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의 열정
선착장에서 출발한 베네티 클래식 수프림 132는 부드럽게 에메럴드빛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날씨는 청명한 느낌이 들 정도로 완벽한 날씨였다.
김민성 사장은 선장에게 오늘 돌아볼 무인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갑판에서는 이미 사진 촬영이 시작되고 있었다.
윙크윙크는 가벼운 바캉스룩 컨셉이었다. 핫팬츠나 하늘거리는 원피스와 모자 정도를 쓰고 있는 모습은 발랄한 소녀들 그 자체였다. 마치 세 명의 친구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이국적인 남국의 섬을 탐방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날씨도 청명하고 바다도 잔잔해서 하얀 베네티 요트의 럭셔리한 화이트 컬러까지 더 해지자, 무슨 이온 음료 광고라도 찍는 샤랄라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김민성 사장이 선실의 살롱으로 내려왔다.
“최진수 사장님이 가겠다고 한 곳이, 무이무이 섬인 것 같군요.”
“그래요. 섬 이름은 잘 모르겠고, 지도를 보고 괜찮을 것 같아서 정한 곳입니다. 무이무이 섬은 어떤 곳인가요?”
“원래는 한국인 사업가가 리조트를 운영하던 곳인데 2년 전쯤에 태풍으로 리조트가 박살이 났죠. 그 후로는 리조트가 어려워져서 그대로 방치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인도는 아닌가요?”
“거기도 무인도죠. 필리핀에는 워낙 섬들도 많고 또 배들을 이용해서 섬들을 오고 가는 일들도 일상적이라 무인도의 개념이 한국과는 좀 달라요. 한국에서는 외떨어진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을 말하지만, 필리핀에서는 무인도의 기준이 물입니다.”
“물요? 식수나 그런 거 말인가요?”
“맞아요. 물이 나오지 않는 섬은 무인도라고 보는 거죠. 물론, 그런 섬들도 땅을 파서 물이 나오는 것도 있지만, 대게 작은 섬은 물이 나오지 않는 곳이라고 보면 돼요.”
무이무이 섬은 길이가 8km 정도로 섬 대부분이 산이기는 하지만 지하수가 나오는 섬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인도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원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전쟁 때 일본군이 사람들을 다 쫓아냈다고 하는 것 같던데.”
“일본군요?”
“예, 태평양 전쟁이라고 아시죠? 일본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 왔을 때가 있었거든요. 주변의 작은 섬들 중에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 그랬는지 일본 애들이 들어와서 산에 진지도 만들고 그랬나 보더라고요.”
역시, 일본군이 침입했던 섬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황금백합 문서의 암호문을 해석한 좌표와도 일치하고, 그렇다면 그 섬에는 야마시타 골드라고 불리는 일본군의 황금이 매장된 것이 틀림없을 거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주인이 따로 있는 섬이라는 건데, 일단은 섬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주인이 있는 섬인데 막 들어가도 되나요?”
“아, 걱정할 거 없어요. 저도 그 형님을 아는데, 관광객들이 들어가도 뭐라고 하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형님요?”
“예, 저보다 다섯 살 위인데, 아무튼, 그 형도 리조트를 만들어서 뭔가 사업을 해볼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태풍 때문에 리조트도 다 망가지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거죠. 그렇다고 섬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뭐야? 주인이 섬을 팔겠다는 건가? 하긴 들어보니, 원래는 무인도인 무이무이 섬을 사서 리조트를 만들고 한국인 관광객들 상대로 리조트 사업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태풍으로 일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태풍 피해가 컸나 보네요? 리조트 건물이 부서질 정도면?”
“예, 원래 필리핀 이런 데가 태풍 피해가 많은 편이에요. 태풍도 잦고 거기에 해변에 있던 작은 리조트라 말 그대로 직격탄을 맞은 거죠. 아무튼, 그 형도 자금이 바닥나서 더 어떻게 복구할 생각도 못 하고 몇 년째 저러고 있는 거죠.”
필리핀의 아름다운 바다와 작은 섬들 사이를 항해하던 배는 문제의 그 무이무이 섬에 도착했다.
“와, 사장님, 정말 섬이 예뻐요. 날씨도 너무 좋고.”
살랑거리는 하늘색 원피스 차림의 이희진도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섬의 모습에 감탄한 얼굴이었다.
“자, 일단 배를 선착장에 대고 상륙을 하면 됩니다.”
무인도라고는 해도 나무로 만든 선착장도 있고 해변에 작은 목조 건물들도 몇 개 보이고 있었다.
“섬이 제법 큰데요?”
“저 위쪽이 다, 산이라 그렇지 한 5만 평쯤 된다고 하더라고요. 길이가 8km 정도고.”
김민성의 말대로 제법 큰 섬이기는 한데, 선착장이 있는 곳의 해변과 그 앞쪽의 리조트가 있는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으로 이루어진 섬이었다.
사람이 살기에는 좀 공간이 부족하기는 한 곳이지만, 혼자서 개인 별장 같은 곳으로 쓰려고 한다면 굉장히 크고 넓은 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진수 선배님, 굉장한 섬이네요. 무인도 치고는 섬도 넓고 사진 촬영하기에는 너무 좋은 곳인데요.”
“음, 그렇지, 내 생각에도 그래.”
민영민은 윙크윙크 멤버들과 촬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촬영이니 뭐니 하는 것은 민영민 책임이니 난 신경 쓸 것은 없고, 일단 해변가의 리조트를 좀 둘러보기로 했다. 김민성 사장의 말대로 태풍의 직격탄을 맞았는지 방갈로 같은 건물들은 여기저기 쓰러지고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철제문으로 되어 있는 큰 건물도 하나 있었는데 리조트의 메인 건물인 것 같았다. 역시 안에 들어가 보니, 여기저기 지붕이 부서지기도 하고, 안쪽의 식당과 수영장 같은 곳들도 그냥 방치된 채로 폐허가 된 느낌이었다.
“이건 섬의 지도인가 보네요?”
“예, 무이무이 섬 관광 안내도죠. 준호 형이 나름 공을 들여서 만든 건데, 이제는 이렇게 막 굴러다니네요.”
리조트 본관 식당 테이블에는 큰 대형 지도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무이무이 섬의 자세한 모습이 그려진 지도였다. 관광객들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을 했는지 섬 여기저기의 가볼 만한 곳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산 중간쯤에 일본군의 진지 터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전에 이 섬을 샀던 한국인은 서준호라는 사업가였는데, 나름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었던 모양이었다.
섬의 지도도 제작하고, 일본군의 진지가 있던 곳도 관광 아이템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리를 좀 해 놓기도 하고 말이다. 산 중턱쯤에 진지가 여러 개가 있었는지 15개 정도의 지점에 벙커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섬에서 가볼 만한 곳들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리조트에 가까운 곳부터 번호를 매기면서 하나씩 표시를 한 게, 54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산 위의 일본군 진지라면 저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길이 있나요?”
“그럼요, 원래 산꼭대기까지 일본군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있었어요. 산 위에는 전망대 같은 곳도 있고요. 몇 년 관리를 안 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갈 수 있을 겁니다. 같이 한 번 올라가셔도 되고요.”
“아뇨, 혼자 가도 될 것 같네요. 잠깐 올라가서 구경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시죠.”
김민성은 산에 올라가기가 귀찮았는지 나 혼자 가겠다고 하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민영민과 윙크윙크는 벌써 비키니로 갈아입고, 해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희진도 어딘지 섹시한 핑크색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에 들어가서 수영을 즐기고 있고 말이다. 김민성도 해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하는 게 더 좋은지 야자수 그늘에 앉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삽 하나를 들고 나 혼자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지만, 나한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산 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산 중간쯤에 일본군 진지터라고 표시된 표지판이 보였다. 관광객들을 위해서 서준호가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잡초가 조금 무성하기는 했지만,
군대에서 진지 공사할 때 보던 그런 진지의 모습이 보였다. 중간에 보수공사를 한 건지, 70년 전에 만들어진 것 치고는 그 형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산 둘레를 따라 돌며 상당한 규모의 진지가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일본군의 진지인가?
진지는 단순히 땅을 판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만든 영구 진지 형태였다. 그리고 진지 중간에 지하 벙커로 이어지는 것들도 있었다.
지하 벙커도 있는 건가?
대충 구글맵으로 확인해 보니, 알뜨르에서 찾은 황금백합 문서의 암호 해독으로 나온 위도와 경도 좌표와 일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좌표와 구글맵으로 찾을 수 있는 장소는 일본군 진지와 일치하기는 하는데, 그 규모가 상당했다. 구글맵으로는 더이상 자세한 위치는 찾을 수가 없는 상황...
대체, 여기 어디가? 금괴가 묻혀 있다는 거야? 더이상 자세하게 야마시타 골드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되자 소위 말하는 멘붕이 왔다.
산을 올라와서 그런지 숨도 차고 땀도 나고 약간 어지러운 느낌적인 느낌도 들고 말이다. 무엇보다 여기까지 와서 길이 딱 막혀버린 것 같아, 막막한 기분도 들고 말이다.
겨우 필리핀까지 왔는데 여기서 이대로 끝나는 건가? 아니면 아무데나 한 번 땅이라도 파볼까? 하지만 어디를 파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한 눈으로 주저앉아 있는데, 아까 리조트에서 챙겨온 지도가 떠올랐다. 배낭에 넣어두었던 지도에는 여기저기 섬의 주요 핫플레이스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지점마다 간단한 설명과 함께 번호도 매겨져 있었고 말이다.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나름 자세한 지도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리고 진지와 각각의 벙커들에도 숫자로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행운의 과자는 먹으면 행운과 관련된 숫자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여러 개의 진지와 벙커들 중에 금괴가 있는 곳을 번호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단 과자를 하나 먹어보자고,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나오겠지.
배낭에서 행운의 과자병을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열대의 숲속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천천히 과자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과자를 씹기 시작했다. 산을 올라와서 그런지 행운의 과자는 평소보다 더 달콤하고 고소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과자의 고소함이 혀끝에 닿더니 어느 순간 이물감이 느껴졌다. 쪽지를 꺼내 확대를 해보았다. 역시, 숫자가 있었다.
‘38’
삼십..팔이라? 뭔가 좋은 숫자 같기도 하고.. 무이무이 섬 관광지도를 살펴보니, 38번은 동굴?
위치는 일본군의 진지 약간 위쪽이었다. 거기에 천연 동굴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천연 동굴이라? 설마? 일본군이 당연히 진지나 지하 벙커에 금을 숨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도를 따라가니 일본군 진지 바로 위쪽으로 동굴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도 보였다.
다행이네, 길도 있고 동굴로 들어가 볼까?
돌계단을 오르자 어른 키보다 약간 큰 높이의 동굴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가 좀 좁아지며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행히 배낭에는 랜턴이 있었다. 랜턴을 켜고 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다시 동굴이 넓어지며 꽤 큰 공간이 나왔다.
안은 20평 정도는 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는데. 바닥은 부드러운 흙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고, 전부터 있었던 자연 동굴인 것 같았다.
스마트폰으로 구글맵 좌표를 확인해 보니 일본군의 진지와 마찬가지로 표시되고 있었다.
좌표상으로는 이곳도 암호문에 나오는 좌표와 일치하는 곳이었다. 거기에 행운의 과자가 나온 번호가 가리키는 곳도 이곳이고, 그렇다면 역시 땅을 파봐야 하는 건가?
군대에서 익힌 삽질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군대에서 고참들에게 배운대로 천천히 삽질을 시작했다.
다행히 땅바닥의 흙은 부드러웠다. 밖은 여름 날씨였지만 동굴 안은 서늘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하자 땀이 나며 이내 흥건하게 몸이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팠을까? 삽 끝에 뭔가 덜컹하고 걸리는 느낌이었다.
뭐지? 드디어 찾은 건가? 조심스럽게 삽으로 주위를 더 파내려가자, 철로 만든 뚜껑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역시 금속으로 된 둥그런 손잡이도 달려 있었다. 이건 분명히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지하 공간으로 가는 입구였다.
젠장, 내가 뭔가를 찾기는 찾은 모양인데.. 잠깐, 혹시 그냥 이걸 당겨서 열면 부비트랩 같은 것이 폭발하는 것이 아닐까?
왠지 상상이 되었다. 쾅 하는 소리와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나의 조각들이 말이다.
순간 섬짓한 느낌이 들며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약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폭탄 제거반을 부를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나의 행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잡이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