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남자
“김덕수 사장님 따님이라고요? 그런데 저에게는 무슨 일로?”
“저희 아버지 출판사를 찾아오셨다면서요? 당구장 주인아저씨에게 들었어요.”
당구장 주인에게 혹시, 김덕수 사장의 행방을 알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전하번호를 남기기는 했었다, 그런데 그걸 김혜진이라는 김덕수 사장의 딸에게 준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왜 찾으시는 거죠?”
뭐라고 하지? 사실대로 황금백합 문서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고,
“김덕수 사장님에게 진 빚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빚요?”
그래, 갚을 돈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 돈 때문에라도 만나게 해주겠지?”
“예, 김덕수 사장님에게 드려야 할 돈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을 직접 만나서 확인할 문제도 있고요.”
“그럼, 아버지가 빚을 진 게 아니라, 받을 채무가 있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제가 돈을 드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나저나 김덕수 사장님은 어디에 계신 거죠?”
김혜진이라는 여자는 받을 돈이 있다는 말에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액수가 얼마나 되는데요?”
역시 돈을 탐을 내는 것인가? 하긴,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킬 사람들이라면 그럴만도 하지. 그럼 얼마를 부를까? 10억 정도...너무 많은가? 1억으로 하자.
“1억 정도를 제가 드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1억요?”
“예, 김덕수 사장님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걸로 아는데, 만나게 해주시면 가족들에게 그 돈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황금백합 문서의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아마도, 어딘가에 막대한 보물들이 있을 테고 이 황금백합 문서는 그 보물들을 찾은 열쇠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1억 정도의 돈은 정말 푼돈에 불과하다. 하나도 아까울 것이 없는 돈이라는 말이다.
“정말, 1억을 주신다는 거죠? 저에게 말이에요”
“아버님의 상황을 봐야겠지만, 치료 중이라 병원을 나오실 수 없다면 가족에게라도 돈을 드리겠습니다. 아버님은 어디 계신가요?”
***
경북, 문경, 정신과 요양병원
문경의 외진 곳에 자리 잡은 병원 입구에는 알콜 전문 클리닉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님이 알콜 중독이나 그런 문제가 있으셨던 건가요?”
진수는 포르쉐 파나메라의 옆자리에 타고 있는 김혜진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서울에서 만나 이곳까지 같이 오는 중이었는데, 김혜진은 예상과는 달리, 상당히 미모의 여성이었다.
당구장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 속의 이미지는 상당히 사납고 악독한 여자의 이미지였는데, 실제로는 꽤 세련된 느낌의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어딘지 고상해 보이기도 하고 우아한 느낌의 얼굴이라, 탤런트나 영화배우 같은 느낌도 있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아버지를 받아주는 곳이 많지 않아서 이곳으로 선택한 거죠. 아버지를 강제로 입원시켜야 했는데, 주로 그렇게 강제로 입원하는 곳은 알콜 클리닉들이 많아요.”
“하긴, 그렇기는 하겠네요. 그런데 김덕수 사장님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었길래, 병원에 강제로 입원을 시키신 겁니까?”
“최진수 씨도 대충은 아시는 것 같던데, 저희 아버지는 한평생, 보물을 찾아다니시던 분이에요. 도박이나 알콜 중독과 다를 바가 없죠. 차이라면, 남들이 보기에는 멀쩡하고 또 진짜 뭔가 사업을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는 거에요.”
김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김덕수 사장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원래, 김덕수는 평범한 공무원이라고 했다. 서울 시청에서 일하면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를 만나서 김혜진을 낳고 나름 평범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이신가요?”
“예, 지금은 교장 선생님이시죠. 최진수 씨는 저랑 어머니를 이상한 괴물처럼 생각하시죠?”
어떻게 알았지?
“뭐,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는 게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저나 엄마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말한 것처럼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고요. 저도, 연극배우로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사람도 아니라는 거죠.”
“연극배우시군요? 어쩐지 좀 아우라가 있으시다 싶더니..하하..”
뭔가 몸매도 늘씬하고 얼굴도 세련된 느낌이 있다고 했는데, 연기를 하는 배우인 모양이었다. 그다지 유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딘지 상큼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있었서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우라요? 무명 배우일 뿐이죠. 아무튼, 평범한 시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책을 좋아하는 분이셨어요. 약간 활자 중독이라고나 할까요?”
“활자 중독요?”
“뭐든 닥치는대로 읽는 걸 좋아하셨죠. 덕분에 상식이 풍부하고 주변에서 똑똑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으시는 분이었어요. 일본어나 중국어, 스페인어까지 외국어에도 능통하셨고요.”
“음, 언뜻 들어서는 정신병원에 가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차를 병원 주자장에 세워놓고, 안으로 들어가서 일단 면회 신청부터 했다. 그리고 병원 로비에서 잠시 김덕수 사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긴 건, 우연히 황금백합 작전에 대한 문서를 발견한 후였어요.”
“황금백합 작전요? 그거라면 일본군의 황금에 관한 내용이죠? 태평양 전쟁 때 말입니다.”
“맞아요. 지인의 지인인, 일본 쪽의 교포분에게 우연히 받은 문서였는데, 거기에 엄청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연구하기 시작하신 거예요.”
“음, 그렇군요.”
“처음에는 저도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가 굉장히 재밌는 취미생활을 하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저도 어릴 때였는데, 아버지는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도 가지고 계셨고, 워낙에 책을 읽거나 하는 걸 좋아하시고 오래된 역사에도 관심이 많은 분이라, 오히려 그런 아버지가 멋있다고도 생각했으니까요.”
“진짜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말이죠?”
김혜진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딘지 약간 씁쓸해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맞아요. 어렸을 때니까, 진짜 아버지가 엄청난 보물을 찾아서, 나도 공주처럼 멋지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아버지는 그 황금백합 작전에 점점 더 심취하셨어요. 마치, 알콜 중독자가 술을 마시는 것처럼요. 그리고 점점 그것에 중독이 되셨죠.”
김혜진은 김덕수의 상태를 중독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마치 알콜에 중독되어서, 술에 취해 일상의 파괴를 반복하고 있는 알코 중독증 환자처럼 말이다. 김덕수는 우연히 얻게 된 황금백합 작전에 관한 문서에 빠져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호기심과 지적인 유희에 불과했지만 점점 더 일본군의 황금에 대한 집착은 커져 버린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공무원 생활도 그만두시고, 야마시타의 황금을 찾는다며 필리핀에서 몇 년을 보내고 오시기도 하셨죠.”
“그래서 뭐라도 찾으신 건가요?”
“아뇨, 그랬으면, 어머니와 제가 이렇게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겠어요? 진짜,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결국, 황금 비슷한 것도 찾지 못하시고 일본의 오래된 고문서를 수집하는 데 재산을 탕진하셨어요. 이미, 아버지의 퇴직금이나 집안의 남은 재산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사채빚까지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더 채무를 지지 못 하게 병원에 입원을 시킨 거군요?”
김혜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진수 씨가 아버지에게 갚아야 할 1억의 빚이 있다는 건가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포르쉐를 몰고 다니시는 걸 보면, 돈도 많으신 것 같은데.”
“하하, 그 1억은 김덕수 사장님에게 어떤 문서의 해독 대가로 지불 할 돈이죠.”
“예?”
“아무튼, 아버님을 면회하게 해주시면 김덕수 사장님과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돈은 혜진 씨에게 드리기로 하죠.”
“좋을대로 하세요, 솔직히 전, 연극배우라 수입이 거의 없어요. 1억이면 나한테는 큰 돈이니까.”
잠시 로비에서 기다리자, 간호사가 나와서 면회실로 안내했다.
***
면회실.
“혜진이구나, 옆에 그 남자는 누구냐? 설마 너 결혼하니?”
“아니에요. 아빠, 그래도 잘 계시네요. 얼굴이 좋아 보여요.”
김덕수는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였지만 얼굴 표정이나 말투는 온화해 보였다. 자기를 강제로 입원시킨 딸에게도 그다지 신경질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최진수라고 합니다.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누구시지? 혜진이 친구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 혜진 씨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김혜진이 나가자, 김덕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은 황금백합 작전에 대해서...”
“그거라면, 이제 난 관심 없어요. 나도 병원에 입원해 보니까, 내가 이상했다는 걸 알겠더라고.”
“예?”
김덕수 사장은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일과 병원에서 받은 치료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약을 드시나요?”
“예, 약을 먹으니까 잠도 잘 오고, 그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망상들도 사라지는 기분이고. 이제 제 정신이 드는 거지. 나도 처음에는 멀쩡한 나를 왜 정신병원에 잡아 왔나? 화가 나고 그랬는데, 약을 먹고 정신이 드니까, 내가 미쳐있었다는 걸 알겠더라고.”
“황금백합 작전에 말입니까?”
“그래요. 젊은 양반도 잘아시는구만, 혹시 최진수 씨도 그런 황금 사냥꾼인가? 내가 쓴 책을 보고 나를 찾아왔다면, 나의 대답은 이거요.”
“어떤 거 말입니까?”
“야마시타 골드를 찾는 일은 시간 낭비라는 거지. 물론, 어딘가에 있기는 하겠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고 현실적으로 도저히 찾을 방법은 없다고 봐요.”
“정말요? 야마시타 골드를 찾는 일은 불가능한 건가요?”
“우연히 땅속에서 발견되면 몰라도, 인위적으로 찾을 방법은 없어요. 필리핀 어딘가에 있기야 있을 것 같지만. 원래 남들이 못 찾게 땅속에 숨겨둔 보물들을 어떻게 찾겠어? 필리핀의 땅들을 다 파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럼, 김덕수 사장님은 이제 야마시타 골드를 추격하는 일은 포기하신 겁니까?”
“하하, 내 꼴을 보슈. 얼굴은 다 늙고, 머리도 백발이 되었지, 나의 청춘을 바쳤지만, 가족들에게도 못난 가장이 되었고, 이제는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도 없어. 나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황금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났지만, 결국, 가족들을 불행하게 한 건 내가 그 먼 길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지.”
김덕수 사장은 뭔가 인생의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건지, 아니면 자포자기를 한 건지, 어딘가 초연한 표정이었다.
뭐지? 내가 잘못 찾아온 건가? 비록 정신병원에 있어도 황금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이번에는 행운과자의 행운도 실패하는 건가?
하지만, 아직까지 행운과자의 행운이 실패한 적은 없었다. 그래,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까, 제주도 알뜨르에서 찾은 황금백합 문서를 보여주자고...
“저기 선생님, 이거 한 번 보시겠습니까?”
서류 봉투에 들고 온 빛바랜 황금백합 문서를 천천히 꺼내서 면회실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긴노 유리? 이걸 왜? 또 어디서 이런 걸 구한 거야?”
김덕수 사장은 황금백합 문서를 보고도 그다지 호기심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무심하게 문서를 천천히 넘겨보고 있었다.
“제가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일본군의 기밀문서입니다. 해독을 해보려고 했는데, 일본어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혼자서는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제목이 황금백합이라는 건 겨우 알아냈지만 그러다가, 김덕수 사장님의 저서를 보고 찾아온 겁니다. 혹시 이 문서의 내용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뭐, 별건 아닌 건 같은데, 제목은 긴노 유리, 황금백합이지만, 내용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니 잠깐, 이게 뭐지? 당신 아까 이걸 뭘 하려고 했다고 했지?”
“제가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제가 해독해 보려고는 했지만...”
“그래 해독, 해독 말이야. 이건 암호문이야.”
“예? 정말요?”
“그래, 틀림없어. 이건, 일본 전시 비상 암호로 되어 있는 암호문이라고, 맨 뒤에 있는 숫자가 의미하는 게 비상용 암호를 의미하는 거야.”
“그럼, 이걸 해독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문자표와 난수표가 있어야 해.”
“문자표와 난수표요?”
뭐야? 뭐가 이렇게 복잡해? 뭐가 또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그거라면 내가 평생을 연구하던 거니까.”
무기력해 보이던 남자의 눈빛은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약간의 광기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