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건물주
아이케이 빌딩 15층, 진수의 사무실
“음, 아이케이 빌딩을 인수하신 분이 바로 최진수 사장님셨군요.”
“저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서지수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상큼한 느낌의 여자였다. 그레이 컬러의 스커트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세련되면서도 어딘지 신선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저도 이 빌딩 거래에 대해서는 들었어요. 상당히 좋은 가격으로 인수하셨다고 말이에요.”
서지수의 말대로, 골드 부동산으로부터 인수한 이 빌딩은 720억에 구매를 했지만 몇 달 만에 주변의 빌딩 시세가 올라서, 지금은 9백억 이상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물론, 당분간은 이 빌딩을 매각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3만 9천 6백 4십 제곱미터라는 게 평수로는 얼마나 되는 겁니까?”
지금 아이케이 빌딩의 연면적은 3470평 정도다. 이번에 계약하려는 여의도의 빌딩과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건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연면적을 평수로 하면 1만 2천 평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지금 소유하고 계신 아이케이 빌딩의 4배보다 약간 작은 거죠."
일만 이천 평? 엄청나기는 하네, 지금 아이케이 빌딩도 내 나름대로는 상당히 큰 빌딩이라는 느낌인데, 멀리서 봐도 상당히 간지가 나고 말이야. 입주해 있는 입주자들도 강남에서 제법 잘 나가는 피부과나 벤처 기업들로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케이 빌딩의 건물주라는 자부심도 꽤 있고 말이다.
그런데 여의도의 빌딩은 이것보다 4배쯤 되는 덩치가 큰 녀석이다. 그리고 입주해 있는 입주자도 한성 금융 그룹이라는 금융회사 본사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뭔가? 스케일이 다른 묵직한 느낌이었다.
“꽤 큰 빌딩이네요. 실물로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까. 위치도 여의도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곳이고, 근처에 국회의사당이나 공영방송국 등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관들도 있고 말입니다.”
서지수는 싱긋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아이케이 빌딩도 좋은 가격에 인수하셨는데, 이번에도 인수하실 수 있는 가격이 상당히 좋습니다.”
“좋은 가격이라면? 대체 얼마에 인수 가능하다는 겁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빌딩보다 4배 정도에 위치도 여의도의 중심지, 그리고 금융회사의 본사로 나름 확실한 임대 수입도 보장되는 곳이라면 가격이 상당할 것 같았다.
“현재 빌딩 소유자가 제시한 금액은 2천 2백억입니다.”
이...이천 이백억? 괜찮은 건가? 어떤 거지? 물론, 지금 가지고 있는 자금이 2천 5백억쯤 되니까, 사지 못할 빌딩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2천 원도 아니고, 2천하고도 2백억을 주고 뭔가를 사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하, 이천..이백억이라는 건가요? 상당한 금액이기는 하군요. 물론, 저에게 그 정도 돈은 있지만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사실, 처음에는 너무 젊으신 분이라 의심이 되기도 했는데, 아이케이 빌딩도 이미 소유하고 계시고 재력이 상당하신가 봐요?”
서지수는 약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긴, 내가 서지수라도 궁금하기는 할 것 같았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내가, 강남 한복판에 지상 15층짜리 빌딩을 소유하고, 15층 공간을 통째로 사무실로 쓰면서 여의도에 2천억이 넘는 빌딩을 사고 싶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에 해외에서 사업이 좀 잘 된 편이죠. 국내 사업도 성공했고요.”
“사업이라면?”
“흠, 아무튼, 일종의 지하개발 사업이라고나 할까요. 땅을 파고 그러는 거 말입니다.”
“지하 개발요? 그러면 광산개발이나 그런 쪽인가요? 요새, 호주 같은 곳이 철광석 수출로 호황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 언니도 시드니에 사는데, 호주는 지금 지하자원만 개발해도 엄청난 수익이 난다고 말이에요.”
광산개발? 하긴 일종의 금광개발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일부러 묻어 둔 황금을 캐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원래 지구상의 금들은 모두 외계에서 와서 지구 표면에 뭍힌 일종의 외계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음모론자들은 황금이 외계에서 날아온 물질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외계인이 황금을 보내 지구인들을 자본주의에 세뇌를 시켰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외계인의 음모인지는 모르겠으나, 외계에서 날아온 황금들로 지구인들이 뭔가 세뇌에 빠진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라는 달콤한 세뇌에 말이다.
“하하, 언니가 있으시군요. 호주 시드니라 좋은 곳이죠.”
“가보셨어요?”
“아뇨. TV로 몇 번 봤죠. 여행 프로그램 같은 곳에서 말입니다. 아무튼, 제가 하는 지하개발 사업도 철광석을 캐는 일과 비슷하죠. 아무튼, 그걸로 꽤 돈을 벌었습니다.”
“새로 빌딩을 구매하실 만큼요?”
“예, 저는 뭐랄까? 땅과 관련된 일들이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땅을 파는 걸로 돈을 벌고 있고, 부동산 투자로도 수익이 괜찮은 편이고요.”
“그러신 것 같네요. 이번에 여의도 동화 빌딩도 인수를 하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좋은 투자 기회니까요. 참, 그런데 이 동화 빌딩은 인수를 위해서 특약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특약요?”
“예, 좀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빌딩의 매매 계약에 대해서 언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한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뭘 비밀로 하라는 거죠.”
“동화 빌딩을 매도하는 계약에 대해서 비밀을 지켜달라는 거죠. 그게 동화 빌딩 현재 소유주의 조건입니다.”
뭐야? 빌딩을 매각하면서 그 빌딩 매각은 비밀로 해달라는 건가?
“대체, 건물 소유주가 누군데 그렇게 까다로운 건가요? 재벌 총수라도 되는 겁니까?”
“어머, 그걸 어떻게?”
“대체 누구길래, 그런 조건을 거는 겁니까?”
“대성 그룹 장태식 회장님이라면 아시겠죠?”
장태식 회장, 대성전자 그룹의 장태식 회장 말인가?
“대성전자 그룹 말입니까?”
“예, 등기나 다른 문제는 전혀 없는 계약이고요, 비밀준수라는 건, 언론에 홍보를 자제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 대형 빌딩이라면 인수하는 입장에서는 큰 투자사업이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비밀준수라는 것이 무슨 1급 비밀 수준의 기밀을 요한다는 의미는 아니군요. 수천억짜리 빌딩을 샀다고 여기저기 떠벌리지 말라는 그런 의미인가요?”
“예, 비밀이라기보다 일을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으시다는 장태식 회장님의 요청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장태식 회장이 빌딩의 소유주라? 그런데 왜 비밀스럽게 빌딩을 매각하려는 걸까? 그리고 가격도 빌딩 가치에 비해서는 낮게 책정이 되었다는 것인데, 일종의 급매도를 하려는 것 같고 말이다. 장태식 회장 같은 재벌이 갑자기 급한 돈이 필요한 일이 있으려나?
“장태식 회장님 같은 재벌 총수가 개인소유의 빌딩을 급하게 팔 이유가 있나요?”
서지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유가 있으시겠죠. 하지만 제가 여쭤볼 수는 없는 일이고요. 아무튼, 언론이나 외부에 빌딩 인수에 대해서 홍보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상당히 좋은 가격으로 동화 빌딩을 인수하실 수 있는 기회인 것은 확실합니다.”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라는 거죠?”
“예, 저희 오션 부동산에서 자체 평가하기로는 최소 2천5백억에서, 2천 7백억 수준의 가치가 있는 빌딩이니까요. 그걸 2천 2백억에 인수하시는 거니까, 3백에서 5백억 수준의 차익을 기대하실 수 있는 기회인 거죠.”
건물, 그것도 대형 빌딩이라면 사실 정해진 가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업계에서 통용되는 기준이 있으니까,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 최소 3백억에서 5백억의 차익을 실현할 수 있는 빌딩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태식 회장은 왜, 굳이 수백억의 손해를 보면서까지 동화 빌딩을 급매를 하려는 것일까?
고민을 해봤지만,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장태식 회장이 개인적으로 어떤 돈이 필요해서 그런 거라는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그런 이유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서지수 대리의 말대로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행운의 과자에서 나온 행운으로 이루어지는 거래라면 서지수의 말대로 3백억 이상의 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의 나에게 3백억이라는 돈을 버는 일이 그다지 절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의도에 대형 오피스 빌딩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것도 이전 주인이 한국 굴지의 재벌기업 총수인 장태식 회장이라는 것이 나의 구미를 당기는 일이었다.
대성그룹의 장태식 회장이라면, 전에 나에게서 문위우표를 사 갔던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백제 호텔에서 있었던 대성그룹의 창립기념 행사에도 초대를 받았었고 말이다.
그때, 개인적으로 장태식 회장을 만났을 때는 나와는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동시대를 살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지만,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나와는 어떠한 교점도 없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재벌이라는 존재니까 말이다.
장태식 회장과 문위우표 발표 문제로 같은 테이블에 앉기도 하고, 회의장에서 이동을 하면서 언론에 둘이 같이 사진에 찍혀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장태식 회장과 나와의 관계는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만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판타지였던 것이다.
실제로는 어떤 접점도 없는 존재하지는 않는 관계, 있다면 그저 서로 얼굴과 이름 정도를 아는 사이라는 정도, 그나마도 장태식 회장은 지금쯤이면 나를 기억하지도 못 하겠지만 말이다.
“저, 최진수 사장님?”
“아, 예...”
“그래서 말인데요. 최진수 사장님이 언론에 비밀을 지켜주시는 조건이라면 장태식 회장님과의 거래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장태식 회장님과 거래를 해보시겠습니까?”
***
한남동, 하이엔드 레스토랑, 솔베이지
서지수의 소개로 장태식 회장과 만나게 된 곳은, 한남동에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는데, 가격도 가격이고, 돈이 있어도 소수의 회원들에게 예약제로 운영이 되는 곳으로 소위 말하는 손님을 가려 받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주로, 재벌가의 사람들이나 탑클래스의 연예인, 그 외에 강남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이 이 레스토랑의 회원들이었다.
유명 쉐프 출신의 사장이 운영하는 곳으로 음식의 퀄리티도 훌륭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저하게 고객들의 수준을 관리하는 곳이라고 했다.
초기부터 소수의 회원들에게만 예약을 받고 있어서 일반인들은 예약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도 장태식 회장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예약을 하기는 힘들었을 그런 곳이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회원제를 유지하는 이유라면, 이곳의 고객들이 우리나라 정재계의 유력인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나름 얼굴도 많이 알려지고 그래서 일반인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대중의 호기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 시선을 피해서 조용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찾는 사람들이 이 최고급 레스토랑의 고객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최고급 하이엔드 레스토랑이라는 말에 주눅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왔는데, 주차장을 보니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는 안 보이고 다들 고급 세단들 일색이었다.
가격으로 치면 나의 람보르기니도 거기에 밀리지는 않지만, 뭔가 코드가 좀 안 맞는다는 느낌은 들었다.
아무튼, 식당 안으로 들어와서 예약을 확인하자 직원이 안쪽의 룸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럭셔리한 안쪽의 룸에는 장태식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최진수 씨, 아니, 이제는 최진수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장태식은 예전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바로 나였다. 전에 장태식 회장을 만났을 때는, 문위우표를 팔러온 대학생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그와 동급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돈이 급한 장태식 회장이 급매로 내놓은 빌딩을 사기 위해, 그와 비즈니스 거래를 위해 장태식 회장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와 같은 테이블에서 동등하게 거래의 상대가 된 것이었다.
“하하, 그렇게 부르셔도 괜찮고요.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아무튼, 장태식 회장님을 다시 만나게 돼서 저도 영광입니다.”