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항해
제주도 중문 마리나
중문 마리나로 한 척의 근사한 요트가 들어오고 있었다. 한국에는 흔치 않은 고급 슈퍼 요트에 사람들의 시선이 배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누구지? 저런 요트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마리나 주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대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배에서 내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주도까지 항해를 하며 VIP 룸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던 나는 기지개를 켜고 막 갑판쪽으로 나오는 중이이었다.
“와, 저 사람이 이 요트 주인인가 봐?”
“설마? 그냥 직원 아냐?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여대생은 3명이었는데 모두 귀엽게 생긴 친구들이었다. 나의 요트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걸었다.
“여행 오셨나 봐요? 대학생들인가요?”
“아, 예. 그 요트에서 일하세요?”
“일요? 뭐, 일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하려고 산 요트죠.”
“어머, 그 요트 주인이세요?”
여대생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럼요? 시간 있으면 구경 좀 하시겠어요?”
배를 타고 제주도에 오는 건 이번이 3번째였다.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고 두 번째는 약간 들떠 있었던 나의 요트 항해도 세 번째가 되자, 좀 차분하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처음 해운대에서 제주도 중문 마리나로 항해를 할 때만 해도 바다를 구경하고 선장과 이야기를 하느라 금새 시간이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선실의 살롱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아예 침실에서 잠을 자면서 왔으니 말이다. 아무튼, 부산에서 제주까지 오는데 12시간쯤 걸리니까 기왕 잠이 오기 시작한 거 침실에 들어가 한숨 푹자고 났더니 몸도 개운하고 머리도 맑아진 기분이었다.
나의 초대에 자기들끼리 뭔가 의논을 하던 3명의 여대생들은 결정을 내렸는지, 요트 위로 올라왔다.
“와, 요트가 정말 멋있어요?”
“괜찮은 편이죠?”
“그런데 뭐 하시는 분이세요? 그리고 어디에서 오시는 거예요?”
“하하, 뭐, 그냥,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해운대에서 출발했죠.”
“요트는 취미 생활이신가 봐요?”
“취미요? 뭐, 여러 용도로 쓰고 있습니다. 취미도 포함이 되기는 하죠.”
요트를 타고 제주도를 오고 가는 일은 사실 즐겁고 럭셔리한 취미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중문 마리나에서 모슬포항 근처에 있는 진수의 별장까지는 20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차로 30분이면 충분했다.
“저는 모슬포에 다녀와야 하는데, 여기서 구경 좀 계속 하시죠.”
“정말요? 그래도 돼요?”
“예, 물론이죠. 선장님, 이 숙녀분들에게 배를 좀 구경시켜 주세요. 전, 일좀 보고 오겠습니다.”
“하하, 그러시죠. 사장님, 또 모슬포에 가시는 건가요?”
“예, 가져올 게 있어서요.”
중문 마리나에 주차장에는 캐딜락 에스컬레이드가 대기 중이었다. 1억 6천 정도 하는 SUV인데 미국 차라 큼지막하고 짐도 많이 실을 수 있어서 산 차였다. 그리고 제주도는 주차 공간도 넓은 편이라 서울 기준으로는 너무 커서 불편할 이런 차도 운행하기 어렵지 않고 말이다.
에스컬레이드를 몰고 향한 곳은 모슬포에 있는 별장, 금고에서 남은 금괴를 모두 꺼내서 미리 준비한 화물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상자에 넣기 전에 미리 자루에 한 번 담아, 혹시라도 안쪽이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약간 귀찮은 작업이지만, 이렇게 오늘 하루에 가져가는 금괴의 가치는 500억 정도다. 하루 고생하는 것 치고는 괘찮은 수입, 아니 어마무시한 수입이었다. 그래서인지, 금괴를 차로 싣는 일도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다. 일당, 500억짜리 알바인 셈이니까 말이다.
남은 금괴들을 꼼꼼히 다 담고 나자, 미리 예약해둔 트럭과 인부들을 불렀다. 이걸로 제주도 알뜨르의 격납고 터에서 발견한 제주도 금괴는 모두 서울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어이구, 이거 뭔데 매번 이렇게 무겁죠? 돌덩이라도 들어있나요?”
“개인적인 물건들입니다. 자동차 부품 같은 것도 있고요. 쇠로 된 것들이 많아서 그럴 겁니다.”
물건을 나르러 온 인부들은 혹시, 제주도의 돌하르방을 몰래 유출하는 건가?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수가 임금을 넉넉하게 지불했기 때문에 진수에게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트럭에 실은 짐들은 다시 중문 마리나로 이동해서 진수의 베네티 요트에 실렸다. 요트에는 화물 적재 공간도 충분했기 때문에 금괴 상자를 나르는데는 큰 무리는 없었다.
진수가 금괴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여대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선장에게 물어보니, 요트를 실컷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최진수 사장님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선장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도 잘 모른다고 했죠. 하지만 돈은 엄청 많은 남자니까, 기다렸다가 한번 만나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웃으면서 재벌은 너무 부담스럽다고 가버리더군요.”
“그래요? 그건, 그렇고, 이제 다시 부산으로 돌아갈 시간이군요.”
“이번에도 상자들이 많네요?”
“예, 이게 마지막입니다. 제주도에서 가져올 짐들은 저걸로 끝이죠.”
“아쉽네요. 제주도에 오는 것도 재밌었는데.”
“하하, 뭐, 앞으로도 항해할 일은 많으니까요. 일단은 해운대로 돌아가시죠.”
***
서울 신사역, 아이케이 빌딩
아이케이 지하 3층의 창고에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해운대를 거쳐 서울로 옮겨온 금괴들은 진수가 제주도에 가기 전에 매입한 아이케이 빌딩의 지하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번에 세 번째로 가져온 것으로 제주도의 마지막 황금까지 창고로 이동한 것이었다.
상자를 옮기던 인부들이 모두 나가자, 진수는 홀로 창고에 남아서 상자들을 확인해 보았다. 시가 1400억, 개수로 2천 개의 이상의 금괴들이었다. 무게만 2톤이 넘는 엄청난 황금괴들이었다.
지하 창고에서 금괴들의 상자들을 확인하고 있으니,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리바바라도 된 기분이었다.
일단, 금괴를 처분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한 것은 아니었다. 진수는 다시 상자들을 잘 정리해 놓고 창고 문을 잠그고 지상으로 나왔다.
지하 창고에서 나오자, 환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지하 공간도 그렇게 어두운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햇살이 비치는 야외와는 다른 느낌, 그리고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상 15층의 압도적인 빌딩 건물이었다.
720억에 매입한 아이케이 빌딩은 이제 진수의 소유였다. 빌딩은 산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전에 샀던 영진 빌딩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건물의 임차인들도 주로 벤처 기업 사무실이나 피부과나 치과 병원 같은 것들이 입주해 있었다. 뭔가 영진 빌딩과는 품격이 다르다고나 할까?
그리고 15층의 오피스 사무실은 아직 공실이었는데, 당분간은 진수가 사무실로 쓰기로 했다.
뭐, 아직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침, 15층은 이전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해놓아서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고층 건물의 펜트하우스에서 내려다보는 강남대로와 멀리 한남대교까지 이어지는 시티뷰도 아주 멋진 느낌이었다.
일단은 건물의 관리 업무를 하기 위해서 직원 한 명을 뽑아서 사무실도 운영하기로 했다. 그리고 천천히 다른 일도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
아이케이 빌딩, 15층 진수의 사무실.
“사장님 여기 결제 서류입니다.”
“어, 임대 계약 건이군. 뭐, 그래요. 큰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요.”
사무실이라고 해도 건물 관리 정도의 업무라서 그다지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진수도 일이라기보다는 설렁설렁 빌딩도 둘러볼 겸, 한 번 오는 정도..
“사장님, 커피 드릴까요?”
“커피? 음, 쿨피스는 없나? 달달한 게 좀 땡기는데..”
“쿨피스요? 그럼 지금 내려가서 사오겠습니다.”
이희정은 새로 뽑은 경리 직원이었다. 나이는 25세, 진수보다는 약간 연상이지만 부하직원이라 그런지 어딘지 어리고 앳된 느낌도 드는 여직원이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베이글녀 스타일로 동안의 얼굴과 달리 상당히 성숙한 느낌도 있었다.
“아냐, 뭐. 됐어요. 마침 편의점 가려던 참이었는데, 내가 가지 뭐. 다른 건 필요한 건 없나요? A4용지 같은 거 모자라지 않아요?”
“A4용지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미리 준비를 못 했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오다가 사오죠 뭐.”
작은 사무실이라 사장이라는 것도 큰 의미는 없는 곳이었다. 그냥 진수와 이희정 둘이 빌딩 관리에 필요한 간단한 사무를 보는 정도였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편의점에서 쿨피스와 A4용지 그리고 이희정이 좋아할 것 같은 바나나 우유 같은 것들을 사가지고 빌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빌딩 로비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누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최진수 선배님 아니세요?”
설마?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민영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에 민영민과 같이 만난 적이 있던 학교 후배였다. 키가 큰 남학생과 귀여운 여학생 커플, 둘이 사귀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같이 자주 다니는 박성준과 유하나였다.
“어, 유하나하고 박성준이죠?”
“하하, 기억하시네요. 여기서 최진수 선배님을 또 뵙게 될 줄이야. 그나저나 여기에는 무슨 일이시죠? 설마, 이 빌딩도 최진수 선배님이 건물주인 건 아니시죠?”
“에이 설마? 최진수 선배님이 아무리 재벌3세라고 해도 강남 건물들이 다 최진수 선배님 거겠어? 그런데 A4용지는 뭐하시려고 그렇게 많이 사셨어요. 박스로 들고 계시네요?”
유하나가 진수가 들고 있는 편의점 봉투와 A4용지 상자를 번갈아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 뭐, 좀 누가 좀 사다달라고 해서. 그나저나 두 사람은 여기 무슨 일이야?”
“피부과에 좀 왔어요. 여기, 박동진 피부과 원장님이 성준이 삼촌이래요. 굉장하죠?”
“어, 그래?”
“그래서, 좀 싸게 피부관리를 해준다길래, 따라와봤어요.”
“하하, 삼촌이 지인들은 특별할인을 해주거든요. 최진수 선배님도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조카니까, 부탁드리면 잘 해주실 거예요.”
“남자가 무슨 피부 관리를..괜찮아. 음, 피부과면 7층인가?”
“아, 예, 어, 저기 삼촌 오신다. 삼촌...”
“성준이구나, 최진수 사장님도 같이 계시네.”
그러고보니, 7층에 피부과 원장과도 안면이 있었다. 40대 후반으로 나보다 한참 위인데 나한테 사장님이라며 항상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삼촌, 아는 분이세요?”
“그럼, 여기 건물주 사장님이시잖아.”
“거..건물주요? 이 빌딩도 최진수 선배님의?”
“하하, 최근에 좀 여유 자금이 생겨서..하하..마침, 좋은 가격에 좋은 빌딩 매물이 나와서 하나 사게 되었지.”
“어머, 그런데 그 A4용지는 어디로 가져가시는 거예요?”
“어, 이거? 15층에 사무실이 있거든, 마침 복사용지가 떨어져서 사 오는 길이야.”
“선배님, 무거우실 텐데, 그 상자 제가 들겠습니다. 15층이라고요? 삼촌, 나중에 봬요. 저기 전 선배님 사무실에 좀 들렀다가 갈게요.”
“그래, 나중에 천천히 와. 먼저 올라가시죠. 사장님.”
***
“와, 이 큰 사무실을 혼자 쓰시는 거예요?”
유하나와 박성준은 A4용지 박스를 들어준다는 핑계로 기어이 15층의 내 사무실까지 따라올라왔다. 그리고 거의 텅 비다시피한 넒은 사무실을 둘러 보며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뭐, 아직은 직원도 한 명 뿐이고. 그냥, 건물 관리 사무실이야.”
“어머, 사장님, 누구세요 이분들은?”
“어, 희진 씨, 여기는 학교 후배들, 내가 학교 다니는 건 알지?”
“그럼요. 알고 있죠. 후배분들은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건 됐고. 희진 씨, 여기 복사용지.”
“죄송합니다. 사장님, 다음부터는 제가 미리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이희진은 복사용지를 받아들고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와, 여기가, 말하자면 사장실 그런 거죠?”
박성준은 진수의 사무실을 신기한 듯 여기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특히 진수의 사무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강남대로의 모습에 할말을 읽은 듯했다.
“선배님, 여기에 딱 서 있으면 뭔가 성공한 남자라는 느낌이 확 들겠네요. 거기에 저런 섹시한 여비서까지..”
“뭐, 그런가?”
하긴, 나도 굳이 쓸 데도 없이 이런 사무실을 만든 이유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특히 밤의 야경이 멋진 느낌이었다. 물론 낮에도 강남대로를 달리는 차들과 주변 풍경을 보고 있으면 뭔가 대한민국의 중심에 딱 자리를 잡고 있는 느낌,
뭔가 엄청 성공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전망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박성준과 유하나가 돌아가고 진수는 홀로 남아 해가 지기 시작하는 도심의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설마 보이스 피싱?
“여보세요? 누구시죠?”
“최진수 사장님이시죠? 김혜진이라고 합니다. 황금 출판사 김덕수 사장님 딸이에요.”
“김덕수 사장님 따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