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아이디어
문화대학 강의실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어, 선배님 뭐하십니까?”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앞에서 와도 민영민 뒤에서 와도 민영민이었다.
“보면 모르냐? 일본어 공부 좀 하고 있어.”
“일본어를요? 와, 하긴 큰 사업을 하시는 분이니까, 외국어 정도는 필요하시겠죠. 영어는 이미 완벽하신 모양입니다.”
“영어? 어, 영어는 대충은 할 줄 아니까.”
어학연수를 따로 간 적은 없었지만,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사는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근처의 공장이나 아니면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하러도 오는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영어를 좀 배운 것이다.
처음에는 시골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들을 경계하고 미덥지 않게 보기도 했지만, 오며 가며 인사도 하면서 친해진 것이다. 그래서 정통 영어는 아니지만 필리핀 스타일의 영어 회화는 좀 할 줄 알게 되었다.
“와, 하긴 워렌 버핏과 대화도 하고 그러시려면 영어는 기본이겠죠. 그런 거 보면 역시 최진수 선배님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전, 이번 겨울에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갈 생각인데, 왠지 그런 제가 선배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입니다.”
“하하, 뭐, 지금이라도 배우면 되지. 영어가 어려운 말도 아니고.”
그래도 영어는 어렸을 때, 필리핀 사람들하고 놀면서 배운 거라 쉽게 배웠는데 일본어나 한자는 벌써 머리가 굳은 건지, 책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무슨 다른 방법이 없으려나?
“그런데 최진수 선배님, 지난번 약속 잊으신 건 아니시죠?”
“약속?”
내가 민영민에게 무슨 약속을 했었나?
“람보르기니 말입니다.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SVJ 로드스터 한정판 말이죠.”
“아, 맞아, 내가 한 번 구경시켜준다고 했었지.”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는 한 것 같았다. 그때는 귀찮아서 그냥 나중에라고 한 것이었는데, 그동안 꽤 시간이 지나서 더 미루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 트리피오 아파트로 와 한 번 구경도 시켜주고...”
“드라이브도 같이 하는 건가요?”
“뭐, 그..그래...”
***
트리피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어때? 근사하지?”
“와, 기가 막힌데요. 일단 사진 촬영부터 하겠습니다.”
민영민은 가까이에서 보는 신형 람보르기니에 감탄을 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도산 파파라치 경력이 꽤 된다는 민영민은 그쪽 세계에서는 꽤 알려진 인물이라고 했다.
“파파라치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거야?”
“그렇죠. 온라인 쪽에서는 인지도가 있죠.”
자본주의 시대, 한쪽에서는 이런 고급차들을 돈을 주고 사서 남들에게 과시하는 부류들도 있고 그 반대편에는 이런 차를 갖고는 싶지만 단지 카메라에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부류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욕망과 선망이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도산대로였던 것이다.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가진 슈퍼카 오너들은 강남 한복판의 멋진 대로에서 슈퍼카들 타고 다니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고,
그런 슈퍼카들과 그들의 오너들의 화려한 삶을 선망하는 도산 파파라치들은 그곳에서 카메라에 슈퍼카와 슈퍼카 오너들을 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그렇게 상호보완적인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근접해서 슈퍼카들을 촬영하려다가 차주와 시비가 붙는 경우도 많고, 특히 슈퍼카 오너들의 옆 좌석에 앉은 여자들의 사진을 찍는 걸로 문제가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자들 사진?”
“예, 주로 조수석에는 젊고 예쁜 미모의 여자들이 타고 다니거든요.”
하긴, 슈퍼카를 몰고 다닐 정도라면 어느 정도 돈도 있고 나이도 젊은 편일 테고, 그런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소위 말하는 강남의 금수저 집안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까, 그런 스펙 좋은 남자라면 여자들에게도 당연히 인기가 있을 테고 말이다.
“일반인들도 있지만, 간혹 여자 연예인들이 타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카메라를 뺏기는 경우도 있어요.”
“저런, 나쁜 놈들이네.”
경찰에 신고하기도 애매하고 어쨌든 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차들 사진을 찍는 일을 하고 싶은 거야?”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뭐가 그렇게 좋은데?”
“예쁜 여자들 사진을 찍거나 귀여운 애완동물을 찍는 것과 같은 거죠. 아름답고 매력이 있잖아요? 이런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들 말이에요. 물론, 이런 차들 타고 다니는 녀석들 중에는 싸가지 없는 녀석들도 많지만, 사실, 이런 차 주인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죠.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멋진 차 그 자체일 뿐이니까요.”
민영민은 어쩐지 평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아무튼, 이걸 타고 드라이브를 가보자고, 도산대로로 가면 되지?”
“거기가 가장 좋죠. 가깝고.”
남자를 내 차에 태우고 이렇게 드라이브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뭐, 섹시한 여자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민영민을 태우고 도산대로를 달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형 아벤타도르의 힘인지 여기저기서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진수의 차를 쳐다보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야, 손은 왜 흔드는 거야?”
갑자기 조수석에서 민영민이 인도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꺄르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왠지 창피해지네..
“좋잖아요. 이런 차 타고 다니면, 자연스럽게 대중의 시선을 받게 마련이죠. 무슨 스타가 된 기분 아닙니까? 저기 보세요. 제가 손 흔드니까 같이 흔들어 주잖아요. 국산차 타고 이랬어 봐? 누가 손을 흔들어 줘요. 람보르기니니까 호응해 주는 거죠.”
“야, 그래도 창피하니까, 그만해.”
“선배님도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그만하라는 나의 말에도 민영민은 창밖으로 고개까지 내밀며 관종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런 민영민이 신기한지 쳐다보고 사진도 찍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특히 중학교 교복을 입은 녀석들이 갑자기 나의 람보르기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야, 민영민 그만해.”
“아, 예.”
람보르기니는 몰려드는 인파를 뒤로 한 채, 다시 도산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선배님 화나신 거 아니죠?”
“화난 건 아닌데, 너 왜 그러냐? 응? 사람들의 관심 받는 게 그렇게 좋아?”
“하하, 죄송합니다. 평소에 슈퍼카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찍기만 하다가 제가 슈퍼카에 타게 되니까, 저도 모르게 흥분을 했네요. 아무튼, 기분이 아주 짜릿한데요.”
“아무튼, 이걸로 약속은 지킨 거다.”
***
신사동 영진 빌딩 펜트하우스
민영민과 드라이브를 하고 왔더니 왠지 어깨가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며칠 전부터 고민거리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찾은 황금백합 작전의 기밀문서 해독도 골칫거리고 또 하나는 제주도의 모슬포 별장에 있는 금괴들도 걱정이었다. 지금 당장은 제주도에 창고의 금고에서 보관은 하고 있는데,
일단 아무도 없는 제주도의 별장 창고에 시가 1400억 원어치의 금괴를 놔두고 온 것도 불안하고 말이다.
하지만 제주도를 오고 갈 때 비행기에 금괴를 숨겨서 서울로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닥이 좁은 제주도에서 그 정도 금괴를 금은방에서 처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어깨도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에 아래층의 마사지샵을 찾았다.
아로마 향이 입구에서부터 뭔가 기분을 진정시켜 주는 느낌이었다.
“어머, 최진수 사장님, 한동안 안 보이시더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이곳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윤선아 관리사와는 이미 꽤 친해져 있었다. 한동안 매일 들락거리다가 안 왔더니, 진수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말이다.
“제주도에 일이 있어서요. 주말에 제주도 가다 보니까 시간이 없어서 자주 못 왔죠.”
제주도라는 말에 윤선아는 호기심을 보였다.
“제주도에는 무슨 일로요?”
“뭐, 땅도 좀 사고, 별장도 하나 사고 제주도에 계신 이모님도 만나고, 여러 가지죠 뭐.”
“땅요? 별장도 있으세요?”
윤선아도 나의 정체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직 대학교 2학년의 복학생이라는 것과 내가 새로 산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타고 다니는 것도 알고 있어서 나를 재벌 3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제주도에 땅을 사고 별장도 샀다는 말에 약간 놀라며 감탄하는 느낌이었다.
“부럽다. 진짜 최 사장님은 돈이 많으신가 봐요? 그 나이에 람보르기니도 타고 다니시고, 제주도에 별장도 있고요.”
“하하, 그런가요? 뭐, 운이 좀 좋은 편이죠. 하고 있는 사업이 꾸준히 돈을 벌어주고 있거든요.”
사업이라기에는 애매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행운의 과자가 나에게 막대한 자산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강남의 건물주도 되고,
부드럽고 달콤한 손길로 스웨디시 마사지를 즐길 여유도 있고 말이다. 민영민과 드라이브로 받은 스트레스가 조금씩 윤선아의 부드러운 마사지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진짜 부럽다. 소문처럼 재벌 3세나 그런 건가요?”
“재벌 3세요? 뭐, 아버지에게 좋은 걸 많이 물려받기는 했죠.”
건강한 신체와 남자다운 외모를 물려받았으면 된 거지? 안 그래?
“어머, 역시..그러면 재산이 얼마나 되는 거예요? 람보르기니도 있으신 것 같고, 혹시 요트도 가지고 계세요?”
미끌거리는 오일을 바른 나의 등 위로 윤선아의 팔꿈치가 적당한 압력으로 등을 쓸어 내리듯 눌러주고 있었다. 귓가에는 어딘지 달콤한 윤선아의 목소리로 요트라는 단어가 들려오고 말이다.
“요트?”
“예, 부자들은 그런 요트 같은 것도 있지 않아요? 개인 요트 말이에요. 외국 영화 같은데 보면 그런 요트 타고 다니면서 파티도 하고 항해도 하고 그러잖아요?”
물론, 나에게 그런 요트 같은 것은 없지만 요트가 있다면 제주도에서 가까운 부산 정도는 항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 소유의 요트라면 따로 공항처럼 검색을 거쳐야 하지도 않을 것 같고 말이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예, 뭐가요? 최 사장님.”
“요트 말이에요. 나도 멋진 요트를 하나 사야 할 것 같아요.”
“정말요? 진짜 요트를 사시게요?”
물론 진짜로 요트를 살 생각이었다. 지금 제주도에 있는 1400억의 금괴를 어떻게든 서울로 옮겨와야 했다. 그리고 이 대량의 금괴를 당국에 신고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어쨌든 이게 관동군의 금괴든 뭐든 일단 내가 찾은 이상, 이제는 내 소유의 황금이었고,
그걸 처분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울로 이동을 시켜야 했다.
“예, 그것도 꽤 큰 요트를 사야겠어요.”
“정말이죠? 그럼 나중에 한 번 꼭 태워주세요.”
“좋아요. 약속하죠.”
***
영진 빌딩 7층 펜트하우스
간만에 윤선아에게 마사지를 받았더니 몸이 쫙 풀리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윤선아에게서 좋은 아이디어도 얻고 말이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제주도에도 중문 같은 곳에 요트 마리나가 있었고, 제주도에서 가장 가까운 부산의 해운대에도 요트 마리나가 있었다.
그리고 요트를 이용해서 두 곳을 항해하는 것도 가능하고 말이다. 요트와 요트 면허만 있으면 부산과 제주도를 얼마든지 항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비행기나 다른 화물선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은밀하게 금괴를 이동시키기에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법 큰 요트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지만 안전하게 항해를 하고 금괴도 옮기고 하려면 작은 요트들은 좀 무리일 것 같고..어디 괜찮은 대형 요트가 없으려나?
물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까 요트 회사들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어디가 믿을 만한 곳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요트 자체가 그다지 대중화되지도 않아서 정보를 찾기도 쉽지 않고 말이다.
역시, 행운의 과자를 하나 먹어볼까? 경험도 없고 지식도 부족할 때는 행운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행운의 과자 병뚜껑을 열고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과자를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윤선아에게 마사지를 받고 난 직후라 그런지 몸이 나른하고 과자도 뭔가 더 달콤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달콤함이 가실 때쯤 입안에서 이물감과 함께 작은 쪽지가 나왔다.
스마트폰으로 확대해 보니, 적혀 있는 것은...
01023548245
이런 숫자였다. 역시 전화번호인가?
일단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베니티 코리아 이성수입니다.”
“베니티 코리아요? 요트 관련된 회사인가요?”
“예, 이태리 명품 요트, 베니티 요트를 수입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요트 관련한 상담이 필요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