몸이요?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그 친구분.”

“허리가 좀 안 좋아요, 남자는 허리가 중요한데..하하..”

“어머, 아저씨, 처녀 앞에서 허리 얘기는..후후..”

오유정은 부끄러워한다는 기색은 전혀 없이 뭔가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아가씨가 있었지, 미안해요. 진짜 그 친구가 허리가 안 좋아서 하는 말이야. 디스크가 있어서..”

“여기, 이 땅 주인이 친구분이라고 했나요?”

“그렇죠, 한 동네서 같이 자란 친구니까요. 잘 알죠. 가끔 막걸리도 마시고 그러는 친구예요.”

“그 친구분 좀 만나고 싶은데,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예? 설마, 이 감자밭에 관심이 있어서?”

“예,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네요. 사실, 제주도에 이주를 해볼까, 그런 생각도 있고. 알뜨르 평야가 너무 맘에 들어서 말이죠. 하하, 여유 자금도 있고, 겸사겸사, 이 밭을 좀 사고 싶은데 말입니다.”

“어머, 최 사장님, 정말 이 밭을 사시게요?”

“그래요, 선생님이 그 친구분 소개시켜 주시고, 유정 씨가 중개하면 되겠네요. 이 아가씨가 부동산 중개사거든요. 하하..”

***

“나야, 허리가 안 좋아서, 농사는 더 이상 짓기 힘들고, 아들놈은 서울 가서 감감무소식이고.”

“저런,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

허리가 그렇게 안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감자밭 주인이 감자밭을 팔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알뜨르의 농경지는 국가 소유라는 것이었다. 개인이 경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유지를 농업인들이 임대해서 경작하고 있는 곳이다.

“농업인 자격만 있으면 감자밭을 이전하는 건 어렵지가 않아요.”

“농업인 자격요?”

뭐야? 농업인 자격증이라는 것도 있나?

자격증은 아니지만, 알뜨르의 농경지를 임대하려면, 일정 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인정하는 농업인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인데, 제주도에서 2년 이상 거주하면서 3백 평 이상의 농사를 짓거나, 연간 90일 이상의 농업 관련 종사자, 아니면 소 두 마리, 돼지와 양은 10마리 이상, 오리나 닭은 100마리 이상, 꿀벌은 10군 이상 사육자, 혹은 연간 120만 원 이상의 농작물 판매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음, 일단 저는 다 해당이 안 되는군요.”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주도에 사는 순영이 이모가 생각난 것이었다.

“아, 예, 이모, 저 진수예요.”

“어머, 진수 네가 웬일이야?”

순영이 이모는 제주 출신인 이모부와 결혼해서 제주도로 이주한 케이스였다. 원래는 서울에 사시다가 이모부 사업이 망해서 제주도로 억지로 가게 된 것이었는데, 아무튼 제주도 시골에서 감자 농사를 짓고 계셨다.

“제주도에 일이 생겨서 왔는데, 지금 이모집에 가도 돼요?”

“그래, 당연히 와도 되지. 언제 올 건데?”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과일하고 홍삼을 사 들고 순영이 이모집을 찾았다. 제주도에 와 본 것도 처음이고, 순영이 이모 집도 처음 와보는데, 맨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농사 짓느라 고생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막상 이모부의 농장을 보니까 꽤 규모도 크고 괜찮아 보이는 농장이었다.

“알뜨르에 감자밭을 임대해 달라고?”

“예, 뭐, 그럴 일이 생겼네요. 농업인 자격이 있어야 임대가 가능하다고 해서요.”

순영이 이모는 갑자기 땅을 임대해 달라는 말에 약간 의아해하기는 하셨지만, 멀리서 찾아온 조카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이전 감자밭의 주인에게 감자값 명목으로 넉넉한 금액을 지불하고 감자밭을 순영이 이모 이름으로 임대하게 되었다.

***

“최 사장님, 돈 많은 건 알지만, 너무 즉흥적이신 거 아니에요? 갑자기 감자밭이라뇨?”

“강남 빌딩도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어서 샀잖아요. 전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즉흥적으로 사는 성격이죠. 돈도 좀 있고. 하하..”

대충 둘러대느라 그렇게 말하자, 오유정은 갑자기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저기, 괜찮은 빌딩이 하나 있는데...최 사장님, 여유 좀 있으시면 빌딩 하나 더 사시겠어요?”

오유정은 갑자기 직업 정신을 발휘해서 강남 빌딩 하나를 더 소개시켜 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제주도에 살만한 집이나 하나 구하고 싶은데요.”

“집요? 그것도 좋죠. 규모는 얼마나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가 묶고 있는 별장, 그 정도면 어떨까요? 그게 몇 평이죠?”

“그건 150평 정도 되죠, 음, 그 별장은 우리 회사 회장님 소유라..그건 좀 곤란하고. 대신, 바닷가에 괜찮은 전원주택이 있는데, 한 번 보실래요?”

감자밭 거래를 마치고, 오유정은 알뜨르에서 좀 떨어진 모슬포 쪽에 전원주택을 추천해주었다.

***

“23억이라?”

2층의 화이트톤의 주택으로 120평 규모의 세련된 전원주택이었다.

“신축건물이고, 딸린 대지도 500평이라고요. 커다란 창고 건물도 따로 있고, 서울에 이 돈으로 이런 운동장 같은 잔디밭 있는 집을 꿈이나 꾸겠어요?”

“그러고 보니, 잔디가 깔린 마당에, 농구대도 있고, 넓긴 하네요. 창고도 요긴하게 쓸 것 같고.”

오유정의 말대로 상당한 규모의 집이었다. 하지만 모슬포라는 외진 곳이라, 23억이면 너무 비싼 거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었다. 모슬포는 제주 말로, 못 살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바람이 거세서 사람이 못 살 포구라는 뭐, 그런 의미라는데, 아무튼, 모슬포의 마을과도 꽤 떨어진 외진 곳이라 밤에는 약간 무섭기도 할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뷰가 너무 좋잖아요. 저 멀리 바다가, 탁 트인 바다가 거실에서 쫘악..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저도 제주가 고향이지만, 이런 뷰는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도 쉽게 볼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좋아요, 계약하죠.”

“정말요?”

집은 나쁘지 않았다. 제주에 별장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에서 외떨어진 곳이라, 조용히 이런저런 작업을 하기는 괜찮을 것 같았다. 커다란 창고도 금괴를 옮기기 좋은 장소인 것 같고 말이다.

***

오유정은 다시 서울로 가고, 나는 일단 서울로 돌아갔다가 주말마다 제주도로 와서 격납고 터를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인부를 고용해 감자를 캐고 나자, 텅 빈 밭을 포클레인으로 파기 시작했다.

“아니, 감자밭은 왜 그렇게 파는 겁니까?”

“아, 이, 격납고 콘크리트를 마저 걷어내려고요. 그리고...”

“그리고 뭐요?”

“땅속에 지하 저장고를 만들어 볼까해서요. 그러니까 구덩이만 파지 말고 옆으로 내려가는 길도 좀 만들면서 작업해 주세요.”

“지하 저장고? 저온 창고 같은 거요?”

“뭐, 그런 거죠.”

“그런 거라면, 그냥 창고를 만드는 게 더 나을 건데..”

인근의 농부들은 지나가며 한마디씩을 하고 가고는 했다.

“그냥 재미 삼아 만들어 보는 겁니다.”

“하하, 서울 양반이라, 우리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뭐, 자기 하고 싶은데로 하는 거지. 돈도 많으신 모양이던데.”

지나가며, 호기심 때문인지 물어보고 한마디씩 하기는 했지만, 크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안쪽에 공간이 있네요.”

“그래요?”

포클레인 기사가 감자밭 옆의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걷어내자 안쪽에 공간이 나왔다. 일단 작업을 중단시키고 근처에 가림막을 쳤다. 구덩이가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구덩이에 누가 빠지면 위험해서요.”

“아, 서울 사람이라 그런지 촌사람이랑은 다르네, 안전이 중요하지, 잘하셨어요.”

일단 포클레인 작업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기사는 돈을 주어서 보냈다.

그리고 근처에 농사짓는 주민들이 별로 없는 오후 시간에 땅을 팔 장비들을 챙겨서 가림막 안으로 들어갔다. 구덩이를 팔 때 내려가는 계단까지 만들어 놓아서, 아래까지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콘크리트를 걷어낸 아래쪽 공간은 다행히 그냥 흙바닥이었다. 삽으로 파기 시작하자, 어렵지 않게 바닥을 팔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작업을 했을 무렵이었다. 삽 끝에 철제 상자의 느낌이 닿았다.

이건가?

조금 더 파내자 상자 윗부분이 드러났다. 상자 위쪽으로 보이는 것은 일본 왕실의 상징인 백합 무늬였다.

진짜? 황금이 있는 건가? 제대로 찾은 거야?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게 관동군의 황금이 들어있는 상자라면 이걸 안전하게 집으로 옮겨야 했다.

사방이 탁 트인 평원이라 눈에 안 띄이게 옮기려면 트럭이 필요했다.

일단은 상자를 대충 파내고, 커다란 화물용 자루에 담아 밀봉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크레인과 화물트럭을 불러 상자를 통째로 들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

시간은 저녁 시간을 일부러 골랐다. 일을 마친 농부들이 다 빠져나가 알뜨르 평원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뭔데, 저 자루는 이렇게 무겁죠? 자루에 크레인을 걸며 기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밭에서 나온 돌하고 콘크리트 그런 것들입니다. 얼른 실어 주세요.”

“아, 예.”

슬슬 저녁해가 지고 있어서 크레인 기사는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트럭에 실린 자루들은 진수가 새로 구입한 전원주택의 창고로 옮겨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창고까지 이동을 마치고 이제는 어두워진 바닷가 전원주택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창고에서 자루를 걷어내고 불을 켜자, 70년이나 땅속에 숨어 있던 철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을 비웃듯 선명한 국화 문양..

상자는 별다른 잠금장치는 없었다. 하긴 지하 10 미터의 비밀스러운 땅속이 잠금장치였고, 그 자물쇠는 70년이나 이 상자를 지켜냈으니 말이다.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상자 뚜껑 사이로 불빛에 반사되는 황금빛이 진수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진짜 황금이었다. 관동군의 황금을 찾은 것이다. 이게 대체 얼마나 되는 거야?

그리고 안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뭐지?”

상자를 열자 서류들이 들어있었다.

이건? 한자네..뭐라고 쓴 거야? 두 번째의 금자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확실하지 않아서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이건, 역시, 누를 황이었군. 그리고 쇠 금, 일백 백, 합할 합, 황..금..백..합...황금백합?

인터넷 검색으로 겨우 서류철의 앞에 적힌 제목을 읽고는 서류철을 넘겨 보았다. 모두 일본어와 한자였다. 일본어든 한자든 나의 능력으로는 해석은 불가능한 상황...

일단, 중요한 서류 같으니까. 따로 잘 보관해 두고..그나저나, 생각보다 금괴가 많지는 않잖아?

철제 상자는 김치냉장고만한 크기로 제법 크고 무거운 녀석이었지만. 관동군의 비밀 금괴 치고는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대충 계산해 보니, 현재 시가로 1400억 정도의 가치였다.

결코, 적은 양은 아니지만 전시에 일본 관동군이 숨겨놓은 것 치고는 상당히 적은 양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인 금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같이 들어있던 서류였다.

하지만 일본어와 한자들로 가득한 서류들은 내용을 전혀 짐작해 볼 수도 없었다. 혹시나 금괴를 숨겨놓은 위치가 적힌 보물 지도라도 있지 않을까? 서류들을 하나씩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지도는 찾을 수도 없었다.

“역시 이것뿐인가?”

금괴를 처분하면 빌딩 몇 개쯤을 더 살 수 있는 돈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아, 미치겠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이 서류들을 번역해 달라고 할까? 일본어를 번역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서류 안에 들어있는 내용들이 뭔지 전혀 모르는 상황, 만약, 금괴의 위치나 적어도 황금백합 작전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다면, 번역자에게 그 정보가 모두 노출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괜히 번역을 부탁했다가 서류를 빼앗기거나, 국가에 헌납당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는데..”

어렵게 찾은 서류들을 그런 식으로 빼앗길 수는 없는 일, 그래,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일본어를 공부해서 이 서류들을 해석해 보는 수밖에 없겠어.

군사비밀 서류들을 해석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일본어 실력이 있어야겠지만 달리 다른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 중요한 비밀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서류들은 미리 준비한 금고 속으로 다른 금괴들과 함께 안전하게 이동시켰다.

서류와 금괴들을 몇 개의 금고에 나누어 놓고 나니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제주도의 푸른 밤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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