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와 경도
“문자표와 난수표가 뭘 말하는 겁니까?”
“암호 조립을 위한 문자표는 평문을 암호문으로 바꾸기 위해서 특정한 단어로 숫자로 치환하는 거야, 난수표는 그렇게 치환한 숫자들을 다시 감산하기 위한 숫자들을 말하는 거지.”
“감산요?”
“쉽게 말해서 문자표로 바꾼 숫자들을 난수표에 대입해서 빼기를 하는 거야, 마이너스는 무시하고 말이야. 그러면 다시 난수표에 대입해서 감산을 하면 같은 숫자가 나오거든.”
김덕수 사장은 뭔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덕수 사장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걸 해독하려면, 난수표랑, 문자표라는 게 또 필요하다는 거죠?”
“보통은 그렇지만, 이건 전시에 암호병들이 사용하는 전시 비상 암호야. 난수표와 문자표 없이도 쓸 수 있게, 특수 교육 받은 거지.”
“아니, 난수표가 있어야, 무슨 감산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뒤에 보이는 12자리의 숫자가 비밀 코드라는 거야, 이걸 조합 반복해서 난수표를 만드는 거라고, 이렇게..말이야..”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덕수 사장은 복잡한 숫자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어로 된 문자표 같은 것도 말이다.
“이게 다 뭡니까?”
“일본군의 전시 비상 암호 체계지. 전시에 일본군 암호병들에게 비밀리에 교육한 암호체계 말이야. 유사시에 문자표와 난수표 없이도 몇 가지 문장과 숫자의 패턴을 반복해서 난수표와 문자표를 만드는 방식이야.”
“아니, 그걸 김 사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이런 암호체계는 전쟁 당시에는 1급 비밀이었겠지만, 7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저 암호를 좋아하는 동호회 정도에서도 이런 정보는 쉽게 얻을 수가 있어.”
“그래요?”
“아무튼, 흥미롭군, 이 문서의 내용을 내가 만든 문자표와 난수표로 해독을 해보면 말이야.”
“뭐가 나오는데요?”
“좌표들이군.”
“좌표요?”
“그래, 위도와 경도 말이야. 도, 분, 초, 이런 단위까지 나오는 좌표들...이건, 한 두 개가 아니야 대체 몇 개인 거지?”
김덕수 사장은 황금백합 문서의 암호를 해독해서 일정한 숫자들을 노트에 쭉 적기 시작했다.
위도와 경도를 도, 분, 초 이런 식으로 표기한 숫자들이었다. 그것도 김덕수 사장을 말처럼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이건 확실히 어떤 위치를 표시하는 좌표들이야, 아마도 필리핀 어디쯤이겠지.”
“필리핀의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좌표들이군요?”
“그래, 맞아. 이게 진짜 일본군의 기밀문서라면, 이건 내가 평생을 찾던 바로 그거야.”
***
“아버지와 얘기는 잘 되신 거예요?”
면회실을 나오는 나를 김혜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김덕수 사장에게서 받은 수첩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예, 이야기는 잘 끝났습니다.”
“그럼, 약속한 돈은 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참, 생각해보니, 제가 갚아야 돈이 1억 아니네요.”
“예?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10억을 드리죠.”
“십..십억요?”
다행히, 김덕수 사장은 당분간은 병원을 나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해독한 암호문이 필리핀의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좌표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김덕수 사장은 병원을 탈출하거나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대신, 보물을 찾게 되면 자신의 딸과 아내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난, 이제 너무 늙었어. 보물을 찾아 모험을 하기에는 말이야. 나이가 들면 현명해지거든, 그래서 모험이라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하지만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좀 더 바보짓을 해도 상관없겠지. 대신, 나도 이 보물찾기에 한 몫을 했으니까, 만약에 굉장한 보물을 찾는다면 내 딸과 와이프에게 보물의 일부를 나누어 주면 좋겠네. 물론 자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좋습니다. 보물을 찾게 되면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약속하죠.”
아직, 보물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김덕수 사장의 딸에게 10억을 주기로 했다. 그 정도는 나에게는 큰 돈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
신사역, 아이케이 빌딩.
문경에서 돌아와서 금괴를 처분하기 위해 다시 아이케이 빌딩을 찾았다. 필리핀에 가기 전에 일단, 제주도에서 찾은 금괴들을 처분하려는 생각이었다. 필리핀에 진짜 야마시타의 황금이 있다면 그걸 발굴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기도 하고 말이다.
“최진수 선배님.”
아니, 이 목소리는 민영민? 뒤를 돌아보니 진짜 민영민이 서 있었다.
“영민이구나, 무슨 일이야?”
“와, 이 빌딩이 최진수 선배님 빌딩이라면서요?”
박성준과 유하나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민영민은 어깨에 카메라를 걸고 감탄한 듯 아이케이 빌딩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성준에게 들은 건가?”
“예, 정말, 굉장한데요. 15층에 가면 최진수 선배님 사무실도 있다면서요?”
아무래도 15층 사무실까지 기어이 따라올 모양이었다.
“구경하고 싶어?”
“물론이죠. 강남 한복판에 이런 어마무시한 빌딩이라니? 역시 최진수 선배님은 대단하십니다.”
일단 민영민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도 엄청 럭셔리한데요.”
“어어, 뭐, 엘리베이터가 다 그렇지 뭐.”
민영민은 아이케이 빌딩에 연신 감탄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건성으로 대답해주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필리핀에 있는 보물을 찾을 생각뿐이었다.
김덕수 사장이 해독해준 암호문은 보물이 매장된 위치를 나타낸 좌표였다.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그곳들은 필리핀의 작은 섬들이었다.
그렇게 표시된 좌표만 32개나 되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큰 섬인 루손섬 인근의 작은 무인도들로 추정이 되는 곳들이었다.
만약에 그것이 진짜 보물의 위치, 그러니까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황금의 위치라면 그걸 가져오기 위해서 필리핀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보물을 찾아서 다시 안전하게 한국으로 이송해야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쉬운 일은 아니다. 좌표들은 가지고 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 가본 적도 없는 필리핀의 섬들이고, 거기에서 혼자서 아마도 땅속 깊이 매장되어 있을 보물들을 현지인들의 눈을 피해서 찾아서 한국까지 옮겨야 하는 것이었다.
왠지 행운치고는 고생문이 훤히 열린 느낌이었다.
상상이 되었다. 남국의 어느 무인도에서 웃통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파고 있는 내 모습이...
“선배님 더우십니까? 갑자기 땀을 흘리시네요?”
“어, 아냐..그나저나 여기는 진짜 어쩐 일이야? 설마 내 빌딩 구경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맞습니다.”
“뭐?”
“성준이에게 이 빌딩 건물주가 최진수 선배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구경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자칭 도산 파파라치인 민영민은 자동차 사진을 찍는 것으로 온라인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카메라에 담는 대상이 슈퍼카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럭셔리한 모든 걸 찍고 있죠. 자동차든 명품이든 아니면 빌딩이든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왜 찍고 다니는 거야?”
“멋지잖아요?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들, 자본주의 시대의 서민들의 동경의 대상이죠. 가질 수는 없지만 마음 속 싶은 곳에서부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가질 수 없으니 사진으로나마 소유하고 싶은 거겠죠.”
민영민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세상과의 소통 창구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민영민은 이루고 싶은 욕망,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을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대리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도 이해가 가는 게 부자들의 일상이나 그들의 소유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으며 그들의 사생활을 소비하는 대중들이 있는 것처럼, 재벌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스토리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도착했다.
“여기인가요? 15층 전체를 혼자 쓰시는 겁니까?”
“뭐, 여직원 한 명이 있기는 한데, 둘이 쓰기에도 너무 넓기는 해.”
이런 넓은 오피스 공간이라면 임대를 해서 임대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거지만, 진수에게 현금은 충분하고 그 외에도 성원 소프트의 주식이나 아이케이 빌딩 지하에 보관 중인 1400억 어치의 금괴도 있어서인지, 그냥 15층은 나 혼자 개인 사무실로 쓰기로 했다. 당분간은 말이다.
“어머, 사장님 오늘도 손님이랑 같이 오셨네요? 학교 친구분이세요?”
사무실로 들어서자, 희진 씨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았다. 그런데, 옷차림이..
뭐지? 어떻게 된 거야? 옷이 왜 이렇게 타이트한 느낌이지? 평소에는 글래머이기는 하지만 약간 수수한 옷들을 입고 출근하는 이희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연예인들이 입을 것 같은 몸에 꽉 끼는 타이트한 미니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래서 베이비 페이스와 대비되는 이희진의 육감적인 몸매가 과감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나 혼자의 느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민영민도 멈칫하며 이희진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여기는 학교 후배, 민영민이에요. 여기는 경리 담당인 이희진 씨.”
“민영민입니다. 앞으로 해도 민영민 거꾸로 해도 민영민이죠.”
민영민이 넉살 좋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자, 이희진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오늘 좀 옷차림인 과감하네. 설마, 퇴근하고 데이트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에요. 데이트는 남자 친구도 없는 걸요. 그게 아니라 인터넷으로 옷을 샀더니, 약간 사이즈가 타이트한 것 같아요. 한 사이즈 더 큰 걸 샀어야 하는 건데.”
“상당히 잘 어울리십니다. 혹시,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사진요?”
“이 녀석 취미가 사진 찍는 거라, 부담스러우면 거절해요.”
“아니에요. 사진 찍는 거 저도 좋아하거든요. 주로 셀카를 찍는 정도지만, 대신 찍은 사진은 저도 보내주세요.”
“물론이죠. 그럼, 선배님, 사무실을 배경으로 몇 장 사진을 찍어도 되는 거죠?”
“그래, 맘대로 해.”
민영민은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희진 씨도 평소와는 달리 옷차림도 과감하고 거기에 무슨 모델처럼 멋지게 포즈까지 잡아주는 것이었다.
“와, 포징이 프로급인데요. 혹시 모델 하신 적 있으세요?”
“어머, 그래요? 티가 났나요? 사실 피팅 모델 알바를 좀 했거든요. 프로 모델은 아니고.”
“역시, 몸매도 좋으시고 카메라를 잘받는다 싶더니, 모델을 하셨던 분이군요.”
나도 몰랐던 사실이잖아? 희진 씨가 모델도 했었던 모양이네. 어쩐지, 면접을 볼 때도 뭔가 몸매가 남다르다 싶더니 말이다.
아무튼, 텅 빈 15층의 사무실을 배경으로 민영민은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야, 언제까지 사진을 찍을 거야? 그만하고 이쪽으로 들어와.”
민영민은 아쉬운 듯 촬영을 멈추고 사장실로 나를 따라 들어갔다.
“이곳은 최진수 선배님 개인 사무실이죠?”
“그래, 말하자면 사장실쯤 되는 곳이지.”
“사장실요? 혹시 기업도 경영하시나요?”
“뭐,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모르지 나중에 기업을 인수해서 진짜 기업을 경영하게 될지도.”
상상이 되었다. 멋진 빌딩, 이것보다 더 큰 빌딩에 진짜 내 기업의 사원들이 각 층의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가장 높은 층에는 내 개인 사무실, 사장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책상 명패에는 사장, 최진수라고 적혀 있고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비서실도 있어서, 여비서들이 내 사무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결제 서류며 외부 스케줄을 상의도 하고, 목이 마르면 시원하고 달달한 쿨피스도 가져다 주고 말이다.
“사장님, 쿨피스 가져 왔습니다.”
“어, 고마워. 희진 씨”
“영민이 너도 쿨피스 좀 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이곳의 뷰가 끝내주네요. 이쪽에 딱 서면 말이죠. 강남대로가 딱 보이면서, 뭔가 일할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곳이네요.”
“그렇지? 나도 경치가 맘에 들더라고, 그래서 내 사무실로 쓰는 거고.”
“여기도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죠?”
민영민이 내 사무실과 여기서 보이는 풍경들도 사진에 담고 싶다고 해서 맘대로 하라고 허락을 했다.
“참, 선배님,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
“선배님 요트 말입니다. 거기서 촬영을 할 수 없을까요? 화보 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언제 시간이 되시면 말이죠.”
“화보? 화보라니 무슨 말이야? 무슨 여자 아이돌도 아니고 무슨 화보를 찍는다는 거야?”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은 이번에 소희네 기획사에서 새로 키우는 여자 아이돌 그룹이 있는데, 얼굴도 알릴 겸, 화보랑 동영상 촬영을 좀 하려고 하거든요.”
“그래?”
“외국의 좀 괜찮은 곳에서 하면 좋겠지만, 예산도 부족하고 해서 대충 국내에서 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촬영은 제가 한번 해보기로 했거든요. 대신 장소 섭외도 제가 해야 하는데, 선배님 요트가 어떨까 해서요.”
화보 촬영이라? 요트에서 아이돌 화보를 찍는다고? 상상이 되었다. 에머럴드빛의 바다와 푸른 하늘, 그리고 이국적인 남국의 섬들 사이로 하얀 베네티 요트가 그림처럼 항해를 하고, 배 안에서는 귀여운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
“음, 요트에서 촬영을 하고 싶다는 거지? 그러면 기왕 하는 거 필리핀은 어때?”
“필리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