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리조트
“바다가 너무 예뻐요.”
“요트들도 너무 예쁘고요.”
푸른 바다와 하얀 요트, 그것은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필리핀에서는 고급 요트가 있어야 부자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마닐라의 마닐라 요트클럽은 필리핀의 부자들의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아름다운 마리나였다.
3인조 걸그룹 윙크윙크는, 리더인 정통파 미녀, 21살 유혜리와 20살의 메인보컬, 청순한 소녀 느낌의 박시은, 그리고 댄스 담당이자 건강 미녀인 21살 서희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필리핀까지 요트로 항해를 하려면 1주일 정도가 걸린다. 그래서 요트와 선장을 미리 보내고 일단 마닐라까지는 비행기로 이동해서 마닐라 요트클럽에서 선장과 합류하기로 했다.
“저게 진수 오빠 요트예요?”
“어..맞아요.”
“사장님, 진짜 멋있어요.”
필리핀으로 떠나게 된 여행의 멤버는 윙크윙크 3명과 사진 촬영 담당인 민영민 그리고 아이케이 빌딩의 경리담당 직원인 희진 씨와 나였다.
윙크윙크의 소속사는 민소희와 같은 회사였는데, 그다지 재정적으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당초 홍보용으로 저예산 화보를 제작하려고 한 모양인데 내가 필리핀으로 촬영 여행을 제안하자, 계획을 바꾸어서 정식 화보라기보다는 필리핀과 나의 베네티 요트를 배경으로 홍보용 사진과 영상을 촬영을 하기로 한 것이다.
“영민아, 그런데 무슨 메이크업 담당이나 조명 그런 스텝들은 없어도 되는 거야? 달랑, 너랑 윙크윙크 세 명만으로 촬영이 가능한 거냐고?”
“뭐, 대단한 화보를 찍는 것도 아닌데요 뭐. 메이크업이야 본인들이 하면 되는 거고, 조명이야 하늘과 태양이 조명이네요. 그리고 요새는 카메라가 좋아지기도 하고 나중에 보정을 해도 되니까,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래, 하긴,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어쨌든, 약속 장소인 마닐라 요트 클럽에는 미리 해운대에서 출발했던 나의 베네티 클래식 수프림 132가 대기하고 있었다.
진수 일행이 배에 오르자, 흰색의 요트는 다음 목적지인 산 페르난도로 향했다. 산 페르난도는 마닐라 북부의 산 페르난도 시티가 아니라, 루손 섬 북쪽의 라 유니온 주의 항구도시, 산 페르난도를 말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해변이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
산 페르난도, 킹스 리조트
아이케이 빌딩을 방문했던 민영민은 예상대로 빌딩 건물과 15층의 내 사무실 사진을 찍어서 학교의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양이었다. 당연히 나에 대한 재벌설은 더 확대 재생산되었고 거기에 필리핀으로 민영민과 윙크윙크와 함께 촬영 겸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져서,
필리핀에 엄청난 호화 리조트를 소유하고 개인 섬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헛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최진수 선배가 필리핀에 리조트를 가지고 있다면서?”
“그런 모양이던데, 진짜일까? 민영민을 그래서 리조트에 초대했다는 것 같아. 개인 소유의 섬도 여러 개 가지고 있고.”
“섬의 왕이라는 건가?”
“왕은 아니고, 섬 전체를 소유한 개념이라는 것 같던데, 필리핀에는 섬이 많으니까 돈만 있으면 섬 하나를 사서 개인 왕국을 만들 수도 있잖아.”
“그러면 그게 섬의 왕 아닌가?”
물론, 이제는 학교에 어떤 헛소문이 돌아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없고 자극적인 내용들로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소문이 퍼지는 과정을 보면, 인간이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하나의 팩트에서 출발해서 정보의 부정확성에 개인의 상상력과 오해가 더해지면 그럴듯한 소설이 창작되는 것이다.
대게 떠도는 풍문이라는 것은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필리핀에도 야마시타의 황금에 대한 무수한 소문들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은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일가가 야마시타 황금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50년대에 야마시타의 황금을 찾아서 그것으로 필리핀의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게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가요?”
김민성은 40대 초반의 단단한 체격의 남자로 필리핀에 이주한 지는 10년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킹스 리조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 외에 서핑용품도 빌려주는 가게도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그리고 간간이 현지 가이드 역할도 하고 있었는데 내일부터는 김민성의 안내로 근처의 무인도 투어를 할 예정이었다.
“근거요? 영부인이 스스로 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영부인이라면 대통령의 부인 말입니까?”
“예, 이멜다 마르코스 말입니다.”
독재자 마르코스와 그의 사치스런 아내 이멜다,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이야기였다. 이멜다는 70년대에 필리핀의 유명한 미인대회 우승자 출신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페르난디드 마르코스와 결혼을 한다,
케네디와 마를린 먼로처럼, 권력자와 육감적인 미녀 그리고 막대한 황금 같은 것들은 흥미로운 이야기의 소재들이다.
김민성과 나는 리조트 수영장 앞쪽 노천카페에서 내일 투어 일정을 상의하고 있었다. 킹스 리조트는 이름과는 달리 규모가 작은 아담한 리조트였는데, 수영장에는 윙크윙크 멤버들과 이희진 이렇게 4명의 여자들이 화려한 비키니를 뽐내며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민영민의 카메라가 쉬지 않고 쫓아다니고 있었다.
“사장님, 같이 수영해요.”
“진수 오빠, 안 들어오실 거예요?”
“아, 난, 김 사장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영민아 너는 안 들어가냐?”
“전 괜찮습니다. 전 사진 찍는 게 더 좋거든요.”
한동안 수영을 즐기던 이희진이 물 밖으로 나오자, 민영민의 카메라가 물 위로 올라온 이희진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희진 씨가 몸매가 좋다는 것은 전에도 알았지만 비키니를 입고 있는 모습은..
“어..엄청난 이야기군요. 그 황금 이야기 말입니다.”
아무튼, 마르코스는 66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때부터 막대한 선거자금 문제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코스는 독재자이기는 하지만,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건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금권선거를 했다고 할까? 아무튼 첫 번째 대통령이 될 때는 돈을 물 쓰듯 썼다고 하니까,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말이 많았죠.”
아무튼,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20년 이상 장기 독재를 하던 마르코스는 나름 잘나가던 필리핀 경제를 말아먹고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정권이 아키노에게 넘어간 후로도 그의 부정 축재 문제로 많은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특히, 미인대회 출신으로 미모와 사치스런 생활로 유명하던 이멜다는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나라 경제를 거덜 내고 그 돈으로 호화롭게 살았다는 대중들의 비난에 이멜다는 뜬금없이 야마시타 골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자기, 남편이 마르코스가 전쟁 직후 야마시타의 보물을 찾았고, 그 돈으로 뇌물을 바치며 그 당시 권력자였던 로하스 정권에서 승승장구했고, 66년 대선에서도 야마시타 골드의 금권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였다.
더 나아가, 50년대와 60년대의 필리핀 경제성장은 남편이 야마시타 골드의 힘으로 이끈 것이라는 것이다.
“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
“하하, 사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 경제가 좋았던 건 사실이죠. 장충체육관이라고 아시나요?”
“들어본 적은 있네요.”
“한때는 서울을 대표하는 체육 시설이었죠. 유명한 경기도 많이 하던 곳이고, 아무튼 그게 60년대 초반에 건설된 것인데, 당시에는 한국의 건설 기술로는 그 정도 대형 체육관을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그래서 필리핀 기술자들이 한국에서 가서 체육관 건설을 도운 거죠.”
“정말요? 필리핀 기술자들이 한국을 도왔다고요?”
필리핀의 휴양도시인 산 페르난도는 정말 아름다운 해변과 눈부신 자연과 풍광을 가진 멋진 곳이지만, 해변과 숲의 아름다움에 비해, 도시의 시가지나 거리 풍경은 어딘지 쇠락한 느낌의 도시였다.
이국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 낙후된 필리핀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낙후된 나라인 필리핀이 한국에, 그것도 세계 최고의 건설 강국 한국의 수도 서울의 장충체육관 건설에 기술 지원을 했다는 말인가?
“60년대에는 일본이 1등, 그리고 2등이 필리핀이었어요. 아시아 GDP 순위가 말입니다. 거기에 열대 지방이라 식량도 많고,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선진국이었죠. 건설 기술도 필리핀이 한 수 위였고, 물론, 일본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일본 기술자들이 서울에 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대신 필리핀 기술자들이 지원하러 간 거였죠.”
아무튼, 이멜다 마르코스의 주장은 자기가 돈을 펑펑 쓴 것은 사실이지만, 원래 그 돈은 남편이 찾은 야마시타 골드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 언뜻 황당한 말처럼도 들리지만, 이 이멜다의 변명이 필리핀에 야마시타 골드 열풍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이전부터 야마시타 골드에 관한 소문은 많았지만, 어쨌든, 당시 최고 권력층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야마시타 골드가 언급이 되면서 필리핀과 일본 같은 곳에서는 엄청난 화제가 된 거죠. 그래서 하나의 공식이 만들어졌어요.”
“공식요?”
“황금 발굴단의 공식이죠. 발굴에 필요한 돈과 현지 사정에 밝은 현지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투자할 일본인과 현지 안내 및 발굴 허가 신청을 담당할 필리핀인이 팀을 만들어서 황금 탐사를 하기 시작한 거죠.”
60년대만 해도 한국 따위는 우습게 보던 아시아의 경제 대국 필리핀이었지만, 마르코스 독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멜다의 말대로 60년대에 야마시타 골드로 번영했던 필리핀 경제가 황금 특수가 끝나면서 원래대로 돌아간 것인지, 필리핀 경제는 8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겪게 된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가난한 필리핀 이미지는 그때부터 고착되게 되고 말이다.
“그런 말들을 필리핀 사람들은 순진하게 믿은 건가요?”
“순진요? 순진해서 믿은 걸까요?”
김민성은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산 페르난도의 인상이 어떤가요?”
“그냥, 휴양지 분위기죠. 이국적이고, 아름답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와 멋진 남국의 풍광들, 뭐 그런 거죠.”
“여기 주민들이 살기에는 어떨 것 같습니까?”
“하하, 뭐, 썩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상당히 낙후된 느낌도 있고요.”
“맞아요. 필리핀은 아시아의 빈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라도 엉망이고, 정치도 엉망이고요. 사람들은 별 희망이 없죠. 이멜다가 야마시타 골드 이야기를 했을 때도 이미 경제가 무너져서 경제가 몰락하던 시기였었죠. 사람들은 현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멜다의 부정부패에 분노하기보다는 그녀가 말한 야마시타 골드에 빠져 버린 겁니다.”
김민성의 말로는 마르코스 일가는 아직도 필리핀에서는 상당한 인기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이 필리핀 경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고 믿는 사람도 많고, 그리고 이멜다가 말한 야마시타 골드가 실제 존재하고, 아직도 그 상당 부분은 필리핀 어디엔가 묻혀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정말 황금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나요?”
“그럼요? 필리핀 정부에서도 발굴 허가를 많이 내주죠.”
“황금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일단은 황금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확인해야죠. 은행에서 털어온 것일 수도 있고, 소유주가 있는 금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짜 일본군이 묻어 놓은 야마시타 골드라면 국유지에서 발견된 것은 개인이 40%를 가지게 되고 사유지에서 발견된 것이라면 개인이 60%를 가져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국유지나 사유지냐에 따라서 6:4로 나누는 거군요. 비율은 달라지고. 외국인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럴 겁니다. 일본인들이 특히 황금을 찾으러 많이 오거든요. 일본인들은 예전부터 야마시타 황금에 대해서 알고 있었죠. 그러다가 해외여행이 어렵지 않게 되는 시대가 오면서 황금을 찾아 필리핀으로 오기 시작한 거죠.”
“실제로 찾은 사람이 있나요?”
“소문은 많죠. 하지만 실제로 야마시타 골드를 찾았다고 해도, 그걸 밝히겠어요? 필리핀 정부가 알게 되는 순간, 발견한 황금의 40%에서 60%를 빼앗아 가는데 말입니다. 진짜 황금을 찾았다면 언론에 나와서 인터뷰를 할 일도 없고, 몰래 황금을 가지고 외국으로 도망가야겠죠. 안 그런가요?”
“하하, 그렇겠네요. 저도 우연히라도 무인도 같은 곳에서 황금을 찾으면 몰래 한국으로 빼돌려야겠습니다.”
김민성은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오늘은 리조트에서 좀 쉬시죠. 내일은 무인도 쪽으로 안내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